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세훈 기자 =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정부의 일자리 안정화정책을 받아들이는 공공기관 노동자들의 한숨이 깊다. 정년까지 일할 수 있게 된 점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급여나 처우는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정부가 인천국제공항을 시작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을 편 지 1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2017년 국회예산정책처 조사에 따르면 현재 공공기관서 근무하는 근로자는 모두 44만6010명이다. 이 가운데 정규직 근로자는 29만5704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66%를 차지한다. 나머지 34%의 근로자는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다시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기간제 근로자' '무기계약 근로자' '소속외인력'로 나뉜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그룹은 소속외인력이다.
세 가지 유형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공공부문서 정규직으로 전환이 결정된 비정규직 인원은 모두 10만1000명이다. 하지만 상당수가 무기계약직이라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연일 무기계약근로자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번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제도를 없애겠다는 공약에 기대감이 컸다” “기관 내 사용하는 신분증이 다를 뿐만 아니라 불리는 호칭도 제각각” “업무와 관련한 교육 기회도 차별” 등 정책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의견이 줄을 잇는다.
무기계약근로자의 처우는 각 기관의 기관장 제량에 따라 대부분 정해진다. 고용노동부가 최소한의 윤곽을 정한 지침을 지역 관리공단에 제시하면 공단은 각 기관에 세부지침을 내린다.
오는 6월1일 서울중앙보훈병원은 이달 말 계약이 끝나는 파견 직원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도입
정년까지 반갑지만 처우는 못해
보훈병원과 계약을 앞둔 홍모씨는 하소연하듯 말을 꺼냈다.
홍씨는 “정규직 전환의 실상이 무기계약직이라는 사실이 실망스럽다. 오히려 급여는 최저시급으로 계산돼 각종 수당을 챙길 수 있던 예전보다 못한 급여를 받을 지도 모르겠다. 승진제도가 있긴 하지만 승진을 해도 정규직 아랫사람 격으로 보일 것이 뻔하다”고 우려했다.
현재 서울보훈병원서 파견직으로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영양사, 조리원, 청소부 등을 비롯해 10여개 직군에 있다. 이 근로자들이 무기계약직으로 계약하면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시급으로 계산해 받게 된다. 그리고 1년에 한번 성과급과 보충수당을 받는다.
보훈병원 관계자는 무기계약 근로자의 처우에 대해 “최저임금수준서 최저임금수준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리후생 측면에선 오히려 나아졌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학자금도 주고 유급휴가도 생겨 전과 비교했을 때 괜찮은 조건”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017년 8월에 발표한 ‘비정규직 계약기간 만료 도래자에 대한 조치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기관과 직접고용형태로 전환된 근로자의 임금체계는 기관의 급격한 재정 부담이 수반되지 않는 선에서 직종별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체계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고 명시했다.
또 계약직 근로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시기를 앞당길 수 있도록 예산을 사용하기를 각 기관에 권고하고 있다.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게 할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고용노동의 안정화를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근로자의 처우를 개선은 점진적으로 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월급 더 깎일라~"
속타는 파견 직원들
무기계약직 근로자의 처우에 대해 공공기관도 난처한 입장이다. 명분만 앞세운 정부의 지침을 확보된 예산 없이 진행하려니 골머리가 아픈 것이다.
파이터치연구원 김강현 연구위원은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애매한 무기계약직이 늘어나는 것은 공공기관의 고용형태가 왜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무기계약직 제도는 조직 내 갈등과 예산 등의 측면서 약점이 분명한 제도라는 평가다. 공공부문서 무리하게 정부의 고용지침을 따라가다 보니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무기계약직은 급여와 복리후생, 처우, 승진 등이 엄연히 정규직과 다르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부가 기대하는 일자리의 질적 개선효과에 별 영향을 줄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일자리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 변화의 큰 그림을 보고 정규직화 논의가 함께 이뤄지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어떻게 노동자들을 정규직화시킬지 고민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계획과 투자를 통해 노동자들이 산업구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용정책과 관련해 우리나라와 비슷한 산업구조를 가진 핀란드의 사례를 소개해본다. 핀란드 하면 복지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해 우리나라와 별로 공통점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세계적으로 한국과 핀란드는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나라고 인구대비 대기업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한다.
한때 핀란드서 노키아가 한국의 삼성 역할을 했던 것처럼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소수 대기업의 영향력이 큰 나라다. 지난 2008년 이후 노키아는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노키아는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에 6조7000억이라는 헐값에 팔렸다.
이후 핀란드의 고용시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대규모 정리해고가 있었고 실업자가 길거리로 쏟아졌다. 당시 핀란드를 바라보는 세계 경제학계는 대기업에 의존하는 국가경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경고했다.
대량 실업사태가 발생한 핀란드가 이를 극복하고 멋지게 재기에 성공한 과정이 흥미롭다. 핀란드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의 복지국가로 성장했을까.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은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의 이익이 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보도내용은 세계적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핀란드의 노동자들이 노키아가 망한 후 갈 곳이 없어지자 스스로 창업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벤처기업들이 바로 ‘앵그리버드’로 유명한 '로비오', ‘클리시오브클랜’이라는 게임을 만들어낸 '슈퍼셀' 같은 기업이다. 노키아를 대신해 수백 개의 벤처기업들이 국가경제를 지탱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핀란드정부의 복지정책 때문이다. 핀란드 정부는 노키아가 망한 후 기본적으로 실업자들에게 충분한 실업수당을 지원해 노동자들의 생계를 보장해줬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국가가 개입해 중소기업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을 주도한 곳은 국가혁신기금과 의회서 만든 미래위원회 두 곳이다.
이 두 단체는 20년 단위의 장기적인 안목으로 계획을 세우고 지속적인 투자를 했다. 기업이나 노동자들은 실패를 해도 일정 수준의 생계가 보장되는 사회 안전망 속에서 든든하게 버텼다.
결국 핀란드는 강력한 복지를 기반으로 대기업에 의존했던 경제구조를 수백개의 유능하고 창의적인 중소기업으로 대체해냈다.
머나먼 정규직
정부가 이야기하는 경제모델인 사람중심경제, 소득주도성장 같은 말의 의미도 복지를 기반으로 하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계약을 앞둔 노동자들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탄원을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