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 답답하거나 말거나' 망설이는 안철수 노림수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2.07.11 09:25:17
  • 댓글 0개

야권이 사정하거나 국민이 억지로 등 떠밀 때까지?

[일요시사=김명일 기자] 제18대 대선이 불과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유력한 대권주자로서 출마도 불출마도 선언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정상적인 태도"라는 비판이다. 자신의 정책과 정치적 신념들을 소상히 밝혀 국민들에게 검증할 시간을 줘야만 한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무려 4년 가까이 이어져온 박근혜 대세론을 단숨에 무너뜨리며 야권의 대항마로 떠오른 안철수, 그는 지금 무엇을 재고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기 전까진 민주통합당 내에서는 지난 2007년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지난 2007년 제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BBK의혹 등으로 큰 곤혹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동영 민주당 후보를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표 차이로 따돌리며 당선됐다. 대선투표 전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당선자를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역대 가장 싱거운 대선이었다. 민주당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대권을 허무하게 내줬다.

'안풍' 매스컴의 힘?
준비된 신드롬?

이대로 박근혜 대세론이 계속된다면 2012년 대선도 다르지 않을 것이란 위기감이 팽배했던 게 지난 몇 개월 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안 원장이 정치권에 혜성처럼 나타나면서 대권판도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그는 대권후보로 거론되자마자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과의 여론조사 양자대결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동안 정치권에 수십년씩 몸 담아온 정치9단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안 원장은 지난해 9월2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안 원장은 이에 대해 "정말로 자격 없는 이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시장일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선거 출마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50%가 넘는 지지율로 가장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였던 안 원장은 당시 5% 가량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던 박원순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며 박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불과 5%의 지지율을 보였던 박 후보는 안 원장의 지지와 민주통합당의 지원(?)으로 야권단일후보로 출마해 서울시장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하는 쾌거를 거뒀다. 비록 민주통합당과의 경선을 거치긴 했지만 무소속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전 세계 정치사에도 정당 출신이 아닌 무소속 후보가 서울시장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 당선된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안철수라는 한 개인에게 수십 년의 역사와 수십만의 조직을 자랑하는 정당정치가 무릎을 꿇은 굴욕적이고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출마선언 지연은 정치적 전략? 누가 정치신인에게 코치하나
당사자는 말이 없는데 언론만 호들갑? "준비되면 입장 밝힐까"

서울시장 선거를 계기로 안철수 신드롬은 순식간에 대선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안 원장이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 것은 역시 대선출마를 위한 것이 아니겠냐는 예상이었다.

안철수 열풍에 대한 다양한 분석도 쏟아져 나왔다. 안 원장은 이미 V3, 안철수연구소 등을 통해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이같은 정치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가 지금과 같은 정치적 거물로 급성장하게 된 것은 역시 방송의 힘이 컸다는 분석이다. 특히 지난 2009년 6월 17일 MBC TV <무릎팍도사> 안철수편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다. 일부에서는 안 원장을 너무 미화시켰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했던 안 원장의 삶의 궤적들은 국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안 원장 본인도 "TV에 한번 출연했더니 그 효과가 엄청났다"면서 스스로도 놀라워했다는 후문이다.


또 일반 국민들이 안 원장에 열광한 이유 중 하나는 안 원장이 탈(脫)이념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선거 때마다 지겹도록 이어져온 이념투쟁에 질려있었고, 이념이나 민심을 자신의 권력투쟁에 이용하는 기성정치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안 원장의 탈이념적 행보는 국민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고, 기성정치권에 대한 환멸은 안철수 신드롬의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안철수 신드롬이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안 원장은 지난 2011년 중순부터 최측근으로 알려진 '시골의사' 박경철과 함께 전국을 누비는 '청춘콘서트'를 진행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정치적 행보를 펼쳐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안철수 한계론
깨끗한 것도 죄?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신드롬을 경계하면서도 "정치적, 제도적 기반이 없는 대중적 인기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오래 전 "안철수 바람은 거품"이라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벼락인기를 등에 업고 하는 정치는 금방 밑천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안 원장의 대선출마 선언이 자꾸 늦춰지자 지지율은 서서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한 유권자는 "안 원장이 청춘콘서트 등에서 했다는 말을 들어보면 그냥 듣기 좋은 말만 나열해 놓은 것이어서 정치적 철학 등을 알기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안 원장을 지지하지만 이제 대선이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 무엇을 보고 표를 달라는 것인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안 원장의 한 측근은 "안 원장 본인은 아무런 의사도 밝히지 않았는데 자꾸 언론에서 '오늘 출마 선언 한다, 내일 한다'는 등의 추측기사를 내보내니까 국민들이 피로감과 실망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우리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치전문가들 역시 "아직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도 정식으로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다. 안 원장의 출마 선언이 딱히 늦었다고 볼 순 없다. 본인이 준비가 되면 입장을 밝힐 텐데 주위에서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 같다. 앞으로 대선이 5개월이나 남았는데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시간이면 사돈네 팔촌까지 조사하고도 남을 것"이라며 "일례로 박원순 서울시장도 선거 한 달 전에 출마했지만 아들의 병역비리 등 매우 혹독한 검증을 거쳤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세론' 일거에 집어삼킨 '안풍'. 허풍인가 태풍인가
연고도 없이 나타나 야권판세 좌우 '구세주인가 훼방꾼인가'

또 안 원장의 불출마설에 대해서는 "현재 총선 후 여론조사 결과 박 전 대표가 다시 독주체제를 형성하는 모양새다. 최근 문재인 고문이 야권에서 떠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박 전 위원장과는 격차가 있다. 안 원장이 이제 와서 불출마를 선언을 해버리고 발을 뺀다면 야권 전체 대선 레이스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서울시장 선거 때처럼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그동안 안철수의 입만 바라보며 기다려 왔던 국민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 평소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안 원장의 성격으로 볼 때 어떤 식으로든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철수 한계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안 원장은 청춘콘서트 부산대 강연을 통해 "변화의 열망이 나한테 온 것뿐이지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안 원장 스스로도 대중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면 '안풍'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기성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안 원장이 대선출마를 공식화 한다면 결국 민주통합당 등 야권과 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성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는 것에 불과하다. 안 원장을 향한 기대감은 순식간에 '안철수도 어쩔 수가 없다'는 실망감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안 원장에 대해 "안 원장의 경우는 정치인으로서 지나치게 이미지가 깨끗하다. 이게 매우 큰 강점이지만 반면 후보검증 과정에서 아주 작은 흠만 있어도 지지율이 크게 폭락할 위험도 있다"며 "일례로 한 언론이 안 원장이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다는 보도를 해 진위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었는데 다른 후보들 같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사항임에도 안 원장이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단순히 개인적 고민으로 출마선언이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안 원장이 사실은 매우 영리한 정치행보를 펼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권출마를 망설이는 안 원장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매우 답답해하고 있지만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담겨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예상하는 시점에 출마를 선언하는 것은 정치적 임팩트가 약하고, 출마선언과 동시에 시작될 여야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정치전문가들은 "안 원장이 비정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기존 정치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정치적 감각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총선을 앞두고 탈북자 북송 반대 집회 현장을 찾은 것이나 MBC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보수와 진보 모두의 표심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영리한 판단이었다는 평가다. 이는 사안에 따라서는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안 원장의 지론을 행동으로 보여준 결과였기에 더욱 신뢰가 간다는 분석이다. 그 시점 또한 자신이 대중의 관심권에서 멀어진다고 느껴질 때마다 적절하게 정치적 이슈에 대한 발언을 내놓았다.

영리한 정치행보
불출마 가능성 낮아

게다가 지난해 11월14일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연구소 주식의 절반 가량(1500억 상당)을 사회에 환원한 통 큰 기부는 정치권을 일순 충격에 빠트렸다. 그 흔한 기자회견조차 없이 이뤄진 기부였지만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다음 날 주요 일간지의 1면은 모두 안 원장이 장식했다.

안 원장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일"이라며 대권행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강조했지만 이번 기부를 통해 대권주자 이미지를 굳혔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한 정치평론가는 "태풍은 바다가 차가워지면 소멸해 버리지만 뜨거운 바다에서 수증기가 유입되면 막강한 슈퍼태풍으로 자란다. 안풍 역시 민심이라는 바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느냐, 뜨겁게 달아오르느냐에 따라 소멸해버릴 수도 대선정국을 집어삼킬 태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며 "안철수 신드롬의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만 한다"고 말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