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적 의료비’ 역대 최대, 왜?

퍼주고 퍼주다 탈모까지 지원?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재난적 의료비 지원금이 올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재난 수준’으로 재정 지출이 치솟은 셈이다. 표면적으로는 지원 범위가 확대된 영향으로 보이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말이 나오는 중이다.

재난적 의료비 제도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의료비 지출로 가계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 도입됐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도 감당되지 않는 고액 의료비 문제가 반복되면서, 정부가 직접 의료비 일부를 지원하는 방식의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재난적 의료비 제도가 논의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고액 의료비 부담 문제가 있었다. 당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이 단계적으로 추진돼왔지만, 실제 진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비급여 항목과 고액 치료비는 여전히 가계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암이나 희귀질환처럼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질환은 물론,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시술·검사 비용이 수백만 원 단위로 누적되면서 가계가 단기간에 경제적 위기에 처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심지어 의료비 부담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장기 입원비로 인해 가족 전체의 생계가 흔들리는 경우까지 생기면서 “건강보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며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당시 한국의 의료비 구조는 국제 기준으로도 높은 수준이었다. 2017년 기준 경상의료비 중 가계가 직접 부담하는 비율은 33.7%로, OECD 평균(20.5%)보다 크게 높았다. 가계가 의료비를 직접 지출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은 질병이 발생할 경우 중산층 이하 가구는 곧바로 생활 기반이 흔들릴 위험이 크다는 의미였다.

이유는 2010년대에 들어 비급여·고액약제 사용이 늘면서 의료비 지출은 더욱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국민의료비 연평균 증가율이 상승함과 동시에 민간 실손보험 가입이 급증하는 현상도 함께 나타났다.

실손보험 의존도가 높아진 것은 건강보험 보장성만으로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방증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결국 의료비와 가계 부담 사이의 격차가 커지면서 고액 치료비로 경제적 파탄에 이르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지적됐고, 의료비로 인해 사회적 취약계층이 양산되는 현상도 문제로 떠올랐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정부는 의료비 부담 완화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공공적 안전망 도입 필요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특히 암 등 중증질환 환자들이 비급여 비용과 고액 입원비로 인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는 사례가 여러 차례 보고되면서, 제도 도입에 힘이 실렸다.

건강보험으로도 한계가 있는 영역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직접 의료비 부담을 보조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 재난적 의료비 지원 사업이다. 논의는 먼저 시범사업 형태로 나타났다. 2013년 보건복지부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 제도를 제한적으로 운영하며 고액 의료비로 어려움을 겪는 가구를 선별 지원했다.

당시는 암과 같은 중증질환을 중심으로 제한적 지원이 이뤄졌지만, 시범사업이 실제로 의료비 부담 경감에 기여한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제도화를 위한 논의가 본격화됐다.

병원은 지원금 신청 적극 홍보
경증 지원이 중증 지원 넘어서


이후 2017년 정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 이른바 ‘문재인 케어’에서도 의료비 부담으로 인한 가계 위기 문제를 줄이기 위한 방안이 주요 과제로 제시됐고, 재난적 의료비 지원을 제도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이 함께 언급됐다.

결국 이 같은 논의를 토대로 2018년 ‘재난적의료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시행되면서 재난적 의료비 지원이 국가 제도로 공식화됐다. 법률 시행을 계기로 지원 근거가 명확히 규정되고, 지원 대상·소득 재산 기준·심사 절차 등이 체계적으로 마련되며 지금의 사업 구조가 형성됐다.

사업의 기본 골자는 단순하다. 가구 소득과 비교해 의료비 부담이 지나치게 클 경우 정부가 의료비 일부를 대신 부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는 도입 초기부터 실질적인 이용률이 낮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2018년 본격 시행 당시 소득과 재산 기준은 상대적으로 엄격했고, 지원 대상 질환도 암·심장질환·뇌혈관질환·희귀질환 등 중증 중심으로 제한됐다.

입원 진료는 질환 구분 없이 신청이 가능했지만 심사 기준이 높아 실제 지원 문턱이 상당히 높다는 평가가 많았다. 더불어 기준중위소득 100% 이하 가구 등 저소득층만을 중심으로 지원하다 보니 대상 폭이 좁았다.

문제는 신청률 자체도 매우 낮았다는 점이다. ‘재난적 의료비’라는 제도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환자가 많았고, 병원에서의 안내도 충분하지 않았다.  “홍보가 부족해 실수요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서류 제출 절차 역시 까다로워 환자가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자료가 많았고, 의료기관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을 경우 신청까지 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준 완화
지원 폭증

이 같은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정부는 기준을 단계적으로 완화하는 보완책을 마련했다. 2021년을 전후해 재산 과세표준 기준이 약 5억원대로 설정됐고,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의 지원 비율이 80% 안팎까지 높아졌다. 연간 지원 한도 역시 상향 조정되면서 제도의 안정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편이 진행됐다.

아울러 신청 절차 간소화, 개별 심사 확대 등도 논의되기 시작하며, 초기 엄격한 요건 때문에 제도에서 배제되던 환자군에 대한 접근성 보완이 이뤄졌다.

본격적인 변화는 2023년 개편에서 나타났다. 이 시기부터 의료비 부담률과 재산 기준이 크게 완화돼 지원 문턱이 크게 낮아졌다. 소득 기준은 기준중위소득 100% 이하를 기본으로 유지하면서도, 연소득 대비 의료비 부담률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기준중위소득 200% 수준까지도 개별 심사로 지원이 가능하도록 범위를 확대했다.

재산 기준도 과세표준 7억원 이하로 완화됐고, 의료비 부담률 요건은 기존의 ‘연소득 대비 15% 초과’에서 ‘10% 초과’로 낮아졌다. 입원 진료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모든 질환에 대해 신청할 수 있었지만, 완화된 심사 기준이 적용되면서 실제 승인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외래 진료도 중증 중심 구조는 유지됐지만, 개별 심사 적용 폭이 넓어지면서 경증·만성질환이라도 의료비 부담이 커지면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재난적 의료비 신청은 제도 개선 이후 빠르게 증가했다. 2023년 재난적 의료비 신청 건수는 3만3585건이며, 지난해에는 전체 지원 건수가 5만735건 규모로 대폭 상승했다. 건당 평균 지원금도 상승했다. 2023년 평균 지원 금액은 약 301만원이었고, 2024년에는 약 312만원으로 소폭 증가했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 자료에 따르면, 연도별 지원액은 ▲2020년 340억원 ▲2021년 446억원 ▲2022년 601억원으로 완만한 증가를 보였지만, 2023년에는 1010억원으로 처음 1000억원대를 넘어섰다. 2024년에는 지원액이 1582억원으로 집계돼 불과 1년 만에 약 56% 증가했다.

사업 집행액 기준으로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예산 부족
지급 지연

2025년에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액이 2000억원대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있다. 실제로 지난 8월 말까지 집행된 금액만 이미 1368억원에 달해 역대 최대치 경신이 확실시 되고 있다.


신청자가 폭증하면서 예산이 조기 고갈돼 지난 10월에 일시적으로 지급이 중단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일부에서는 “예산이 없어 지급 대기” 통보를 받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건보공단은 매년 하반기에 신청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예측한다. 이미 지난 7∼8월 보건복지부에 예산 부족 가능성을 알리고 추가 재원 확보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9월부터 추가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재난적 의료비 지원액이 2023년과 2024년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신청자가 많아졌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제도 기준 완화로 인해 신청 문턱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 지원액 폭증의 직접적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중증질환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난적 의료비가, 최근에는 오히려 경증·만성질환 환자를 중심으로 급격히 확대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건보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 8월까지 재난적 의료비가 지원된 환자 중 중증이 아닌 질환자가 차지한 비중은 52.5%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중증질환 지원액(47.5%)을 이미 넘어섰다. 전체 지원 건수로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17만6000여건의 지원 중 11만2000여건(63.6%)이 중증 이외 질환이었다.

재난적 의료비가 초기에는 암·희귀질환·심장질환 등 고액 중증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됐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경증 환자가 전체 지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특히 재난적 의료비가 실제로 지급된 상위 질환을 보면 척추병증, 추간판 장애, 무릎 관절증 등 근골격계 질환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지난해 지원액 기준 상위 10개 질환 중 6개가 척추·관절계 질환이었다.

추간판 장애만 65억원, 무릎 관절증은 64억원이 지급되는 등 중증질환보다 경증·만성질환이 더 많은 재정 지출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탈모, 성병 감염, 치아 임플란트 등 비교적 경미한 치료에도 재난적 의료비가 지급된 사례도 확인됐다. 제도 취지와는 달리 경증 환자 지원이 급격히 늘어난 셈이다.

올해 2000억원 돌파 전망
신청만 하면? 승인율 93%

경증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가장 직접적 요인은 병원의 홍보다. 정형외과·신경외과·재활의학과 등 외래 중심 병·의원을 중심으로 ‘재난적 의료비 지원 안내’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한 병원은 홈페이지에 “재난적 의료비로 의료비 지원 가능”이라는 문구를 넣어 치료비 부담이 큰 환자에게 제도를 안내하고 있다.

그동안 재난적 의료비는 환자가 스스로 제도를 알고 신청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병원이 먼저 지원금 신청을 유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병원 입장에서는 정부 지원 안내가 환자 유입에 도움이 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난적 의료비를 신청한 의료기관에서는 전체 의료비 규모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 자료를 보면 재난적 의료비 신청 기관의 의료비는 비신청 기관 대비 평균 61% 더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경증 환자 증가의 또 다른 핵심 요인은 인구구조의 변화다. 고령층 비중이 확대되면서 재난적 의료비 부담률 기준을 충족하기 쉬운 구조가 만들어졌다. 은퇴 이후 소득이 크게 줄어드는 고령층은 동일한 의료비가 발생하더라도 소득 대비 의료비 비율이 빠르게 높아진다.

실제 중증 외 질환 지원액의 84.1%가 60세 이상에게 돌아갔다. 척추·관절·근골격계 질환은 고령층에서 발병률이 높고 비급여 항목 비중도 크기 때문에, 반복 치료와 검사만으로도 부담률 기준을 쉽게 넘게 되는 것이다. 고령층의 인구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원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예정돼있었던 셈이다.

심사 기준도 문제로 지적됐다.

건보공단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재난적 의료비 신청 건수는 5만4734건으로, 이 가운데 5만735건이 승인돼 승인율이 92.7%에 달했다. “사실상 신청하면 거의 다 통과된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높다. 이는 신청자의 상당수가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심사 과정이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원액 폭증에는 의료비 자체의 상승도 영향을 미쳤다. 척추·관절 질환 중심의 비급여 진료비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상승해 왔다. MRI·주사치료·도수치료 같은 비급여 항목의 단가가 높아지면서, 경증이라도 반복 치료가 쌓일 경우 본인부담 의료비가 빠르게 커진다.

이는 부담률 기준 충족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한번 지원되는 금액 자체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만든다. 중증환자 중심이던 시기보다 경증·만성 환자가 대거 유입된 현재의 구조에서 비급여 상승은 재정 부담을 더욱 크게 만드는 요소다.

아무나
퍼주기

이 같은 흐름은 제도가 취지와는 다르게 운영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유발한다. 재난적 의료비는 도입 당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고액 치료비 때문에 경제적 위기에 놓인 중증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보완 장치였다. 하지만 경증·만성질환 환자가 제도에 대거 유입되면서 고액 중증 중심으로 설계된 재정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이 사실상 아무나 퍼주는 제도가 됐다”며 “현재 지원금 신청 폭증으로 지급이 지연되는 상황인데 나중에는 정작 필요한 사람이 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질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imsharp@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죽도 밥도 아닌 트럼프 따라하기

죽도 밥도 아닌 트럼프 따라하기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을 밑바탕 삼아 용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장 대표에게 영감을 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화당 장악·대권 도전 과정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30년 넘게 이어진 미국의 문제점과 유권자의 불만을 꿰뚫었다. 장 대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빙글빙글 정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지도부는 지난 6일 광주를 방문해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려고 했다. 그러자 광주전남촛불행동 등 광주 시민단체 회원들과 일부 시민들은 장 대표 일행의 참배를 막았다. 결국 장 대표 일행은 추념탑 앞에서 5초 동안 묵념한 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같은 콘셉트 다른 행보 장 대표의 참배 시도엔 ▲국민 통합 ▲호남 구애 및 지역 현안 해결 ▲강경 보수 이미지 희석 등 이유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장 대표의 이후 행보는 참배를 시도했던 이유에 대한 의문을 자아낼 가능성이 있다. 광주북부경찰서는 장 대표 등의 참배를 막은 시민들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재물손괴 등 혐의를 적용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국민의힘 광주시당은 지난 18일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일 집회는 신고되지 않은 불법 시위였고, 각종 욕설과 모욕으로 일관된 폭언·폭력이 난무한 아수라장이었다”며 “시민을 가장한 과격 단체와 특정 인사들이 국민의힘 당 대표의 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지난 12일 내란 특검에 체포됐다가 이틀 후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돼 석방된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두둔했다. 황 전 총리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원식 국회의장을 체포하라. 대통령 조치를 정면으로 방해하는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체포하라”는 내용의 비상계엄 동조 게시글을 올리는 등 행동으로 말미암은 내란 선전·선동 혐의를 받고 있다. 장 대표는 국회에서 대장동 항소 포기 규탄대회를 진행하던 중 황 전 총리 체포에 대해 “전쟁이다. 우리가 황교안이다. 뭉쳐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선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황 전 총리가 활발하게 부정선거론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비판이 이어지자, 장 대표는 지난 13일 의원총회에서 부정선거론에 선을 그으면서 “전략적으로 한 발언”이라고 해명했다. 장 대표·황 전 총리의 행적을 되새겨보면,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구호는 미국 정치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크게 화제가 됐던 대사 “나는 민주당원이다”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웨스트윙>에선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매튜 산토스가 상대 후보 에릭 베이커의 약점을 감싸는 연설을 한다. 에릭 베이커는 부인의 만성 우울증을 숨겼다. 이 때문에 논란이 발생하자, 매튜 산토스는 “어차피 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는데, 아닌 척 위선을 할 뿐”이라며 “지도자에게 완벽하다는 환상을 요구하면, 이는 단지 거짓을 종용하는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어 “완벽한 후보·특혜를 줄 후보가 아니라 이상·희망·꿈을 공유하는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며 “그렇게 하면 우린 자랑스럽게 ‘나는 민주당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광주 방문 시도 이어“우리가 황교안이다” 트럼프 당선엔 30년 밑밥…어설픈 표절? “나는 민주당원이다”는 상대의 약점을 감싸면서 정치의 본질을 호소하는 이상적인 정치인의 상징으로 통한다. 하지만 황 전 총리는 윤 전 대통령의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를 두둔하면서 폭력적인 정적 숙청을 요구했다. “우리가 황교안이다”는 “나는 민주당원이다”와 극단적으로 대비될 수밖에 없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9월 채널A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장동혁 대표에 대해선 충청도에서 몇 안 되는 용꿈을 꾸는 분이란 평이 있었다”며 “그 용꿈을 망상에 가깝다고 보기엔 유연하게 정치를 한 분”이라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대표 취임 후 김도읍 정책위의장 임명 등 중도 보수 성향 유권자를 의식한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장외 집회 집착 ▲황 전 총리 두둔 ▲한 전 대표 퇴출 시도 등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좋아할 만한 행보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그는 빙글빙글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광주 5·18 민주묘지 참배와 황 전 총리 두둔이란 극단적인 행보를 불과 며칠 사이에 보인 것도 장 대표 특유의 빙글빙글 정치를 상징한다. 강경 보수에 더욱 치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 대표의 행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과정과 비교할 만하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과정엔 미국 민주당에 모여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리버럴 엘리트들에 대한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반발이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의힘 박민영 대변인은 지난 12일 유튜버 감동란의 개인 방송에 출연해 같은 당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의원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친한(친 한동훈)계로 알려진 김 의원은 윤 전 대통령 탄핵 표결 당시 찬성표를 던졌고, 특검법 3개에도 모두 찬성했다. 박 대변인은 “김 의원은 눈 불편한 것 빼고는 기득권인데, 장애인이라서 배려받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장애인에게 너무 많은 할당을 하는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 전 대표가 김 의원을 일종의 에스코트용 액세서리 취급을 했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지난 17일 박 대변인을 경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박 대변인에게 엄중하게 경고할 뿐, 징계는 하지 않았다. 박 대변인의 발언과 장 대표의 미지근한 대응은 김 의원에게 강한 반감을 갖는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를 의식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각장애인이자 여성이란 김 의원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박 대변인의 공격은 미국에서 만성 구조화된 정치적 올바름 논쟁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권 쟁취는, 진보 진영이 신자유주의·정치적 올바름을 추진하면서 민주당이 월스트리트와 강하게 연계하자 국민이 여기에 반감을 갖게 된 것으로부터 비롯됐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딕 체니 전 부통령·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부 장관으로 상징되는 네오콘에 대한 반감도 큰 역할을 했다. 드라마 대사 표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재임 당시 강하게 추진된 신자유주의로 인해 산업 패러다임은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바뀌었다. 월스트리트의 힘이 더욱 막강해졌고, 미국 내 제조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로 이전하는 흐름이 가속화됐다. 지난 2008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미국 내 중산층 몰락에 쐐기를 박았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막대한 세금을 대외 전쟁에 쏟아부었던 네오콘도 유권자의 큰 반감을 사서 몰락했다.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미국 보수의 전통적인 흐름과 달리, 네오콘은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어 미국의 가치를 퍼트리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는다”는 것 때문에 네오콘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몰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엔 미국 특유의 고보수주의가 함축됐다. 미국의 역사는 이주·개척의 역사다. 지금과 같은 세계 경찰의 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확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엔 지역 강국 정도의 위상을 가졌고, 현재의 미국 영토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주로 얻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서부 개척 시대를 다룬 영화가 흔하게 제작된다. 미국인이 광적으로 열광하는 시리즈 <스타트렉>과 <스타워즈>도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은유해 제작됐다. 건국 신화가 따로 없는 미국에선 이 양대 시리즈가 신화로 통한다. 미국 고보수주의의 핵심은 다른 나라의 전쟁·정치 개입에 반대하는 외교 정책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인위적으로 고립시켜 대륙 내 미국의 기득권을 지키자는 것이다. 미국의 국력이 지금과 같지 않았던 19세기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전 대통령은 1823년 “유럽은 아메리카에 새 식민지를 만들지 말고, 미국은 유럽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어 ‘명백한 운명’이란 구호하에 서부 개척에 몰두했다. 트럼프 대통령·JD 밴스 부통령은 지난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왜 감사하단 말을 하지 않느냐”고 몰아붙였다. 미국이 지난 2022년 2월 이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지원 규모는 약 820억달러(약 113조4880억원)이고, 전비는 670억달러(약 98조4591억원) 규모로 확인된다. 미국 상원은 지난해 4월 608억달러(약 89조3480억원) 규모의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첨단 무기 등 대규모 군사 지원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지지자들을 달랠 거대한 쇼가 필요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상징 중 하나는 제1기 행정부 당시 멕시코 국경에 설치한 거대한 장벽이다. 미국 내 블루칼라들이 갖는 불만 중 하나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잠식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미국·멕시코 접경지역에선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이를 실질적 효과와 정치적 이벤트를 모두 거둘 수 있는 일거양득 상황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망의 정치화 트럼프 대통령의 고보수주의 성향은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우리에게 방위비 분담금 100억달러(약 14조6942억원)를 요구했다. 내년에 우리가 부담해야 할 방위비 분담금은 1조5192억원이다. 지난 14일 공개된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엔 주한미군에 대한 330억달러(약 48조4948억원) 규모의 종합적 지원 내용이 담겨있다. 또 우리는 오는 2030년까지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에 250억달러(약 36조7385억원)를 지출해야 한다. 일본도 지난 5월부터 미국으로부터 주일미군 분담금 인상 압박에 시달려 매년 증액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부터 캐나다·그린란드·파나마 등 아메리카 대륙과 그 인근 지역으로 사실상 영토를 확장하려 하고 있다. 미국인에겐 영국·멕시코 등과 전쟁하면서 중·남부로 영토를 확장했던 19세기의 재림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보수주의 성향은 각국에 안기는 관세 폭탄에서도 잘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그린란드 주민이 투표를 통해 미국 편입·독립을 결정한 상황에서 덴마크가 이를 방해하면 덴마크에 고액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세를 군사·외교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단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에 대해 “포퓰리즘”이란 지적이 이어지는 이유는 관세 폭탄에서 잘 드러난다. 공화당은 지난 6일 진행된 뉴욕시장·버지니아 주지사·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 참패했다. 선거의 핵심 쟁점은 생활비 부담이었다. 뉴욕시에선 주거비가 급등했고, 뉴저지주에선 전기요금이 연 20% 상승했다. 특히 버지니아주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연방정부 인력 감축 방침과 셧다운 여파로 공무원들이 급여를 받지 못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커피·바나나·쇠고기·견과류 등 생활필수품에 대한 상호 관세를 면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방침 이후 생활필수품 물가가 급상승한 여파로 선거에서 패배하자 뒤늦게 상호 관세를 면제한 것이다. 특히 쇠고기는 미국 축산농가의 반발을 무시하면서 관세를 면제했다. 장 대표는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겉’만 빌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990년대 이후 미국 정치권이 주도한 변화의 여파로 서민의 삶이 악화한 흐름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이들의 바람을 선동적 언어로 표현해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불만 조직화한 트럼프 지지율↓ 원인 장동혁 30년 넘게 진행된 신자유주의·개입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강경 보수가 대규모 조직화한 영향도 트럼프 대통령의 대권 도전에 날개를 달아줬다. 하지만 국내에선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전한길씨 등이 주도하는 강경 보수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매우 크다. 이들의 언행은 강경 보수의 틀을 벗어나면, 조롱 대상이 될 뿐이다. 아울러 미국에선 민주당이 신자유주의 질서를 주도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미국 특유의 고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반면 국민의힘은 시장경제·기업 경영의 자유 등 신자유주의 질서를 지지하는 의견을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신자유주의 성향의 경제 정책을 유지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양당의 의견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양당은 특히 젊은 남성들이 민감하게 여기면서 비판하는 각종 검열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셧다운제 도입 ▲확률형 아이템 규제 ▲게임물관리위원회 검열 논란 등 검열 논란은 정당을 불문하고 꾸준히 일어났다. 미국에선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올바름 논쟁이 영화계로 이어져 <백설공주>와 <인어공주> 등 영화에 유색인종 주인공이 발탁돼 큰 논란으로 확산했다. 이런 논란을 주도하면서 서민을 훈계한 대표 세력은 월스트리트·각계 엘리트·언론이었다. 이 논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권 도전 과정에 큰 영향을 줬다. 국민의힘은 각종 검열 논란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과 별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처럼 젊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을 유인하기가 쉽지 않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세력 중엔 불법 이민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멕시코인을 경계하는 기존 유색인종 유권자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대선에서 ▲흑인 중 8% ▲히스패닉 중 28% ▲아시아계 중 27% 등 득표율을 보였다. 지난해 대선에선 ▲흑인 중 13% ▲히스패닉 중 46% ▲아시아계 중 40%가 그에게 투표했다. 반면 장 대표는 지난 6일, 광주에서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지 못했고 국민의힘은 장 대표를 비난하는 시위를 한 시민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장 대표는 국민의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더 찐윤(진짜 친윤)’에 의해 옹립된 재선 의원에 불과하다. 국민의힘은 장 대표 취임 이후에도 지지율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1일부터 13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4%였다. 이는 전주보다 2% 낮아진 수치며, 지지율 42%를 기록한 민주당보다 18% 낮다. 심지어 전통적인 표밭 대구·경북에서도 지지율 42%를 얻는 데 그쳤다. 표밭도 위험하다 어설픈 표절은 죽도 밥도 안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30여년 동안 누적된 미국의 문제점과 유권자의 불만을 꿰뚫은 후 유권자들이 향수를 느끼는 옛 로망을 자극해 대권을 거머쥐었다.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을 투표로 연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트럼프 벤치마킹’은 아닐까? 장 대표는 꾸준히 정체되고 있는 국민의힘의 지지율에서 뭘 보고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