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 인터뷰> 영화 ‘내가 죽던 날’ 신예 박지완 감독의 뚝심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국내에는 상업영화 흥행공식처럼 따라다니는 것들이 있다. 먼저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빨라야 하며, 카체이싱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동반되면 더 좋다. 인물 간의 갈등은 자극적인 소재일 때 더욱 끌리고, 배우들이 연기할 때 감정선도 진폭이 클수록 관심을 받는다. 엔딩은 힐링이나 위로보다 복수로 마무리돼야 더 짜릿하다. 이런 부분에 충실했을 때 흥행 요소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신작 <내가 죽던 날>은 앞서 언급한 흥행 요소를 철저히 피해갔다. 느린 속도감에 화려한 장면은 거의 없다. 충분히 자극적인 요소를 앞세울만한 소재도 깔아놓았는데, 활용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감정선도 전반적으로 절제돼있다. 주인공의 눈을 따라 사건으로 들어가는데, 도착점은 인물들의 깊은 감정이다. 새로운 화법의 이 영화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위로다. 

흥행 요소를 비껴간 <내가 죽던 날>은 엄청난 여운을 남긴다. 사건 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변주하는 화법이나 인류애가 느껴지는 메시지, 배우들의 절제되고 차분한 연기, 존중과 배려가 담긴 연출자의 배려심이 영화에서 전달된다. 혹자는 지난해 국내 영화계를 강타한 <벌새>의 그것과 비슷하다고도 한다. 

박지완 감독의 뚝심이 없었더라면, <내가 죽던 날>은 색감이 분명한 좋은 영화로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걸출한 신인 감독의 출현이다. 다음은 박 감독과의 일문일답.

- <내가 죽던 날>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어떻게 출발하게 된 작품인가?

▲  2013년에 처음 시작해서, 컴퓨터에 넣어놓고 종종 꺼내서 붙이고 한 작품이다. 가끔 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초고나 개봉작이나 엔딩은 비슷하다. 처음에 보여드렸을 때는 보신 분들의 욕망이 투영됐다. 


어떤 분들은 세진(노정의 분) 아빠 사건을 중심으로 범죄 스릴러를 만들자고 했다. 또는 현수의 아픔을 더 강하게 드러내서 극복기를 그려보자고 한 분들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기다렸다. 

그러다 권남진 PD님을 2018년 말에 만났다. 별 기대 없이 나갔는데, 제가 하고 싶은 걸 잘 읽어주셨고, 그러면서 시나리오가 확장됐다. 이 작품은 임자를 만나지 않으면 오해가 많을 수 있는 시나리오다. 

배우들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 김혜수 선배가 정확하게 읽어줬다. 당시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 혜수 선배가 캐스팅되고 나서는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힘이 컸던 것 같다. 

- 놀라운 점은 작품의 뚝심이다. 기존의 흥행 공식을 벗어난 화법이다. 말 그대로 뚝심이 보인다.  

▲ 대단한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얘기가 명확하게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사라진 소녀의 코드를 따라가는데, 기존 이런 미스터리 영화와 도착지가 다르다. 샛길로 셀 수 있는 길이 많아서 섬세하게 지도를 그려야 하는 게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었다. 

- 이 영화를 통해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 저는 사실 그 당시에 재밌는 것들을 넣은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서로 영향을 준다. 방금 전까지도 몰랐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 때문에 다음날을 잘 살 수 있는 그런 경우들이 있다. 나쁜 경우도 있겠지만, 좋은 경우도 많다. 그 부분을 영화적으로 보여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 섬세한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했는데, 중점적으로 생각한 부분이 뭔가. 

▲ 현수(김혜수 분)는 직업이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감정이 들어갈 것도 없고, 냉정하게 사건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수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건 결과만을 보는 직업인데, 본인이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상황을 접해보니 다른 게 보인다는 걸 표현해야 했다. 이걸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만들고 싶은 욕심은 강했다.

관객들이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요즘 영화들은 신이 시작하면 가져가는 게 있어야 하는데, 현수는 사람을 만나는데 얻어가는 게 없다. 관객들에게 견디라고 하는 거다. 그것을 모두 견디고 나면 어떤 깊은 여운을 얻을 것인데, 견뎌줄지 궁금하다. 그래도 관객들이 워낙 똑똑하고 현명해졌기 때문에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제목이 강렬하다. 이 제목은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 

▲ 너무 어둡다고 해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죽던 날은 세진의 기준에서 죽던 날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현수가 세진을 보니까 나도 죽었던 날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다시 살아가야겠다는 힘도 얻는다. 어떤 날을 기준으로 같이 겪은 것도 아니고, 시공간도 다른데,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이 아이러니를 읽어주길 바랬다. 

- 이 작품이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충분히 자극적인 요소를 깔아놨는데 하나도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세 수준으로 잘라낸다. 현수의 이혼 과정에서의 문제점, 세진과 남성의 하룻밤 등 여러 가지가 정황상 보이는데 장면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연출자의 배려심인가? 

▲ 현수의 사연 같은 경우는 이혼이 시작점이 됐을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이혼으로 인해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괜찮은 삶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내 인생은 맞는 건가?’ ‘내 잘못인가? 아닌가?’ 이런 류의 질문이다. 

어찌 됐든 그 질문들로 인해 잠도 잘 수 없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어떤 면에서 현수는 모욕을 겪은 사람이다. 일부 사람들을 보면 너무 심한 모욕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해명할 힘도 없고, 해명을 하면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장면으로 보여주기보다 현수의 태도로 드러나길 바랐는데, 혜수 선배가 정말 잘해줬다고 생각한다. 

- 현수는 동료와 바람을 핀 건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한 지점이다. 현수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고 해도 후배인 경찰 파트너와 좋은 관계였고 한 번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다정함과 배려가 있는 관계였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의 아내와도 관계가 좋았을 테지만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 그런 소문을 맞닥뜨리게 되면 보통은 그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수 입장에서는 굉장한 모욕을 겪은 데다 친한 동료와 관계가 끊어야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현수의 캐릭터에서는 그 모욕과 관계된 그 어떤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수근거림에 대해 대놓고 해명을 하지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변호사가 남편의 주장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냐고 물었을 때 해명이 아니라 ‘그 어떤 부탁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죠. 아마 남편은 그런 현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 세진의 경우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2차 가해를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 세진이 주위에는 오빠를 제외하고는 각자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선과 악이 딱히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희생까지는 하지 않는다. 형준(이상엽 분)도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세진이 아빠에 대해 알고 있으니 세진에게 뭔가 더 듣고 싶었을 것이고, 그러면 사건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싶었다. 만약 그게 형준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이 모든 불행이 형준 탓이 되버리니까.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면 변질이 되니까.

- 이 영화는 김혜수의 역할이 크다. 우울감을 기저에 깔고 있는 인물을 정말 훌륭히 표현했다고 본다. 

▲ 현장에서는 찍는 데 바쁘다 보니까, 연기를 잘하시는구나 정도였는데 편집하면서 보니까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라서 스케줄이 정말 빡빡했다. 원룸은 뛰고 감정 잡고 등등 모든 장면을 하루에 해결했다. 그렇게 모든 걸 하루에 하는데 잘하는 분이 또 있을까 싶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 들으시고, 아이디어도 많이 주신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혜수라는 배우에서 슬픈 눈이 보였다. 섬세한 선이 마음에 들었다. 연약한 김혜수를 오래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2019년 김혜수의 현재를 잘 담아내고 싶었다. 현수를 얼마나 따라갔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고 느끼는 폭이 클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많이 느끼길 바람이 있고. 김혜수라는 배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따라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 김혜수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나. 


▲ 선배님의 첫 인상은 매우 배려심 깊은 스타로 보였다. 제가 만난 선배님은 굉장히 작품에 대해 열정적으로 감상을 얘기해주셨고 정말 꼼꼼히 읽고 얘기해주시는 정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다만 인물들의 상황에 매우 공감하고 그걸 표현하는 부분에서 아이디어도 주시고 해서 처음 만난 자리고 하시겠다고 답을 주는 자리는 아니라서 마음 속으로 거절 하시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뵙고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 기대 이상으로 연기를 잘한 배우가 세진을 연기한 노정의다. 이번 작품으로 연기력이 완전히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 10대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처음 정의를 만났을 때 가만히 있을 때는 표정이 서늘하다가 웃을 때는 활짝 핀다. 호기심이 가는 웃음이었다. 만나서 얘기해보니 어린 나이같지 않게 영민하고 똘똘하다. 경력도 많다. 아역 치고 학교도 열심히 다녔다. 친구들하고 잘 지내기도 하고, 특이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도 그럴 것 같았다.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사는 친구. 

실제로 촬영할 때 정의는 좀 힘든 상태였다. 입시 때문에. 사실 연기만 하기도 벅찬 숙제인 정의 입장에서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한테 ‘괜찮니?’라고 하면 눈으로는 ‘안 괜찮아요’라고 하는데, 다른 내색은 안 했다. 

정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세계에 있다 보니 지나치게 똘똘하다. 스크립터가 말하길 정의는 연결을 맞출 게 없다. 자기가 알아서 왼손 오른손을 다 맞추고 있다. 솔직히 안쓰러웠다. 얼마나 이 현장에서 많은 요구를 받았으면, 그런 것까지 다 고민하고 익혔겠나. 아마 세세하게 아역을 배려하는 현장이 많지 않았을 텐데, 본인이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스스로 기술을 익힌 거다.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랬다. 태국 촬영 쯤에 학교에 합격했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 

- 이번에 입봉을 하게 됐는데, 이전의 이력은 어떻게 되나?

▲ 영화사 봄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쓰리 몬스터>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을 담당했다. 영화 학교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스크립터 일을 2008년부터 했다. 언제 데뷔할지 모르는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잘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많았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했다. 

- 영화에 대한 설명, 스스로에 대한 판단, 타인에 대한 생각 등 전반적으로 냉철하다. 객관화가 매우 잘된 느낌이다. 

▲ 냉철하게 봐야만 한다. 주위에 조급하게 데뷔해서 실력 발휘를 못하는 친구들도 많이 봤다. 스스로 감독이라 칭하기 부끄럽다. 몇 편을 찍어야 감독이라는 칭호가 어울릴지도 고민해 봤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야기를 계속 잘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럴려면 냉정해야만 한다. 나와 관객들과 이 세상이 원하는 이야기를 좋은 타이밍에 해야 한다. 

- 이번 영화를 하면서 힘들었던 게 있다면 혹시 무엇이었나. 

▲ 영화감독의 위치에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게 있지만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혜수 선배님이 아무리 잘해도 내가 실수하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내가 유지할 수 있는 건 내 태도 밖에 없었다. 왜 만들려고 하고, 왜 이 영화를 선택했고, 어떤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더이상 영화를 찍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뿐 아니라 대다수 배우가 이 영화의 의미를 읽고 들어와 줬다.

신인 감독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이름이다. 근데 그 의미가 영화에 나오지 않으면, 저에게는 정말 악몽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게 마음을 많이 졸이게 했다. 제가 분명히 어설펐을 것이고, 참견하고 싶었을 텐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날 믿고 기다려줬다. 정말 판이 잘 깔렸고, 나에게는 투정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아야만 했다.

- 힘든 순간이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내가 잘 가고 있구나라고 느낀 장면이 있을까. 

▲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장면이기도 한데, 후반부에 현수와 순천댁(이정은 분)이 만나는 장면이다. 촬영을 준비 중인데, 정은 선배가 울려고 한다. 눈물이 나오면 안 된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데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배우들의 이해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고민은 누구부터 찍을 것이었냐였다. 연출자로서는 복이었다. 

또 촬영과 편집 기간을 거치는 내내 어떤 게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현수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이해를 돕고자 편집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코로나19 때문에 편집할 시간이 넉넉했다. 그래서 고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똑똑해진 관객들이 이 감정선을 이해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 이제 첫 걸음을 뗐다. 워낙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부가 있다면?

▲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이야기의 단점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생각한 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인 면이 없지 않은데 다행히 저와 생각이 같은 제작자들을 만나서 완성할 수 있었다. 만들고 보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사실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게 될지 그래서 더 기대 되고 두렵기도 하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영화와 이야기가 존재하고 앞으로도 많을 테지만 그래도 제가 만들 영화를 위한 자리가 있다면 그래도 조금 다른, 좀 더 새로운 지점을 도전하는 영화였으면 한다. 또 그런 이야기를 기다리는 관객과 잘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야 영화 만드는 일이 비로소 제 직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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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