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추억 - 1964년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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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1.06.29 13:39:37
  • 호수 13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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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부터 밤까지 승부를 가르다

[JSA뉴스] 1964년 10월 열렸던 도쿄에서의 첫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56년 전 역사적인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이번에 살펴볼 1964년 도쿄올림픽의 이야기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길었던 남자 장대높이뛰기 결선이다.

장대높이뛰기는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1896년부터 하계 올림픽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던 종목이다. 이런 긴 역사 속에서도 1964년 도쿄올림픽의 남자 장대높이뛰기는 아주 특별한 위치에 올라 있다.

특별한 시간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장대높이뛰기는 1896년부터 모든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금메달을 독식해온 미국이 지배하는 종목이었다. 1964년 올림픽에서도 세계 기록 보유자 프레드 핸슨이 이끄는 미국 대표팀의 금메달은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졌다.

핸슨이 장대높이뛰기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964년부터다. 사실 1964년 올림픽 장대높이뛰기에서 미국의 금메달 행진을 이어갈 선수는 세계신기록을 여러 번 작성했던 브라이언 스턴버그로 평가됐지만, 운명은 스턴버그의 편이 아니었다.

스턴버그는 1963년 트램펄린 사고 이후로 목 아래가 마비됐다.


10월 열린 예선. 20개국에서 온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이 세계 최대의 스포츠 축제에서 자신의 이름을 날리겠다는 희망을 품고 경기장에 섰다. 핸슨은 대표팀 동료 존 페넬, 빌리 페멜턴과 함께 4.60m을 쉽게 넘었고, 18명의 선수들과 함께 결선에 진출했다.

역대 최장 시간 장대높이뛰기 결선
오후 1시 시작 10시 끝나는 진풍경

결선은 오후 1시경에 시작됐다. 여느 때처럼 3∼4시간 정도면 메달의 주인공이 가려질 것이라 예상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상이었다.

바가 4.40m에서 4.95m까지 올라가는 동안 선수들은 한 명씩 탈락해갔고, 마지막까지 남게 된 선수는 핸슨과 독일 선수인 볼프강 라인하르트, 클라우스 레네르츠, 만프레드 프로이스거 등 총 네 명이었다.

처음 바는 10∼20㎝씩 올려졌지만, 결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심판진의 판단에 따라 한 번에 5cm씩 올리기로 결정됐고, 이로 인해 결선의 경기 시간은 더욱 늘어나게 됐다.

마지막 남은 4명의 선수들이 모두 5m를 넘은 후에 바는 다시 5cm가 더 올라갔다. 핸슨은 이 높이를 패스하기로 결정했지만, 라인하르트는 5.05m를 넘었고, 나머지 두 명의 독일 선수들은 모두 실패했다.

핸슨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먼저 5.1m를 넘은 다음 라인하르트가 5.1m 도전에 실패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7시간 이상 진행된 결선에서 라인하르트와의 맞대결로 접어든 시점의 핸슨은 놀랍게도 단 4번의 도약만을 한 상태였다.


해가 저물고 경기장의 조명이 켜진 밤까지 이어진 결선. 남은 두 사람의 마지막 경쟁이 시작됐다. 핸슨과 라인하르트 모두 첫 두 번의 시도에서는 5.1m를 넘지 못했고, 라인하르트는 이미 눈에 띌 정도로 지쳐 있었다.

미국 프레드 핸슨 금메달
독일이 은·동 동시 차지

오후 10시. 기온이 20도 아래로 떨어진 상황에서 모든 것은 핸슨의 도약 한 번에 걸려 있었다. 마지막 시도에서 5.1m를 넘지 못하면 금메달은 라인하르트에게 가는 상황. 핸슨은 깔끔하게 바를 넘었고, 라인하르트는 마지막 시기에서도 5.1m를 넘지 못했다.

이것으로 올림픽 역사상 가장 길었던 장대높이뛰기 결선이 마무리됐다. 핸슨은 역대 최장 시간 결선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미국의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금메달 행진은 1968년 올림픽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1972년, 올림픽에서 새로운 장대인 ‘바나나 폴’ 사용이 금지되는 논란 속에서 미국이 기대를 걸던 디펜딩 챔피언 밥 시그런이 다른 장대로 경기를 치르게 됐고, 결국 연속 금메달 기록은 깨졌다.

1964년 도쿄올림픽 금메달로 핸슨은 개인 최고 업적을 달성한 동시에 장대높이뛰기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와 레네르츠도 독일 최초로 장대높이뛰기 올림픽 은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영광의 순간

도쿄올림픽의 장대높이뛰기 결선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대 최장 시간 결선에 더해 파이버글래스 장대가 사용된 첫 올림픽이었다. 파이버글래스 장대는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지만, 역대 최장 시간의 기록은 쉽게 깨어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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