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차로에서 차량이 ‘덜컹’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운전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이미 사고가 발생한 뒤다. 억울함을 호소해 재판까지 하지만 통상 운전자 과실로 결론이 난다.
'스텔스 보행자 사고'는 보행자가 술이나 약에 취해 도로에 누워 있다가 운전자가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깔고 지나가 부상이나 사망하게 되는 사고를 뜻한다. 운전자가 정상 주행을 했음에도 사고가 발생하면 처벌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따라 보행자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과실은?
스텔스 보행자 사고는 주로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부터 가을까지 새벽 시간에 주로 발생한다. 새벽에는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조명이 없는 곳이나 좁은 골목에서 무언가 있다고 인지하기도 힘들다.
운전자가 주변을 살펴 운전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차가 다니는 곳에 사람이 누워 있다고 상상하지 못한다. 부산에 사는 A씨 역시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한순간에 사망사고를 낸 피의자가 됐다.
평소처럼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출근하던 A씨는 주차장을 벗어나 이면도로로 들어서는 순간 사고를 경험했다. 그는 덜컹거리는 소리에 놀라 차량 밖으로 왔고, 사람이 차량에 깔린 것을 인지했다. 사고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당시 피해자는 술을 마시고 도로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A씨는 피해자 가족과 합의를 시도했으나 이뤄지지 않았고, 현재 재판 중이다. A씨는 그 시간에 누군가 도로에 누워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며 억울함을 호소 중이다. 아무리 운전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사고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도로에 술 마시고 누워도
운전자 무조건 책임져라?
A씨의 사례처럼 스텔스 보행자 사고가 발생하면 운전자의 과실 비율이 보행자보다 높다.
국내 자동차 민간심의기구인 자동차사고 과실비율 분쟁심의위원회(이하 분심위)는 운전자와 보행자의 자동차 사고 비율 책임을 통상 6:4로 제시한다. 전방주시 태만, 전조등 미작동 등의 인과관계에 따라 비율은 달라지지만, 보행자의 과실이 높다고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텔스 보행자 사고의 경우, 운전자가 신호와 속도를 지켜 운전을 하다가 보행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운전자 잘못이 일정 부분 있다고 판단한다. 물론 고의성이 없는 측면에서 봤기 때문에 보행자의 과실도 인정되지만 보행자의 처벌은 미약하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보행자는 술에 취해 도로에서 왔다 갔다 하거나 교통에 방해가 되도록 하는 행위를 하면 범칙금 3만원을 부과받는다. 처벌 수위가 약한 탓에 실제로 범칙금을 부과하는 사례는 별로 없다.
반면, 운전자는 사고가 난 뒤, 재판까지 간다고 해도 보통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이에 운전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당사자들은 분심위의 심의를 통해 서로 사고 비율을 조정하거나 합의할 수 있다.
범칙금 3만원 내면 끝?
보행자도 늘 주의해야
하지만 당사자들은 분심위의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가 있다. 자동차 사고와 관련해 많은 사안들을 처리하고 있지만 분심위에서 심의할 때 참고하는 기준의 체계가 오래된 부분이다. 2019년 개정됐지만 분심위의 과실 심의 및 조정은 '자동차사고 과실비율 인정기준'을 기준으로 한다.
1974년 일본에서 발표된 기준을 수정해 국내의 상황을 적용해 사용 중이다. 국내에서는 1976년부터 책자로 펴내 활용하고 있다. 그동안 과실 비율 기준이 몇 차례 개정이 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큰 변동이 없다.
스텔스 보행자에 대한 사고 과실비율 부분도 그렇다. 보행자의 책임이 약간 증가했을 뿐, 여전히 운전자의 과실 비율이 높고 처벌받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분심위 관계자는 "판례를 기준으로 과실비율을 정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분심위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스텔스 보행자 사고와 관련한 판례들은 가장 최근 사례가 2013년으로 비교적 오래됐다. 한문철 변호사는 과실비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응용이 필요한데, 과실비율 기준들을 일괄적으로 유형화, 단순화시키는 게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보호자 책임 강화
전문가들은 운전자가 운전 시 최대한 주의해야 하지만 "스텔스 보행자 역시 사고를 유발한 책임이 크다"고 본다. 이에 따라 범칙금의 액수를 확대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또 "사고에 대해 더욱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해 보행자의 경각심도 어느 정도 일깨워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대한민국과 다른 독일 교통사고 책임
독일 교통사고 중 보행자 사고의 비율은 OECD 기준 15.2%로 우리나라의 38%정도 보다 약 2.5배가량 낮다. 독일 역시 일반도로의 제한 속도는 50km정도로 우리와 비슷하다.
독일은 보행자의 권리가 우선시 되도록 교통법을 적용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만일 보행자가 사고를 촉발시킨다면 보행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다.
만약 보행자가 사고를 유발한 뒤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달아난다면 일종의 뺑소니 행위로 보아 처벌이 가해지게 된다. 또 명백한 실수로 보행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면 운전자는 병원 치료비 등을 물지 않아도 된다.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