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북한이 노리는 신동혁 미스터리 추적

“유엔·국정원 탈북자에 놀아났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북한은 2014년 10월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을 시작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유명 탈북자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동영상을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공개해왔다. 북 정권이 공개한 영상 중 가장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북한인권운동가 신동혁씨다. 지난 9년간 증언활동을 통해 인권운동계의 스타로 떠오른 신씨에 대해 북한은 “정치범수용소 출신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영상 공개 직후 신씨는 의혹과 논란 속에서 활동을 중단했으나 최근 활동을 재개했다. 신씨를 둘러싼 진실을 추적했다. 
 

신씨는 개천수용소(이하 14호) 완전통제구역에서 나고 자라 탈북한 유일의 생존자라고 주장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증언활동을 펼쳤다. 그는 유엔(UN)과 미 백악관 및 국무부에도 들어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북한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수용소 출신 아닌가
아버지 경험 진술? 

그러나 북한이 공개한 ‘거짓과 진실 신동혁은 누구인가’ 속에 등장한 그의 아버지는 “우리는 정치범수용소에 없었다”고 주장하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직후 신씨는 영상 속 남성이 자신의 아버지가 맞다고 시인했다. 얼마 후 그는 14호 관리소(완전통제구역으로 이뤄진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났지만 6세 때 18호 관리소(형사범수용소)로 이감됐다고 증언을 번복했다.

논란과 의혹 속에서 신씨는 지난해 5월 이탈리아 의회에서 증언했다. 9월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던 유엔 주재 북한인권토론회에 방문하려 했으나 가지 않았다. 신씨가 가지 않은 것은 유엔 측의 만류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설립과 북한인권결의안 유엔총회 채택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신씨에게 보인 태도로선 확연히 달라진 것이었다.

10월엔 해리티지재단이 운영하는 뉴스사이트 데일리 시그널(The Daily Signal)에 북한의 인권상황과 탈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일부 공개하기도 했다. 해리티지재단은 미국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보수주의 싱크탱크로 유명하다. 지난 13일엔 캐나다 헬리팩스시에서 열린 테드엑스(TEDx) 강연회에 초청받아 연설했다.


이렇듯 신씨가 수많은 논란과 증언 번복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재개한 가운데, 그가 “14호는 물론이고 18호 수용소 출신도 아니다”라는 국정원 측의 진술이 나온 것을 <일요시사>가 단독으로 확인했다.     

지난 2008년께 국정원 소속 직원이 모 북한인권운동가에게 “신씨는 수용소 출신이 아니다. 북한에 가면 동창이 많이 있다. 본명은 신인근”이라고 귀띔했다.

신씨가 직접 밝힌 본명과 국정원 직원이 알려준 이름이 같았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여긴 이 활동가는 “지금이라도 신동혁 파일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국정원 직원은 응하지 않았다. 해당 활동가는 신씨를 만나 그러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사실이 아니다”라고 차분히 대답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신씨를 믿었다. 이 활동가는 신씨의 증언 번복 이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3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취재 결과, 국정원 직원이 언급한 ‘동창’은 한모(36)씨로 신씨와 봉창인민학교를 함께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한씨는 현재 경상도의 한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다.
 

통일부 발간 문서에 의하면, 신씨가 졸업한 봉창인민학교는 북창관리소(1995년 폐쇄, 이하 18호)가 존재하던 시절엔 봉창리의 관리성원구역(수용소 관리자 거주 구역)에 있는 4년제 초급학교였다. 기본적으론 보위원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지만, 사면자들도 다닐 수 있다.

또 다른 동문 최모씨(35)의 존재도 확인됐다. 최씨는 신씨의 중학교 1년 후배로, 졸업 후 대동강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했다. 최씨는 2012년 합신센터 조사 때 신씨의 책 <세상 밖으로 나오다>(2007)속 저자 사진을 보고 “수용소 출신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최씨는 북창군 출신 탈북자 모임에서도 “책 내용은 다 거짓”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2월 한 외신기자가 최씨에게 연락했으나 최씨는 “이용 당하는 것이 싫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탈북 후 해외서 북한인권운동가로 활동
완전통제 개천수용소 유일 생존자 주장


신씨가 나고 자란 북창군 지역은 과거에 18호 관리소가 있었던 지역이다. 18호는 인민보안부(남한의 경찰에 해당하는 치안조직)가 관리했던 수용소로, 보위부가 관리하는 여타의 정치범수용소와 성격이 다르다. 18호는 형사범이 ‘추방령’에 의해 사회와 격리돼 거주하는 곳이었다. 공민권도 유지할 수 있고 형식상으론 노동당 입당도 규제하지 않는다.

통일부 발간 문서와 탈북자 복수 증언에 의하면, 18호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부 형사범과 월남자 가족을 ‘당의 배려’라고 선전하면서 사면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미 낙인이 찍힌 이들로 출신지로 돌아가기가 어려워 18호 내의 사면자 구역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1982년부터 사면이 시작돼 단계적으로 85년, 88년, 90년에 대규모 사면이 일어났다. 1995년 폐쇄 때까지 전체 5만명 중 4만명을 사면했다. 18호 폐쇄 후 정식명칭은 ‘득장탄광연합기업소’가 됐다.

신씨를 잘 안다는 북한이탈주민 A씨는 “18호는 1982년부터 점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밖에도 자유롭게 다니고, 초소도 없어지기 시작했고, 군대도 철수하고, 새벽 5시 인원점검도 없어졌다”고 진술했다. 이어 그는 “95년까지가 끝이다. 그 후엔 관리소가 아니다”라며 “내가 나올 땐 여기서 있었던 일을 나가서 말하지 말라고 손도장, 발도장까지 찍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떼죽음하면서 관리소가 붕괴됐다”고 덧붙였다. A씨와 신씨는 2006년 신씨가 남한에 입국해 다음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알고 지냈다.

북에 동문들 존재
남한에도 동창 있어

A씨는 또 “동혁이 때는 수용소가 아니다”라며 “동혁이는 14호가 아니라 평북 운산군 광산에서 살다온 애다. 북한이 주장했듯이 11년 무료교육을 다 받았다. 봉창학교와 득장학교 (사면자구역인 득장로동자구에 있는 6년제 중학교) 나왔다는 것이 다 맞다”고 밝혔다.

또 다른 북한이탈주민 B씨는 “동혁이 엄마와 잘 알고 지냈다. 당시엔 아들이 둘 있다는 것만 알았다”고 말했다. 북한이 주장한 것처럼 수안갱과 부흥광산에서 일한 것이 맞냐는 질문에 “맞다. 학교를 졸업하면 집 주변 탄광에 배치를 한다. 동혁이가 수안에 사니까 수안갱에 배치한 것”이라고 답했다.

B씨는 1970년대 부모와 함께 18호에 수감된 후 어린 시절부터 탄광에서 일했다. 사면 받은 후 지난 2000년대 초 북한을 탈출했다.

그렇다면 신씨는 어떻게 수용소 실상에 대해 알고 9년 동안이나 국제무대에서 증언을 했던 것일까. 그는 탈북민은 물론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에게도 거의 의심 받지 않았다.

북한이 공개한 <신동혁 자료>에 의하면, 신씨는 1980년 평남도 북창군 석산리에서 출생했다. 탈북자 박옥순씨의 수기 <악으로 버틴 10년 북창수용소>에 의하면 18호의 별칭이 ‘석산리’라고 한다. 이로 볼 때 신씨가 수용소 내에서 수감자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신씨의 아버지가 1970년대 말에 가족과 함께 18호에 수감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통일부 발간문서에 의하면, 1985년에 ‘마당해제’라고 불리는 대규모 사면이 있었다. 북한정권이 공개한 신씨의 6세 사진으로 볼 때, 신씨 일가도 이때 사면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 아버지와 삼촌 및 동네 어른들로부터 북창군이 수용소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던 탄광 노동자 출신이기도 하다.

실제로 김희태 북한인권선교회장은 “탈북자들이 6살 때 찍은 사진 속 옷이 김일성 생일 때 주는 것이라고 한다. 옷 선물은 사면 됐으니까 받은 것”이라며 “1985년 이전에 사면자로 산 것”이라고 봤다.

과거 행적 의문투성이…거짓 증언 의혹
“국정원은 알고 있었다” 침묵으로 일관


신씨가 여타의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을 제치고 국제적인 명사가 된 것은 ‘완전통제구역 유일의 생존자’라는 희소성 때문이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뉜다. 전자는 정신개조가 됐다고 판단되면 출소가 가능하지만 후자는 닫힌 구역으로 불리며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올 수 없는 수용소다.
 

신씨를 제외한 수용소 생존자들은 모두 혁명화 구역이나 추방지구 출신이다. 신씨의 ‘몸값’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씨에게 연설 요청이 쇄도했고 각종 인권상을 수상했다. 그의 반생이 영화화됐고, 캐나다의 한 대학에선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강연을 들은 독지가들이 북한인권운동에 써달라며 큰 돈을 기부했다.

부시 전 대통령, 케리 국무장관, 커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장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과도 교류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 저술가 블레인 하든과 함께 쓴 수기 <14호 수용소 탈출>(2012)은 27개국에서 출판됐고 인세도 반씩 나눠가졌다. 신씨는 자연스럽게 유엔 북한인권조사위(COI)의 핵심 증언자가 됐다.

신씨의 거짓 증언은 신씨 한 사람만의 책임은 아니다. 국정원은 신씨의 신상에 대해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허술한 탈북자 관리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인권위 측은 사태가 불거지자 “신씨는 수많은 증언자 중 하나일 뿐”이라며 사안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신씨와 수기를 함께 쓴 블레인 하든은 북한이 영상을 공개한 직후 서울로 와서 지난해 3월까지 여러 달 동안 북창군 및 수용소 출신들을 만나 인터뷰 했음에도 언론에 책을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출판사 측과의 마찰 및 소송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유엔 북한인권위와 하든은 그를 엄격히 검증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사실 북한인권과 관련한 ‘거짓 증언’ 논란은 이전에도 다수 있었다. 한 여성은 14호에서 쇳물을 부어 기독교도를 죽인다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강제송환을 4번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은 조선족으로 밝혀졌다.


허벅지에 깊은 흉터가 있는 한 여성은 그것이 불고문의 흔적이라고 주장했으나 골수염 수술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자극적인 증언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주목을 받으면 그것이 유명세와 후원으로 이어진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북한인권운동이 ‘비즈니스’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거짓 증언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실제 수용소 생존자의 진실된 증언이 피해를 볼 여지가 크다.

인권결의안 통과
중요 역할했는데…

신씨는 “수용소에서 당한 고문의 상처가 내 몸에 있다”며 “북한인권운동을 아무 사심없이 진심으로 해왔다. 내가 숨기고 싶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내 자유라고 착각했었다. 날 안다는 사람들을 난 모르겠다.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퍼뜨리는 것”이라고 입장을 전했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신동혁 탈북 스토리

지난 2007년, 신씨는 자신이 14호 관리소에서 표창결혼을 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엄마와 먹을 것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

가끔 만나는 아버지가 먹을 것을 숨겨놨다가 줬고 13세 때 모친과 형의 탈출 모의를 신고했다가 두 사람은 공개처형 당하고 자신은 14호 지하감옥에서 6개월간 불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평양서 온 정치범 박영철을 만나 그에게 바깥 세상에 대한 얘기를 듣고 음식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14호를 탈출했다고 주장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월엔 8년 만에 증언을 번복했다. 자신이 6살 때 어머니, 형과 함께 14호에서 강 맞은편 18호로 옮겨졌다고 수정했다. 어머니와 형의 탈출계획을 밀고했고 둘의 사형집행을 목격한 것도 18호에서였다고 번복했다.

1999년과 2001년에 탈출을 시도했었다고 새롭게 증언하기도 했다. 2001년엔 중국까지 갔지만 넉 달 만에 붙잡혀 북송됐고 처음엔 18호로 갔지만 곧 더 가혹한 곳인 14호로 갔다고 주장했다. 고문을 당한 것도 13세 때가 아니라 두 번째 탈북 실패 후 14호에서였다고 번복했다. 그가 증언을 번복한 것도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지인들이 “신씨가 수기내용과 다른 얘기를 한다”고 블레인 하든에게 전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떠들썩한 논란 뒤에도 신씨는 지난해 2월 중순 페이스북을 통해 “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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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