<단독> 갑론을박 '말 많은' 장애인이동센터 무슨 일이…

“어두운 괴물 뱃속에 갇혀 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주변이 너무 어두워 불을 켰다. 조금 밝아지나 싶더니 이내 꺼졌다. 이번에는 주변 사람들과 같이 불을 밝혔다. 하지만 또 꺼졌다. 거듭된 시도에도 어둠은 가시질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괴물의 뱃속에 있다는 것을….

“내가 군청 앞에서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내 말을 믿어줄까요?” 모든 직장인이 ‘전태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전태일’은 직장에서 태어난다. 평범했던 월급쟁이 직장인이 노동법을 줄줄 읊는 투사가 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범했는데
노동투사로

박주연씨는 대학에서 보건복지학을 전공했다. 2015년 진도군 장애인생활이동지원센터(이하 장애인이동센터)에 지원할 때도 사무원을 희망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의 이동을 돕는 장애인이동센터는 센터 업무를 총괄하는 센터장, 상담업무와 차량예약, 회계 등을 담당하는 사무원, 운전을 맡는 운전원 등으로 구성된다.  

당시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의 직원은 총 4명. 박씨는 사무원 대신 운전원으로 일했다.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2호차’를 맡은 박씨에게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의 거의 모든 배차가 몰렸다. 차에서 내릴 시간도 없이 종일 운전을 했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직원이 4명뿐인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에서 박씨는 말 그대로 왕따였다. 8세 어린 동료 사무원은 박씨에게 ‘너’ ‘2호차’ ‘사형감이다’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당시 진도군 지회장을 겸하고 있던 센터장은 직원 회의에서 ‘개 같은 ○’ ‘멍청한 ○’ 이라고 욕했다. ‘스스로 못 견뎌서 사표 쓰게 만든다’ ‘모가지를 딴다’ 등 지속적인 모욕과 욕설, 고성이 박씨를 향했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에서 박씨는 투명인간이었다. 법정의무교육이나 행정사무 감사자료,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등 모든 구성원이 받아야 할 교육이 박씨의 유급휴가 기간에 이뤄졌다. 박씨를 징계하기 위한 징계위원회도 수시로 열렸다.

징계위원조차 반복적인 징계위원회 소집에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박씨는 2019년 전라남도 인권센터를 찾았다. 그는 동료 사무원과 지회장 겸 센터장을 상대로 직장 내 괴롭힘·인권침해 관련 진정을 제기했다. 녹음 파일, 문서 등 그동안 모은 자료를 도민 인권보호관에게 건넸다. 도 인권센터는 지난해 5월과 올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박씨의 진정 내용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5월27일 도 인권센터는 지회장 겸 센터장의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판단내리고, 신청인(박씨) 구제를 위해 유급휴가와 심리치료 제공 등 필요한 조치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는 도 인권센터의 이 같은 시정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 터져
센터장 채용·보조금 논란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박씨는 지난해 12월 2차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면서 도 인권센터를 다시 찾기에 이른다. 도 인권센터는 조사 결과 박씨가 ▲지속적인 폭언과 욕설, 험담 ▲업무 배제 등을 당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전보다 근무환경이 매우 악화됐다고 봤다. 그러면서 지난 3월31일 박씨의 2차 진정 내용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두 번에 걸친 도 인권센터의 직장 내 괴롭힘 인정, 시정권고 등에도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박씨가 신청한 유급휴가를 허가하지 않고, 징계위원회 소집을 진행하는 등 괴롭힘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


도 인권센터의 결정에도 이의신청을 제기하고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8건이나 제기하는 등 반발했다.

도 인권센터 관계자는 “피신청인들은 공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충분한 소명 기회를 제공했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에 직접 찾아가 소명을 받는 과정에서 피신청인이 서면으로 제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기다림 끝에 답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시정권고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9년 7월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통과됐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도 무용지물이다. 일종의 사각지대인 셈이다. 실제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는 도 인권센터, 언론, 시민단체 등이 비판과 지적의 창끝을 들이 밀어도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방패로 방어하고 있다.

도 인권센터 관계자는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진정 사건을 여러 건 담당하고 있는데, 시정권고를 이렇게까지 이행하지 않는 곳은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노무사, 시민단체 관계자들 역시 “한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라고 입을 모았다.

박씨는 지난 3월 도 인권센터의 결정이 나온 이후 언론과 시민단체 등을 통해 자신의 사정을 알리려 노력했다. 많은 언론에서 박씨의 이야기를 보도했고, 시민단체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그를 지원했다. 박씨는 보건복지부, 진도군,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전남지부·진도군 지회 등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맸다.

두 번이나
괴롭힘 인정

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박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여러 기관들의 외면은 박씨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는 지난달 18일 “근무태도가 불성실하고 직무명령에 정당한 이유 없이 불응했다”며 박씨에 대해 정직 3개월 징계를 의결했다. 기존의 인사위원들을 교체하면서까지 강행한 징계위원회 결과였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운영위원은 인사위원을 겸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사위원들이 갑자기 해촉됐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이의신청을 하려다가 안 했다. 어차피 해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더라. 나만 바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더 대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직 3개월 기간 동안 월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박씨는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해있다. 유일하게 남은 희망은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결과다. 

박씨는 징계 의결 전날인 지난달 17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고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회복지 노동자들에게 제도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문제는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에서 일어난 사건이 단순히 한 지회만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박씨 사건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관계자들은 장애인이동센터의 구조적인 문제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비판했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 문제가 빙산의 일각이고, 어딘가에 또 다른 ‘박씨’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애인이동센터는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시·도에 지부를 두고, 다시 지부가 시·군에 둔 지회에서 운영된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의 경우,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전남지부의 진도군 지회에서 운영하는 식이다. 각 지회의 지회장이 장애인이동센터 센터장을 겸임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시·군 지회장은 전맹(시력이 0으로 빛 지각을 하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시각장애인이 맡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이동센터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센터장이 눈이 보이지 않아 상황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봤다. 그러다보니 주변 관계자들에게 많이 휘둘리는 경향을 보였다”고 전했다.

지적에도
요지부동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의 경우도 진도군 지회장이 센터장을 겸임했는데, 당시 지회장이 전맹 상태의 시각장애인이었다고 한다. 도 인권센터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변의 입김에 휘둘릴 수 있는 시각장애인보다 상황 파악에 용이한 사람을 센터장에 채용하는 방식을 권고했다.

기존에 무급 명예직이었던 센터장 직급을 유급으로 바꿔 월급을 지급, 장애인이동센터 운영에 좀 더 적합한 인재를 뽑자는 취지다.

진도군에서 이를 받아들여 지난 3월 장애인이동센터는 센터장 공모 절차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도 잡음이 발생했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 직원 김모씨가 센터장 채용 절차를 진행하고, 자신이 입후보하는 일이 일어난 것.


이른바 ‘셀프채용’ 논란이 불거졌다. 총 3명이 센터장에 지원했지만 관계자 사이에서 2명은 들러리라는 말이 심심찮게 새 나왔다.

김씨가 박씨의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 가운데 1명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박씨는 “센터장에 지원한 김씨도 나를 괴롭힌 게 맞다. 전임 센터장, 직원 2명 등 총 3명이 나를 괴롭혔다”며 “채용 과정에서 김씨가 센터장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항변했는데 결국 (김씨가)뽑혔다”고 주장했다. 

실제 김씨는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 센터장으로 취임했다. 박씨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된 3명 가운데 2명이 지회장과 센터장을 맡고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과거 센터장을 겸임했던 진도군 지회장이 김씨를 센터장으로 만들었다는 말까지 돌았다.

센터장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가까운 사람을 센터장에 앉혀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다는 소문이다. 

진도군과 도 인권센터에 센터장 채용 문제로 민원이 제기됐다. 민원인은 ▲전임 센터장이 면접관으로 면접을 본 점 ▲김씨가 사표를 내지 않고 센터장 후보에 지원한 점 ▲면접 과정이 공정했는지 여부 등을 진도군에 질의했지만 ‘문제없이 진행됐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진도군은 김씨의 센터장 취임을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지회장 센터장 겸임
소극적 태도 사실관계 부정

진도군이 장애인이동센터에 지원한 보조금을 두고도 여러 지적사항들이 나왔다. 진도군은 장애인이동센터에 연 1억4000만원가량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는 이 돈을 인건비, 차량 수리비, 유류비 등으로 사용한다.

진도군의 ‘진도군 장애인생활이동지원센터 관련 운영 및 보조금 조사결과 보고’에서 장애인이동센터는 여러 가지 운영상 문제점을 드러냈다.

2018년과 2019년 예산 편성 과정에서 ‘사회복지법인 및 사회복지시설 재무·회계규칙’에서 규정한 서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또 편성 예산에 대한 공고 의무도 어겼다. 분기별 1회 이상 개최해야 할 운영위원회 정기회의도 개최하지 않았다. 

‘전라남도 장애인생활이동지원센터’ 운영규정에 따르면 운영위원회는 분기별로 정기회의를 개최하도록 돼있다. 운영위원들은 운영위원회를 통해 ▲운영 계획의 수립·평가 ▲종사자의 근무환경 개선 ▲종사자와 이용자의 인권보호 및 권익 증진 등을 논의한다.

하지만 <일요시사> 취재 결과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는 올해도 운영위원회를 전혀 개최하지 않았다.

직원이 4명에 불과한 작은 단체에서 ▲직장 내 괴롭힘 ▲센터장 채용 논란 ▲보조금 문제 등 총체적인 문제가 발생했지만 진도군은 물론 상위단체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전남지부, 진도군 지회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사실관계를 부정하는 등 박씨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진도군의 소극적인 행정이 일을 키웠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관계자들은 진도군이 매년 장애인이동센터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만큼 회계뿐만 아니라 인사, 직원 채용 등에 있어 확실한 관리·감독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이동센터가 진도군의 시정 조치를 따르지 않을 경우 ‘시설 폐쇄’ 등 강경한 대응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진도군청 주민복지과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박씨에 대한)직장 내 괴롭힘 문제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다. 센터장 채용 건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보조금 문제도 최근 진행한 회계감사 결과를 장애인이동센터에 통보했고, 시정 조치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전남지부 등은 진도군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각각 “잘 모른다”거나 “규정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인사권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 전남지부에 문의해보는 게 좋을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남지부는 “사건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지만, 운영규정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며 “진도군 지회에 물어보라”고 전했다. 

진도군 지회 관계자는 “박씨의 주장은 전부 허위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애초에 박씨를 포함한 직원 2명이 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피신청인이)박씨를 명예훼손으로 경찰에 고발했다는 점만 말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도 인권센터 결정에 대해서는 “(도 인권센터에서)제대로 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의 상위단체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책임론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민주노총 법률원 광주사무소 홍관희 노무사는 “이 사건이 진도군 장애인이동센터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법인사업주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광주지방고용노동청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대한 근로감독을 청원한 상태”라고 말했다.

미루고
또 미루고

이제 박씨에게 이 사건은 더 이상 개인만의 일이 아니다. 박씨는 자신 외에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사명감으로 힘겨운 사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주변에서 차라리 센터를 그만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지금 그만두면 모든 것을 잘못한 사람이 된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가보겠다”며 “내가 선례를 만들면 어딘가에 있을 나 같은 사람이 언젠가는 도움을 받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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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뚝심인가, 고집인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하다. 겉으로는 유연한 대처를 언급하면서 ‘2000명’이라는 수치는 굽히지 않을 기세다. 강 대 강 대치에 나섰던 의료계는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시사>와 인터뷰한 지방의대 A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정부의 강경 기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규군은 수뇌부만 처리하면 와해되기 쉽다. 하지만 현재 의료계는 게릴라 방식으로 대응 중이다. 주동자를 찾기 어렵고 실제 주동자도 없다. 전공의, 의대생 모두 조직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윤정부 입장에서는 협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괄 협상에 따른 일괄 타결은 어렵다고 본다.” 2월 이후 평행선만 실제 의료계는 대학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 등 여러 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를 큰 틀로 하되 대응 방식이나 세부적인 요구사항은 각각 다른 상황이다. A 교수의 말대로 의료계는 현재 단일협의체가 없다.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해도 앞에 대표로 나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과거 의정갈등이 일어났을 때 주로 의협이 나서서 의료계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을 이끌었다면 현재는 각개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표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 말 의협 대신 ‘대표성을 갖춘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대화하자고 의료계에 요청했다.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의협 회원엔 전공의·봉직의 등 모든 직역이 포함돼있고 모든 직역이 배출한 대의원 총회 의결을 거쳐 만들어진 조직이 비대위”라며 “정부가 의협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의료법에 근거해 모든 의사가 가입하는 법정 단체지만 개원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의정갈등 국면서 가장 선봉에 선 단체는 전공의가 모인 대전협이 꼽힌다. 전공의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병원을 떠나는 등 집단 강경 투쟁에 나서면서 의정갈등에 불이 붙었다. 의대생은 집단 휴학으로 힘을 실었다. 유급 마지노선에 이른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했지만 의대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서 의대생의 복귀 가능성 역시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실 1년 유예안 일축하면서도 ‘2000명 정원’ 논의 가능성 제시해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학칙에 따른 형식적인 신청 요건을 지킨 의대생의 휴학 신청은 누적 1만242명으로 전체 의대 재학생 대비 54.5% 규모에 이른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과 수업 거부는 지난 2월부터 시작됐다. 대학 사이에선 이달 중순이 지나면 여름방학까지 총동원해도 유급을 막을 수 없다. 의대는 특정 수업서 3분의 1 또는 4분의 1 이상을 결석하면 낙제(F) 처리되고 F가 하나라도 나올 경우 유급이 되도록 학칙을 세워둔 곳이 많다. 전공의의 집단사직으로 병원 업무가 마비되고 일부 의료진에 업무가 과중되는 이른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의대생의 집단 휴학은 의사 수급 부족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현장에 구멍이 생기면서 의사를 찾지 못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건도 일어났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지난 2월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5058명으로 현행보다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요지부동 상태다. 정부는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06년 이후 19년 동안 동결됐던 의대 정원 확대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발표 당시 의료계와 소통한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0월26일 ‘의대정원 확대 추진계획’을 발표한 이후 40개 대학으로부터 증원 수요와 교육역량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현장점검을 포함한 검증을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 언론사 여론조사 등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의미있게 언급했다. “흔들림 없는 의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국민의 응원을 지지대로 삼은 것이다. 요구 다른 의사단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는 더 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며 “이제는 결코 그런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들어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책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된 의사 인력 수급 체계를 검토했다. 수요 측면서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 만성질환의 증가와 같은 질병구조의 변화, 소득 증가에 따른 의료수요 변화까지 반영했다”며 “어떤 방법론이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자연 증감분을 고려하고도 최소 1만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의대 정원 확대 시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가차없는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8일, 의협이 제안한 의대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박민수 복지부 차관이 “내부 검토는 하겠고 현재로서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내놓은 답변서 더 강경해진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1년 유예안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만약 의료계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통일된 의견으로 제시한다면 논의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팔짱 낀 정부 공은 의료계로 일각에서는 정부는 초지일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로선 ‘2000명’이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수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의료계는 2000명 백지화가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정부든 의료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구부려야 맞닿는 법인데 평행선만 그리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의료계는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의료계에 요구하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 회장을 선출한 의협이 그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강성’으로 꼽히는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과 의협 비대위가 엇박자를 내고 있고 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갈등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현재 의협은 비대위원장과 차기 회장이 공존하는 상태다. 의협은 지난달 26일, 임 당선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임 당선인은 결선투표서 6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고 임기는 다음 달 1일부터다. 임 당선인의 등장으로 의협의 대정부 투쟁 수위가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임 당선인은 의대 정원 증원 철회를 비롯해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다른 의사단체에 비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마찰음이 나온 건 ‘단일대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전의교협, 대전협, 의대협 등과 함께 합동 기자회견을 이번주 안에 열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임 당선인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협 비대위, 차기 회장·전공의 회장 갈등 삐걱거리는 단일대오에 대화 공전 가능성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공문을 보내 임 당선인이 김택우 현 비대위원장 대신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지붕 두 가족’ 상황의 의협 창구를 단일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전협 박 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의협 비대위 김택우 위원장, 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합동 기자회견은 일단 취소된 상태다. 박 위원장과 임 당선인의 갈등도 관심사다. 임 당선인은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에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임 당선인은 SNS에 ‘내부의 적’을 운운하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게시글에 공유하며 ‘유감’이라고 적었다. 전의교협은 의대 비대위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로 구성된 단체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합류하면서 의료계 단일대오 구성이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통일된 의견을 내놓을 단일협의체 구성 속도에 따라 의정갈등의 타결 가능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협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임 당선인과 박 위원장의 행보로 삐걱거리면서 의료계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합의까지 가는 데는 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찮다. 입장차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타결까지 첩첩산중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에 대한 배려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이후 두 달 넘게 갈등이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불편을 겪고 있고 일부 의료진은 업무 과중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은 매일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10번째 갈등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의료계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