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K팝 국가대표 박진영

한국 대중문화 전 세계로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K팝의 개척자였던 박진영이 이제 나랏일까지 맡게 됐다. 세계 곳곳에서 높아지는 K팝의 인기에 정부가 직접 노를 젓기 시작했고, 노를 저을 뱃사공으로는 박진영을 지목했다. 수많은 명곡과 아이돌을 만들어낸 경험으로 이제는 K팝 국가대표로서 한국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 무대에 나서게 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대통령 직속으로 신설되는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에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를 임명했다. 함께 위원장을 맡게 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나란히, 한국을 대표하는 인사로서 대중문화 정책을 이끌어가게 된 것이다.

미국 진출
선두주자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한국 대중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국가적 비전과 중장기 전략을 논의하는 정책 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통령실은 이 조직이 국제 문화 교류 확대와 공동 프로젝트 발굴 등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한류 콘텐츠가 외교·경제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이를 뒷받침할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고 위원회를 신설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브리핑에서 임명 배경을 직접 설명하며 “박진영은 가수이자 프로듀서로서 K팝 세계화를 이끌어온 주역”이라고 말했다.


그는 “K팝을 가장 먼저 미국 시장에 진출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 박진영의 경험이 정책 추진 과정에서도 의미 있게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전 세계인이 한국 대중문화를 더 많이 즐기고, 한국 역시 외국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인선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대중문화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 들어 음악과 드라마뿐만 아니라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대통령실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같은 한국산 콘텐츠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을 거론하며, 세계 각국에서 제기되는 “한국 정부는 어떤 지원을 하고 있느냐”는 의문에 이번 기구 신설과 인선이 화답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이에 발맞춰 지난 5일, ‘대중문화교류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 제정령안’을 입법 예고한 바 있다.

해당 제정령안은 음악·드라마·영화·게임을 대중문화 범주에 포함시키고, 위원회가 관련 정책 비전과 중장기 전략을 다루도록 규정했다. 즉, 이번 인선은 입법 준비와 동시에 이뤄진 결정으로 볼 수 있다. 문체부는 민관 협업 체계를 강조하며, 위원회가 대중문화 확산뿐 아니라 게임과 같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분야에도 지원이 가능하도록 정책 기반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위원회 구성에도 변화가 예고됐다. 위원장은 대통령 지명 인사와 문체부 장관이 공동으로 맡고, 부위원장은 문체부 차관과 민간 위원 중 1명이 선임될 예정이다. 위원 수는 최대 45명 이내로 꾸려져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실은 이런 구조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정책 설계와 집행의 현실성을 높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진영은 과거 이재명 정부 초대 문체부 장관 후보군으로 거론된 바 있다.


장관 후보로는 최종 낙점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대통령 직속 기구의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정책 현장에 직접 참여하게 됐다. 대통령실은 박진영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실무 경험이 위원회 운영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장 임명
현장 무대에서 국정으로…새로운 도전

박진영이 K팝을 널리 알릴 국가대표로 선정된 건 상당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1971년 12월13일 서울 성동구 중곡동에서 태어난 박진영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나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에서 2년여간 생활했다. 당시 그는 현지 흑인들과 어울리며 춤 실력을 키웠고, 마이클 잭슨과 스티비 원더 같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음악에 매료됐다.

귀국 후에도 박진영은 음악에 몰두했으며, 부모와의 약속 끝에 학업과 춤을 병행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고 연세대학교 지질학과에 입학했지만, 결국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에 가수로 진로를 결정했다.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1994년 솔로 데뷔였다. 정규 1집 <BLUE CITY>의 타이틀곡 ‘날 떠나지마’는 광고 삽입곡으로 먼저 알려지며 입소문을 탔다. 당시 무대에서 그는 비닐 바지를 입고 춤을 추는 파격적인 패션으로 시선을 끌었다.

남자 가수가 섹시 콘셉트를 내세운 것은 당시 가요계에서 신선한 시도였고, 화제성을 이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박진영의 무대 장악력은 대중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어 발표한 곡 ‘너의 뒤에서’ ‘청혼가’ 등은 연이어 인기를 얻으며 박진영을 1990년대 대표 솔로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다 1997년 발표한 ‘그녀는 예뻤다’가 히트를 치며 가요계 정상에 올랐다. 이후 4집과 5집에서도 ‘허니’ ‘Kiss Me’ 같은 히트곡을 내놓으며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97년, 박진영은 기획사 태영기획을 설립하며 프로듀서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2001년 회사명을 바꿨는데 그게 바로 현재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JYP엔터테인먼트의 시작이다. 박진영은 프로듀서로서 다수의 아티스트를 발굴 해 음악시장에 내놨다.

2000년대 초반, god는 국민 그룹으로 불릴 만큼 큰 성공을 거뒀고, 박지윤은 ‘성인식’으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또 다른 대표적인 성과는 가수 ‘비(정지훈)’이다. 박진영이 직접 트레이닝한 비는 2000년대 초반 국내외에서 아시아 스타로 성장했다.

2007년 데뷔한 걸그룹 원더걸스는 박진영 프로듀싱의 성공작으로 꼽힌다. ‘Tell Me’는 후크송과 UCC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전국적 신드롬을 일으켰고, 이어 한국 최초로 ‘So Hot’이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에 진입하면서 ‘Nobody’까지 연속 히트를 기록했다.

식지 않은
음악 열정


원더걸스는 K팝 걸그룹 붐의 시작점이 됐으며, 박진영은 아이돌 시장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같은 시기 2PM과 2AM이 차례로 데뷔했다. 특히 2PM은 남성적인 ‘짐승돌’ 콘셉트와 퍼포먼스로 주목받으며 정상급 보이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들 그룹의 연이은 성공은 JYP를 SM, YG와 함께 ‘3대 기획사’ 반열에 올려놓았다. 다만 미국 시장 진출 시도 과정에서 원더걸스가 국내 활동을 중단하게 되면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박진영은 프로듀서로서 활약하면서도 가수 활동을 놓지 않았다.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무대 활동을 멈추지 않는 점은 박진영의 독특한 특징이다. 가수가 세월이 흐른 뒤 프로듀서로 전환하는 경우는 많지만, 많은 나이에도 가수 활동을 지속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박진영은 춤추고 노래하는 기획사 수장으로, 가수와 프로듀서, 기업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2010년대에도 박진영은 ‘어머님이 누구니’ 같은 히트 싱글을 발표하며 아티스트로서 여전한 능력치를 보여줬다.

동시에 제작자로서는 걸그룹 TWICE와 ITZY를 성공적으로 데뷔시켰다. TWICE는 2015년 오디션 프로그램 <SIXTEEN>을 통해 결성됐고, 데뷔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박진영은 ‘SIGNAL’ ‘What is Love?’ 등 주요 곡에 직접 참여했으며, 일본 앨범까지 프로듀싱하며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이후 TWICE는 JYP의 간판 걸그룹으로 성장했다. 다음으로 데뷔한 ITZY 역시 ‘달라달라’로 성공적인 데뷔를 치르고 ‘ICY’ ‘마.피.아 In the morning’ 등 히트곡을 내며 4세대 걸그룹으로 주목받았다.


2020년대 들어서도 박진영은 꾸준히 본인 싱글을 발표했다. 선미와 협업한 ‘When We Disco’, 비와 함께한 ‘나로 바꾸자’, 개코가 피처링한 ‘Groove Back’, 2023년의 ‘Changed Man’ 등 지속적으로 앨범을 냈다. 지난해에는 데뷔 30주년을 맞아 콘서트와 방송 대기획에 참여했고, 2025년에는 ITZY 예지의 솔로 앨범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JYP엔터테인먼트를 국내 3대 기획사 중 하나로 만들어놓은 만큼 박진영은 회사 지분 15.67%를 보유한 대주주다. 현재는 사내 등기이사로서 제작과 운영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공식 직함은 CCO(최고창의책임자)이자 대표 프로듀서로, 아티스트 론칭과 주요 프로젝트의 최종 판단을 맡는다. 또 JYP퍼블리싱 공동대표이사로서 퍼블리싱 사업에도 관여하며, 회사의 글로벌 음악 비즈니스 확장에 직접 참여한다.

박진영은 가수 활동과 프로듀싱 능력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항상 좋은 평가만 받아왔던 것은 아니다. 박진영은 성공만큼이나 무수한 비판도 받아왔다. 프로듀서로서 거론됐던 비판은 자신이 키운 모든 아이돌 그룹을 ‘박진영화’시킨다는 점이다. 소속 가수들에게 본인의 창법과 음악적 색을 강하게 입힌다는 것이다.

2AM 조권은 “원하는 창법이 나올 때까지 10시간 넘게 녹음을 반복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보컬 훈련 과정에서 본인의 방식을 강요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박진영이 항상 강조하는 유명한 창법은 바로 ‘공기 반, 소리 반’이다.

인성은
‘JYP’

성악적 기준에서 보면 성대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현재까지도 고수하는 발성법이다.

홍보 부분에 있어서도 역량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JYP는 2010년대 초반까지 과도한 홍보로 비판받았다. 이후에는 오히려 소극적인 홍보로 선회했는데, 트와이스나 스트레이 키즈의 해외 성과조차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아 “회사가 스스로 성과를 깎아내린다”는 불만이 팬덤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진영은 이 같은 논란과 비판에도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박진영은 평소 바른 생활습관을 갖고 있는데,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기 관리에서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성으로, 특히 본인뿐만 아니라 연습생들에게 인성교육까지 시킬 정도로 진심이다.

연습생들에게 성실함과 긍정적 태도를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며 입이 닳도록 말했고, 기본 예절까지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여러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실력보다 인성이 우선’이라는 기준을 내세웠던 일화도 있다.

물론 이후 일부 멤버들의 과거 논란이 불거지며 ‘위선적’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타 소속사의 연예인들에 비하면 인성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는 멤버가 현저히 적다.

박진영은 자신의 소속사 멤버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점도 특별하다. 계약 종료 이후에도 멤버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실제로 원더걸스 멤버들의 결혼과 이적을 축하했고, 비와는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할 만큼 오랜 우정을 이어왔다.

god 멤버들과의 교류도 지속하고 있다. 다른 기획사들이 계약 해지 이후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심지어는 연습생들에게 JYP 구내식당의 모든 음식을 유기농으로 바꾸고 건강식으로 제공하기도 했으며, 퇴사한 연습생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타사 이적을 도울 정도였다. 대규모 연습생을 보유한 기획사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대형 소속사들은 돈에 관련한 논란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은 편인데, 박진영은 투명한 세금 납부로 유명하다. 타 소속사가 탈세 문제로 수십억원대 추징금 처분을 받은 것과 달리, JYP는 선납을 통해 오히려 환급을 받으면서 좋은 기업 이미지를 굳혔다.

“좋은 기회 얻도록 노력”
실효적 제도 지원 약속

국세청이 오히려 절세 방법을 알려줬다는 일화는 “세무 처리만큼은 깔끔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박진영이 좋은 이미지를 갖추는 데는 꾸준한 기부 활동을 이어왔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2022년 삼성서울병원과 월드비전에 각각 5억원씩, 2023년에는 국내 주요 병원 다섯 곳에 각 2억원씩을 기부했다.

지난해에도 지역 거점 병원 다섯 곳에 총 10억원을 추가로 기부했다. 누적 기부액은 수십억원에 이르며, 대부분 난치병 아동 치료비와 저소득층 지원에 사용됐다. 이렇게 사회를 위한 기여를 많이한 점도 대중문화교류위원장에 선정된 이유에 포함된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 역시 박진영의 합류에 대해 기대감을 내비쳤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가진 여러 장점 중 하나가 문화 역량”이라며 “이를 산업으로 발전시켜 국민들이 먹고 살 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진영은 그 측면에서 아주 뛰어난 기획가”라며,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문화의 산업화와 글로벌 진출에 주력할 것이고 박 위원장은 꽤 많은 성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진영이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리자마자 JYP엔터테인먼트의 주가도 상승했다.

지난 10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JYP엔터테인먼트 주가는 전 거래일보다 3% 이상 상승하며 7만7300원에 거래를 마쳤다. 하루 전 장외시장에서는 주가가 7% 넘게 치솟아 8만900원에 오르기도 했다. 장중 한때 8만1400원까지 거래되기도 했다.

박진영은 이번 임명 직후 자신의 SNS를 통해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정부 일을 맡는다는 게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로서는 여러 면에서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 K팝이 너무나도 특별한 기회를 맞이했고 이 기회를 꼭 살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또 “현장에서 일하면서 제도적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분들을 잘 정리해 실효적인 지원이 이뤄지도록 하겠다”며 “후배 아티스트들이 더 좋은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K팝이 한 단계 더 도약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것을 넘어 세계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3년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음반사에 홍보자료를 돌릴 때, 2009년 원더걸스가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핫100 차트에 진입했을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내 꿈은 같다. K팝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글의 말미에는 함께 공동위원장을 맡은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시작하는 일이니 조언과 응원을 부탁드린다”며 “이 일을 함께 맡아주신 최휘영 장관님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막중한 임무
세계화 다짐

이제 남은 과제는 위원회가 실제로 어떤 제도적 지원을 마련하고, K팝과 한국 대중문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박진영의 임명 소식에 네티즌들은 “K팝 국가대표로서 이만한 사람이 없다”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기대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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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캄보디아 ‘셀허브’ 추적

[단독]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캄보디아 ‘셀허브’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민낯이 드러났다. 주로 수도인 프놈펜 인근과 시아누크빌 범죄 단지가 그들의 주둔지였다. 국내 조직폭력배가 중국 갱단과 결탁해 만든 ‘셀허브’의 경우 피해자만 수십명이다. 이들은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가장했다. 사이트에는 유명인의 사진이 수차례 도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는 사라진 셀허브 엔터테인먼트의 홈페이지. 지난해 7월 <일요시사>가 취재한 이후 대표이사의 이름과 사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표창장을 받았다며 문서를 위조하기도 했다. 이 기업의 정체는 로맨스 스캠 조직이다. 확인된 피해액만 약 40억원, 피해자는 수십명이다. 한 언론사는 보도자료까지 작성하며 홍보하기도 했다. 조직적 준비 경찰 수사 중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24일, 셀허브 조직원 3명을 각각 구속·불구속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이들은 조건 만남 사이트를 운영한 로맨스 스캠 조직이다. 여성 관련 데이트 상품을 판매하거나 연애 빙자 사기를 일삼았다. 셀허브 조직원이던 A씨는 “연예인 지망생이나 모델과 연락하게 해 준다며 5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대포통장 계좌에 돈을 입금하게 한 뒤 텔래그램 아이디를 알려주고 연락하게 하는 시스템”이라며 “연결된 여자는 실제 남성이고 한국에서 조직폭력배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직은 지난해 3월 캄보디아 범죄 밀집 지역인 태자 단지에서 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사이트를 개설해 조직원들에게 민간인 협박, 중국어 통역 등의 역할을 맡기고 수십명으로부터 약 40억원을 뜯어냈다. 같은 해 7월 <일요시사> 취재가 시작되자 이 조직은 셀허브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의 이름을 ‘김현숙’에서 ‘박소희’로 변경하고 유명인의 사진을 수차례 도용했다. 유 전 장관에게 표창장까지 수여받았다며 피해자들의 의심을 피하려는 꼼수도 서슴지 않았다. A씨는 “조직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은 밤새 맞거나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하기도 했다. 조직폭력배 출신 한국 사람들이 간부고 일반 조직원은 교민 사이트를 통해 ‘한 달에 500만~10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일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서울경찰청이 수사하기 이전인 지난해 7월부터 강서·영등포·구로경찰서 등에 여러 고소장이 접수됐었다. 하지만 수사는 원활하지 않았다. 주요 혐의자가 해외에 거주 중이거나 피의자 특정이 어려운 게 난관이었다. 수사를 담당했던 한 경찰 관계자는 “캄보디아 프놈펜에 주요 혐의자들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지난해부터 공조를 요청했으나 캄보디아 당국이 비협조로 일관했다”며 “고소인분들이 ‘왜 안 잡냐’ ‘내 돈 어떻게 하냐’는 등 불만이 많으셨다. 매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캄보디아가 협조하지 않으면 조치가 불가능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3월부터 조직원 모집…태자 단지서 모의 ‘유인촌 표창장’ 걸어 놓고 ‘정상 기업’ 홍보 막막했던 수사는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이재명정부가 캄보디아를 압박했고 현지에 구금된 한국인 범죄자 겸 피해자 수십명을 국내로 송환했다. 송환된 인원 중 일부는 셀허브 사건과도 연관된 것으로 파악됐다. 정성학 충남경찰청 수사부장은 지난 20일 청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들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사기) 및 범죄단체 가입 및 활동 혐의로 전원 구속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부건(총책 가명, 40대 초반, 한국말을 쓰는 외국인 추정) 조직으로부터 확인된 피해 건수는 110건, 피해액은 93억여원에 달했다. 약 1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부건은 지난해 중순부터 올해 7월까지 주로 프놈펜 웬치(범죄 단지) 및 태국 방콕 등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범행을 벌여왔다. 부건 조직은 지난 2018년 중국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해 그동안 단속을 피하려 태국, 캄보디아 등지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범행을 계속해 왔다. 이들은 데이터베이스, 입출금 등을 지원·관리하는 CS팀과 광고를 보고 접근한 피해자를 기망하는 로맨스팀, 검찰 사칭 보이스피싱팀, 코인투자리딩 사기팀, 공무원 사칭 노쇼 사기팀 등 총 5개 팀으로 이뤄진 조직체계를 갖췄다. 이들은 가구판매업을 하러 캄보디아에 갔다고 진술했으나 이후 지역 선·후배 권유, 고액 아르바이트 인터넷 광고 등을 접하고 범죄에 연루된다는 걸 알면서도 조직에 가입해 활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속아서 조직에 들어갔다고 진술하지 않은 이들의 유입 경로는 ▲지인 포섭 29명 ▲인터넷 광고 등 포섭 8명 ▲현지 카지노 포섭 6명 ▲기타 2명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남성 42명과 여성 3명으로 연인도 있었다. 대부분은 20~30대 연령으로 최소 2개월부터 최대 16개월까지 범행에 가담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건 만남 사이트 경기북구경찰청 형사기동대도 전기통신금융사기특별법 위반 등 혐의로 피의자 15명 중 11명을 구속 송치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한 달간 캄보디아 범죄 단지에서 여성을 사칭, 조건 만남 등을 명목으로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가로챘다. 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성 만남 광고를 낸 후 이를 보고 연락해 온 피해자에게 여성인 척 채팅으로 유인했다. 여성을 소개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개발한 조건 만남 사이트에 회원 가입과 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속여 인증을 위한 돈을 요구했다. 3차례에 걸친 인증 절차 과정에서 여러 게임에 성공하면 가입비를 돌려준다고 속여 피해자로부터 1인당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을 받아 챙겼다. 피해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별도의 만남 인증과 후기글을 남기는 ‘화력방’도 운영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 규모는 피해자 36명, 피해금 16억원 상당이며, 1인당 최대 피해 금액은 2억1000만원이다. 이들은 대부분 20~30대 남녀다. 최초 범죄집단을 구성한 캄보디아 프놈펜 지역 명칭 ‘툴콕’을 의미하는 ‘TK’파로 스스로를 부르며 총책을 정점으로 한 지휘·통솔 체계를 갖췄다. 조직 운영을 총괄하는 총책, 이를 보좌하며 실무 전반과 인력 공급 등을 담당하는 총관리자, 각 파트 팀원의 근태를 관리하고 지시하는 팀장으로 구성됐다. 또 자체적인 조건 만남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개발자, SNS에 광고 글을 게시하는 홍보팀과 광고를 보고 접근한 피해자를 기망하는 로맨스 2개팀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상호 가명 사용 ▲근무 중 휴대전화 금지 ▲사진 촬영 금지 ▲야간에는 커튼으로 외부 차단 ▲다른 부서와의 업무 내용 공유 금지 등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기도 했다. 중국 국적 100명 뒷배 이들은 총책이 마련한 건물에서 2인1조로 합숙했는데 프놈펜 툴콕 지역의 13층 건물을 사용하다가 지난 8월, 현지 단속을 피해 센소크 지역 7층 건물로 이전해 범행을 이어오던 중 현지 수사 당국에 의해 검거됐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SNS 구직 광고나 조직원을 통해 범죄단체에 가입했다고 진술했으며 사기임을 알고도 범행을 지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의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구금된 중에도 총책이 이른바 관작업을 통해 자신들을 석방시켜 줄 것이라는 말만 믿고 대사관의 도움을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셀허브 사건 간부들은 타 사건에도 연루됐다. 지난 7일 캄보디아 바벳에 인접한 베트남 떠이닌 지역 국경 검문소 인근에서 30대 여성 B씨가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숨지기 직전까지 셀허브 간부와 같이 있었다. B씨의 사인은 마약 과다 투약이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B씨가 셀허브에서 한국인 명의의 대포통장을 공급해 왔다고 보고 있다. A씨는 “셀허브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던 B씨인데 통장을 팔려고 캄보디아에 도착한 한국인들을 유인해 범죄 단지로 팔아넘기고 유인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보·수사기관도 B씨에 의해 범죄 단지에 넘겨지는 피해를 입거나 유흥업소 일을 강요당한 사례를 확인하고 조사 중이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사실상 마약을 강제로 과다하게 투약당한 살인사건이라는 첩보는 아직 확인 중”이라며 “특정 조직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현지 경찰도 수사 중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대개 조직폭력배 출신…지휘는 중국 조직이 맡아 40억 피해액 환수 불가능 “자금 세탁 끝났다” 첫 데이트하던 연인을 치어 여교사를 숨지게 했던 이른바 ‘대전 머스탱 교통사고’의 피의자도 셀허브 조직원으로 확인됐다. 피의자 전모씨는 2019년 2월10일 오전 10시14분 대전 중구 대흥동에서 면허도 없이 외제차를 운전하던 중 인도를 걷던 조모씨와 박모씨를 들이받아 박씨를 숨지게 하고, 조씨에게 중상을 입혔다. 전씨가 대여한 외제차는 불법 대여 차량이었다. 이 차량은 애초 대구에 사는 C씨가 자신 명의로 캐피털에서 월 115만원씩 주는 조건으로 60개월간 대여한 것이다. C씨는 사촌 안모씨와 함께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나모씨가 올린 ‘외제차 저렴하게 빌려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보고 접근, 한 달에 136만원씩 받기로 하고 대여한 머스탱 차량을 재임대했다. 나씨는 이렇게 빌린 머스탱 차량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외제차를 빌려준다”고 광고하며 또다시 대여업을 했다. 전씨는 나씨가 올린 이 글을 보고 일주일에 90만원씩 주기로 약속하고 머스탱을 빌려 운전했다. 매년 확정되는 범죄수익 추징금은 30조원을 넘지만 환수 금액은 1%에도 미치지 않는다. 법무부가 캄보디아에서 보이스피싱과 로맨스 스캠 등의 범죄로 발생한 현지 범죄수익을 국내로 환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법무부는 “캄보디아 내에서 벌어진 범죄 가운데 현재 국내에서 수사 중이거나 재판 중인 사건이 1차 현지 수사 의뢰 대상”이라며 “이후 국내에서 유죄 선고를 받으면 최종적으로 환수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국제형사사법공조 조약에 따르면 해외에서 발생한 범죄라 하더라도 피해자가 국내에 있고 피해액이 특정될 경우, 우리 정부가 해외에 범죄수익 환수를 요청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 캄보디아와 국제형사사법공조 조약을 체결해 2021년 정식 발효됐다. 주요 간부들 타 사건 연루 정보기관 관계자는 “범죄자 개인이 아닌 조직을 대상으로 한 범죄수익 환수 사례는 거의 없다. 특히 국내에서 수사와 재판이 끝나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좋지만 이미 늦었다. 범죄조직 특성상 이미 코인이나 대포 통장으로 제3국에 은닉하거나 세탁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고 지적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도 “수사가 끝나고 유죄 판결이 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환수 절차는 이 모든 사법절차가 종료돼야 가능하다. 특히 조세회피처로 범죄수익을 옮겨놨다면 환수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