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보훈병원 ‘눈속임 계약’ 논란

  • 김세훈 기자 space0122@naver.com
  • 등록 2018.05.21 11:38:57
  • 호수 1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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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직 된다고 좋아했는데…"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세훈 기자 =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정부의 일자리 안정화정책을 받아들이는 공공기관 노동자들의 한숨이 깊다. 정년까지 일할 수 있게 된 점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급여나 처우는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정부가 인천국제공항을 시작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을 편 지 1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2017년 국회예산정책처 조사에 따르면 현재 공공기관서 근무하는 근로자는 모두 44만6010명이다. 이 가운데 정규직 근로자는 29만5704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66%를 차지한다. 나머지 34%의 근로자는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다시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기간제 근로자' '무기계약 근로자' '소속외인력'로 나뉜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그룹은 소속외인력이다. 

세 가지 유형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공공부문서 정규직으로 전환이 결정된 비정규직 인원은 모두 10만1000명이다. 하지만 상당수가 무기계약직이라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연일 무기계약근로자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번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제도를 없애겠다는 공약에 기대감이 컸다” “기관 내 사용하는 신분증이 다를 뿐만 아니라 불리는 호칭도 제각각” “업무와 관련한 교육 기회도 차별” 등 정책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의견이 줄을 잇는다. 


무기계약근로자의 처우는 각 기관의 기관장 제량에 따라 대부분 정해진다. 고용노동부가 최소한의 윤곽을 정한 지침을 지역 관리공단에 제시하면 공단은 각 기관에 세부지침을 내린다.

오는 6월1일 서울중앙보훈병원은 이달 말 계약이 끝나는 파견 직원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도입
정년까지 반갑지만 처우는 못해

보훈병원과 계약을 앞둔 홍모씨는 하소연하듯 말을 꺼냈다. 

홍씨는 “정규직 전환의 실상이 무기계약직이라는 사실이 실망스럽다. 오히려 급여는 최저시급으로 계산돼 각종 수당을 챙길 수 있던 예전보다 못한 급여를 받을 지도 모르겠다. 승진제도가 있긴 하지만 승진을 해도 정규직 아랫사람 격으로 보일 것이 뻔하다”고 우려했다.

현재 서울보훈병원서 파견직으로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영양사, 조리원, 청소부 등을 비롯해 10여개 직군에 있다. 이 근로자들이 무기계약직으로 계약하면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시급으로 계산해 받게 된다. 그리고 1년에 한번 성과급과 보충수당을 받는다.
 

보훈병원 관계자는 무기계약 근로자의 처우에 대해 “최저임금수준서 최저임금수준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리후생 측면에선 오히려 나아졌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학자금도 주고 유급휴가도 생겨 전과 비교했을 때 괜찮은 조건”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017년 8월에 발표한 ‘비정규직 계약기간 만료 도래자에 대한 조치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기관과 직접고용형태로 전환된 근로자의 임금체계는 기관의 급격한 재정 부담이 수반되지 않는 선에서 직종별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체계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고 명시했다. 

또 계약직 근로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시기를 앞당길 수 있도록 예산을 사용하기를 각 기관에 권고하고 있다.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게 할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고용노동의 안정화를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근로자의 처우를 개선은 점진적으로 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월급 더 깎일라~"
속타는 파견 직원들

무기계약직 근로자의 처우에 대해 공공기관도 난처한 입장이다. 명분만 앞세운 정부의 지침을 확보된 예산 없이 진행하려니 골머리가 아픈 것이다.

파이터치연구원 김강현 연구위원은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애매한 무기계약직이 늘어나는 것은 공공기관의 고용형태가 왜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무기계약직 제도는 조직 내 갈등과 예산 등의 측면서 약점이 분명한 제도라는 평가다. 공공부문서 무리하게 정부의 고용지침을 따라가다 보니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무기계약직은 급여와 복리후생, 처우, 승진 등이 엄연히 정규직과 다르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부가 기대하는 일자리의 질적 개선효과에 별 영향을 줄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일자리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 변화의 큰 그림을 보고 정규직화 논의가 함께 이뤄지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어떻게 노동자들을 정규직화시킬지 고민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계획과 투자를 통해 노동자들이 산업구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용정책과 관련해 우리나라와 비슷한 산업구조를 가진 핀란드의 사례를 소개해본다. 핀란드 하면 복지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해 우리나라와 별로 공통점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세계적으로 한국과 핀란드는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나라고 인구대비 대기업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한다.
 

한때 핀란드서 노키아가 한국의 삼성 역할을 했던 것처럼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소수 대기업의 영향력이 큰 나라다. 지난 2008년 이후 노키아는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노키아는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에 6조7000억이라는 헐값에 팔렸다.

이후 핀란드의 고용시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대규모 정리해고가 있었고 실업자가 길거리로 쏟아졌다. 당시 핀란드를 바라보는 세계 경제학계는 대기업에 의존하는 국가경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경고했다.

대량 실업사태가 발생한 핀란드가 이를 극복하고 멋지게 재기에 성공한 과정이 흥미롭다. 핀란드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의 복지국가로 성장했을까.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은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의 이익이 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보도내용은 세계적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핀란드의 노동자들이 노키아가 망한 후 갈 곳이 없어지자 스스로 창업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벤처기업들이 바로 ‘앵그리버드’로 유명한 '로비오', ‘클리시오브클랜’이라는 게임을 만들어낸 '슈퍼셀' 같은 기업이다. 노키아를 대신해 수백 개의 벤처기업들이 국가경제를 지탱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핀란드정부의 복지정책 때문이다. 핀란드 정부는 노키아가 망한 후 기본적으로 실업자들에게 충분한 실업수당을 지원해 노동자들의 생계를 보장해줬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국가가 개입해 중소기업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을 주도한 곳은 국가혁신기금과 의회서 만든 미래위원회 두 곳이다.

이 두 단체는 20년 단위의 장기적인 안목으로 계획을 세우고 지속적인 투자를 했다. 기업이나 노동자들은 실패를 해도 일정 수준의 생계가 보장되는 사회 안전망 속에서 든든하게 버텼다. 

결국 핀란드는 강력한 복지를 기반으로 대기업에 의존했던 경제구조를 수백개의 유능하고 창의적인 중소기업으로 대체해냈다.

머나먼 정규직

정부가 이야기하는 경제모델인 사람중심경제, 소득주도성장 같은 말의 의미도 복지를 기반으로 하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계약을 앞둔 노동자들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탄원을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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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