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발 '페이퍼컴퍼니 괴담' 추적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12.02 13: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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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의원님…사정기관 타깃 정해졌다?

[일요시사=사회팀] 효성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이른바 '페이퍼컴퍼니 괴담'이 눈길을 끈다. 박근혜정부 들어 타깃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모두 페이퍼컴퍼니를 직·간접적으로 운용했기 때문. 이 같은 배경으로 사정기관의 다음 타깃 역시 페이퍼컴퍼니를 개설한 사회고위층이 될 것이란 소문이 고개를 들고 있다.




페이퍼컴퍼니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정·재계를 아우르는 유명 인사들은 케이맨 군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세피난처는 실제 발생한 법인 소득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대해 조세를 부과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을 뜻한다. 

사회고위층
비자금 통로

조세피난처는 기업 입장에서 세제상의 혜택뿐 아니라 외국환거래법 등의 규제가 적고 경영상 장애요인이 거의 없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더구나 조세피난처에선 모든 금융거래의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역외 탈세 및 돈세탁용 자금 거래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조세피난처에 세워진 페이퍼컴퍼니는 흔히 비자금 통로로 의심받는다. 기업들은 경영상 소요되는 제반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특수목적법인(페이퍼컴퍼니)을 설립한다고 하지만 조세정의 측면에서 페이퍼컴퍼니는 말 그대로 '눈먼 돈'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5월 <뉴스타파>의 특종 보도 이후 유명 인사들의 페이퍼컴퍼니 소유 여부는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뉴스타파>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 취재한 결과물을 공개하면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들은 모두 245명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90년대 중반부터 재벌 중심으로 '유령회사' 성행
거래시 차명 기본…조세피난처서 제3국으로 은닉

보도에 따르면 페이퍼컴퍼니 설립 시 한국 주소를 기재한 사람은 159명,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해외 주소를 기재한 사람은 86명이었다. 그리고 해외 주소를 기재한 사람 중 일부는 경과세국인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에 현지 법인을 설립한 뒤 법인 소득을 다시 해외 계좌로 빼돌리는 수법을 사용, 세금을 탈루했다. 이는 한국에서 빠져나간 돈이 경과세국을 거쳐 조세피난처로 옮겨졌다가 다시 제3국을 경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해외 주소를 갖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주목되는 무리가 있다. 이른바 '검은머리 외국인'들로 불리는 외국인 기관투자자들은 법률상 한국인이 아니면서 한국으로부터 많은 돈을 쓸어 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투자 목적으로 개설한 페이퍼컴퍼니는 관계 당국이 파악한 총량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스위스를 본거지로 했던 검은머리 외국인들은 한국과 스위스가 금융정보 교환 협정을 맺게 되자 조세피난처에 특수목적법인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국인 신분으로 국내 주식 시장에 투자하지만 외국 법인 명의를 빌리기 때문에 신원을 감출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검은머리 외국인의 존재는 외국에 등록된 일부 기관투자사의 대주주가 국내 고액 자산가일 가능성과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대주주가 자신의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페이퍼컴퍼니 설립 과정에서 검은머리 외국인의 명의를 빌린 것이다.

꼭꼭 숨겨진
눈먼 돈의 행방

우리나라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면서 가명이나 무기명을 이용한 금융 투자를 1993년부터 금지해왔다. 때문에 국내 지하자본은 일찍부터 각종 금융규제에서 자유로운 해외를 주목했다. IMF를 전후로 한 시점에 국내 자본의 상당수는 해외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고위층의 재산도 국외로 유출됐다. 특히 지난 2007년 있었던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려 사회고위층의 재산 은닉 시도는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산 은닉을 위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대표적인 인물로 불리고 있다. 앞서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인 블루아도니스를 설립하면서 비자금 은닉 의혹을 샀다. 그러나 재국씨는 지난 10월 말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해당 의혹을 부인했다.

재국씨가 직접 밝힌 사건 개요는 이렇다. 재국씨는 미국 유학생활 중 부친인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가게 되면서 급히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미국에 남겨둔 미화 70만 달러를 해외로 옮기는 게 좋다는 주변 권유에 따라 아랍은행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아랍은행 관계자는 법인하고만 거래한다면서 재국씨의 예금 예치를 거절했다. 그러자 재국씨는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하고 계좌를 개설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게 됐다는 해명이다.

여기서 재국씨 해명의 진실성과는 별개로 전 전 대통령은 미납 추징금 전액을 납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러나 전두환 수사의 불씨는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붙었다. 미납 추징금 규모 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사기대출·횡령 등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17조9253억원의 추징금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전체 추징금 중 887억원만을 납부해 눈총을 사고 있다. 또 김 전 회장은 해외로 빼돌린 수백억원의 재산으로 호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파문은 가라앉지 않는 상황이다.

김 전 회장은 그간 조세 당국의 추적을 피해 국외 페이퍼컴퍼니를 운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7월 복수 언론은 <뉴스타파>의 보도를 인용해 "김 전 회장의 비자금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방콕은행으로 송금됐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관련 내용을 종합한 전체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김 전 회장의 아들 선용씨는 옥포공영이라는 유한회사를 통해 베트남 하노이 중심부에 위치한 반트리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선용씨의 골프장 개발 사업권 획득 과정에서 노블에셋과 노블베트남이란 페이퍼컴퍼니가 등장한다. 일각에선 이 두 법인의 실소유주를 선용씨로 보고 있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대행업체인 PTN의 내부문서 등에 따르면 방콕은행 뉴욕지점은 노블에셋의 지시를 받아 2003년 9월부터 2006년 5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미화 670만달러를 노블베트남에 송금했다.

하지만 노블에셋의 관리 대행업체였던 PTN 직원들은 노블에셋이 방콕은행에 계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 방콕은행으로 송금된 670만달러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2004년 말 기준 노블에셋은 단 2달러를 소유한 유령회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2002년 있었던 한국자산관리공사와 김 전 회장의 민사소송 기록이 심상치 않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대우 미주법인을 통해 홍콩에 있는 페이퍼컴퍼니인 KMC에 수천만 달러를 송금했다. 이어 KMC는 이중 2500만달러를 방콕은행에 개설된 데레조프스키 명의 계좌에 입금했는데 데레조프스키는 선용씨의 가명인 것으로 보도됐다.

즉 대우에서 빠져 나온 거액의 돈은 페이퍼컴퍼니로 흡수됐고, 조세피난처를 거쳐 마지막엔 골프장 인수에 사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소문만 무성
의뭉스러운
 거래

하지만 선용씨는 지난 10월 모든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재국씨와 함께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한 그는 노블에셋에 대해 "태국 부동산개발업자가 싱가포르에 세운 특수목적법인"이라며 "이 회사가 지난 2007∼2008년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자 요청에 따라 지분을 인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지분 인수 대금은 옥포공영 비상장 주식을 매각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마련한 것"이라며 남은 의혹을 일축했다. 즉 선용씨의 부친인 김 전 회장과는 아무 관련 없는 돈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김우중 일가의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의뭉스러운 거래는 여전히 의혹의 대상이다. 선용씨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한 투자회사는 베트남 하노이에 건설 중인 대형 주상복합 건물 사업권을 매각하면서 이득을 남겼는데 해당 거래 과정에서 코랄리스 S.A.란 페이퍼컴퍼니가 고개를 들었다. 코랄리스 S.A.는 유럽의 대표적인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룩셈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다.

하지만 선용씨 측은 "정상적인 투자 과정을 거쳤고, 조세 당국에도 세금을 완납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 한 관계자는 "페이퍼컴퍼니가 반드시 불법으로 사용되는 건 아니다"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 예가 있다. 지난 10월31일 민주당 이상직 의원은 "현대글로비스와 대한항공이 마셜아일랜드와 파나마, 케이맨 군도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파장은 미미했다.

 같은 날 이 의원은 현대글로비스와 대한항공의 역외 탈세 가능성을 언급했다. 또 이 의원은 국세청의 조사를 촉구하며 "현대글로비스와 대한항공이 각각 선박과 항공기를 페이퍼컴퍼니에서 리스해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경영 과정에서 복수의 금융기관(대주단)이 자신들의 금융 담보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페이퍼컴퍼니에 대한 권리는 모두 대주단이 갖고 있어 대한항공은 권리를 행사할 수 없고, 조세 회피 목적이 없다"고 못박았다.

이 같은 대한항공의 해명이 진실인지 여부는 중립기관을 통해 확인되지 않았다. 외부로 알려진 대로라면 지금껏 국세청은 대한항공을 상대로 대응을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눈여겨볼 인물이 있다. 대한항공 부회장을 역임한 조중건 고문의 부인 이영학씨다.


앞서 이씨는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확인됐고 탈세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예고했던 국세청은 아직까지 잠잠하다. 원인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첫째, 탈세 혐의를 최종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길어지고 있을 확률이다. 지난 9월 국세청은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405명의 명단을 확보, 39명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일정상 빠르면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에 조사 결과가 발표될 수 있다. 그러나 조사 대상자에 이씨가 포함돼 있는지는 미지수다.

때문에 이씨에 대한 조사가 처음부터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된다. 일각에선 "털어도 더 나올 게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는 페이퍼컴퍼니의 설립 여부보다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자금이 어디로 도착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에 무게를 싣는다. 따라서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검찰의 역할은 자금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한다.

지난달 28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윤대진 부장검사)는 효성그룹 총수 일가의 수천억원대 탈세 고발 사건과 관련해 조현준 효성그룹 사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했다. 바로 전날 조석래 회장의 핵심 측근인 이상운 그룹 부회장을 소환조사한 데 이은 광폭 행보였다.

해외에 꼬불친 '검은돈' 뿌리
전두환·김우중 비자금도 흘러가

현재 검찰은 효성그룹이 IMF 사태 때 해외사업에서 손실을 입자 총수 일가가 1조원대 분식회계를 지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1996년 홍콩에 임원 명의로 된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1000억원대 비자금이 조성된 경위를 집중 추궁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조 회장 등은 싱가포르 법인 명의로 외국계 은행에서 200억원을 대출받은 뒤 자사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 행세를 하며 국내 주식을 매매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임직원 및 법인 등 250여개 명의로 된 차명 계좌 수백개를 운용하면서 불법 비자금을 조성·관리한 의혹을 받고 있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특수2부는 해당 사건을 연내에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총수 일가의 탈세 및 비자금 조성 정황을 어느 정도 확인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검찰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비자금이 정계 로비 용도로 사용됐는지도 초미의 관심이다. 앞서 검찰은 지난 2008∼2009년 있었던 효성그룹 수사 당시 비자금 규모와 사용처, 오너 일가의 개입 여부 등을 입증하지 못했다. 다만 조 사장 개인은 지난해 9월 회사돈으로 미국 고급 주택을 구입한 사실이 확인돼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바 있다.

자금 종착지는
해외 부동산?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이 나왔을 때부터 눈길을 끌었던 해외 부동산 불법 매입 여부도 관심이다. 추적 불가능한 대규모 건설 사업(혹은 건물)에 법인이 만든 검은 돈이 쏠렸을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건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대기업 A사가 해외에서 조성한 비자금을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관리하고 있다는 설과 MB정권 실세인 B씨가 한 건설사 지분을 검은머리 외국인 명의로 차명 보유하고 있다는 설 등은 지난 국정감사를 앞두고 여의도 안팎에 나돌았다.

얼마 전에는 대기업 C사의 오너가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역외 탈세, 주가 조작 등 혐의로 내사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C사의 경우는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검은 돈의 종착지를 두고 루머가 춤을 추는 상황인 것이다.

페이퍼컴퍼니를 겨냥한 역외 탈세 수사는 지하경제 양성화란 박근혜정부 공약에 부합한다. 현 정부 들어 타깃이 된 전 전 대통령과 조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모두가 페이퍼컴퍼니를 직·간접적으로 운용했다는 점은 꽤 놀랍다. 이른바 페이퍼컴퍼니 괴담은 정보를 다루는 입장에서 매혹적인 소스가 틀림없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앞서 밝혔듯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만으로 법적 처벌을 가할 수 없다. 또 일부 기업들은 벌써 역외 탈세 세무조사에 대비한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갈수록 대담해지고 교묘해지는 사회고위층의 검은 돈 숨기기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지 않는 한 뿌리 뽑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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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서울의 한 지역구에서 특정 당의 당원 명부가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총선, 지방선거 등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당 관계자의 업무용 노트북에 담겨있던 정보가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올림픽 육상 100m 경기를 생각해 보자. 8개 레인에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선다. 이 선수들은 국내 선발전에서 1등을 차지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해 예선을 치르고 결승에서 금메달을 다툰다. 0.01초 차이로 메달 색깔이 달라지는 경기에서 승자는 늘 단 1명뿐이다. 치열한 공천 경쟁 선거는 올림픽보다도 더 확고한 ‘승자 독식’ 구조다. 올림픽에선 2등에게 은메달, 3등에게 동메달이라도 주지만 선거에서 2등은 꼴찌와 같다. 당선자는 후보자에서 국회의원, 시·군·구의원, 구청장·군수, 시·도지사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이뤄진다.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자리로 순식간에 올라가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은 당선 가능성이 큰 자리로 몰린다. 어떤 경기든 일단 출발선에 서야 경쟁을 할 수 있듯, 선거에서 공천은 본선으로 가기 위한 1차 관문이 된다. 자리는 하나, 후보는 여럿이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최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불거진 공천 헌금 의혹은 자리를 돈으로 사려 했다는 내용으로, 관련자는 구속됐다. 최근 서울 구로구에서 일어난 당원 명부 유출 의혹도 공천 경쟁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의 업무용 노트북에서 수십개의 엑셀 파일이 발견됐는데 그중 일부가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였고 이름, 연락처, 거주지 등이 포함된 이 파일이 상대 당의 후보 경선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2020년 21대 총선 당시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거물급 인사가 후보로 맞붙었다. 구로을 지역은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다. 17대(2004년)부터 지난 22대(2024년) 총선까지 20여년간 민주당이 이겼다. 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이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18대 총선에서도 구로을 지역은 넉넉하게 수성한 바 있다. 업무용 노트북에서 발견 이름·연락처·거주지 담겨 구로에서만 평생 살았다는 한 시민은 “선거 때마다 텃밭, 험지 이런 말을 많이 쓰지 않나. 구로는 국민의힘 입장에서 ‘사지’다. 민주당이 아주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총선 등에서 민주당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몇몇 인사들은 바닥부터 훑어가며 선거를 준비한다. 민주당은 21대 총선 때 구로을 지역 후보로 윤건영 의원을 전략공천 형태로 낙점했다. 윤 의원은 당시 문재인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불린다. 국민의힘은 서울 양천을 지역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김용태 전 의원을 ‘자객’ 공천했다. 민주당의 독식으로 관심 지역에서 벗어나 있던 구로을이 순식간에 ‘격전지’로 떠올랐다. 문제는 구로을 지역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예비후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 조규영 전 서울시의원의 반발이 거셌다. 조 전 시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 비례대표로 정치권에 입성, 이후 구로2선거구에서 서울시의원으로 재선했다. 조 전 시의원은 최소한 경선은 치를 수 있게 해달라며 민주당의 전략 공천을 비판했다. 당시 조 전 시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존 지역 당원 수보다 더 많은 권리당원을 모았다. 열심히 뛰었다. 누구와 경쟁하든 경선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며 “그러나 결과는 낙하산 공천이었다. 저는 특혜나 찬스를 원하지 않았다. 공정한 경선만을 바랐다. 낙하산 공천은 공정하지도 않고 본선 경쟁력도 없다”고 강조했다. 어디에 사용했나 조 전 시의원은 노숙 단식까지 해가며 경선을 촉구했지만 결국 낙천했다. 이후 다른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잊히는 듯했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업무용 노트북에서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표기된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발견된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국민의힘 당원들의 이름과 연락처, 행정동 등이 기재된 엑셀 파일은 ‘(보안철저)저쪽디비’ 폴더에 담겨있었다. 해당 파일의 ‘구분’ 부분에 ‘조규영 일반 당원’이라고 표기돼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맞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에 민주당 구로을 국회의원 예비후보였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기재돼있다는 점에서 의심이 촉발됐다. 동시에 누가 노트북에 해당 파일을 옮겼는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문서가 발견된 노트북은 2020년 총선 과정에서 당원협의회에 업무용으로 지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구로구의회에 입성한 A 구의원이 해당 노트북을 사용했다. A 구의원은 2022년 국민의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여성부장을 맡은 이력도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문제의 노트북은 A 구의원이 여성부장으로 활동할 무렵 사용했다가 후임자에게 넘겼다. 그는 “이후 여성부장이 바뀔 때까지 쭉 A 구의원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쉬쉬하다 이제서야 눈여겨볼 대목은 A 구의원의 이력이다. 그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비례대표 순번을 받아 당선됐지만, 2020년 총선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조 전 시의원을 보좌하는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실제 조 전 시의원이 예비후보로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곳곳에서 A 구의원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A 구의원은 조 전 시의원 낙천 이후 김용태 전 의원 배우자의 수행비서로 발탁됐다. 김 전 의원의 측근이 A 구의원을 추천한 것으로 안다”며 “2020년 총선에서 김 전 의원이 낙선하고 당협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A 구의원이 비례대표로 공천받았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측 정치인을 수행했던 인사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한 데 이어, 그가 직접 사용한 노트북에서 자신이 보좌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파일명이 기재된 국민의힘 당원 명부가 발견된 셈이다. A 구의원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를 민주당 측에 유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대목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A 구의원이 조 전 시의원을 수행할 당시 지역구 경선을 대비해 당원 명부를 입수한 게 아닌가 싶다”며 “당시 경선까지 진행되지 않았기에 당원 명부가 실제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아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사실 이 문제는 올해 1월경에 처음 드러났다. A 구의원이 당원협의회에 노트북을 반납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폴더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쉬쉬’하다가 최근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당협 회의에서 논의 A 구의원 “문제없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A 구의원의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지난 1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에서 논의됐다. 해당 의혹이 구로 지역에서 확산하자 A 구의원이 먼저 이 문제를 먼저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당원협의회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에 따르면 대부분 위원은 ‘덮고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문제가 불거지면 지방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부 관계자가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 “해당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조사를 요청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관철되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한 위원은 “선거를 치르다 보면 당원 명단이 일부 흘러 다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명부가 통째로 유출되는 건 심각한 일”이라며 “명백한 해당 행위다. 자체 조사를 통해 징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 규정 제20조(징계사유)에 따르면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를 했을 때 ▲현행 법령 및 당헌·당규·윤리 규칙을 위반해 당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그 행위의 결과로 민심을 이탈케 했을 때 등의 사유로 징계할 수 있다고 돼있다. 해당 관계자는 A 구의원의 행위가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해당 행위? 징계 가능성? A 구의원은 해당 의혹은 전부 해명됐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당협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는데 문제없다고 결론 났다.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일고의 논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당 의혹을 언급한 제보자에게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등으로 조치할 수 있다는 점을 전해 달라”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