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관식이 신드롬’ 배우 박해준

국민 불륜남서 국민 아버지로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외치며 시청자들의 혈압을 치솟게 만들었던 배우 박해준이 이제는 ‘국민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얻으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역을 맡아 안방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든 그가, ‘관식이병’이라는 신드롬까지 낳으며 전 세대에 걸친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드라마 속 양관식은 무던하고 묵묵한 가장이다. 그의 삶은 오직 가족을 향한 헌신과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배우 박해준이 연기한 양관식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가장으로,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오애순을 평생 사랑한 열렬한 사랑꾼이다.

병든 노년 모습
실감나게 표현

10살 양관식은 조기 한 마리를 얻지 못한 채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던 오애순을 위해 물고기를 바치고, 장사를 대신하며 사랑꾼의 면모를 보여준다. 말년에도 그는 큰딸을 유학 보내기 위해 집을 팔고, 억척스레 밤낮없이 온몸이 다치도록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박해준은 드라마 속 헌신적인 가장 양관식을 연기하며 체중을 18kg 감량하고 병든 노년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실제로도 그는 “이건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라며, 이 역할에 대한 진심을 드러냈다.

그는 드라마 촬영 당시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수분을 절제했고, 극 중 병든 모습과 대사 톤을 조율하기 위해 사전에 연구를 반복했다. 실제로 그는 주요 장면을 앞두고 격투기 선수들이 체중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준비했다.


양관식이라는 캐릭터는 드라마 제작 초기 단계부터 ‘부드럽지만 강한’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설정됐다. 각본과 연출 단계서도 그의 대사는 절제되고 짧으며, 감정 표현은 시각적 요소로 전달되도록 구성됐다. 특히 말을 아끼는 장면에서는 배우의 숨결과 눈빛에 집중한 클로즈업 촬영이 반복적으로 사용됐으며, 이는 캐릭터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활용됐다.

또, 양관식이 착용한 의상과 소품도 캐릭터 성격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회색 숏패딩, 낡은 셔츠, 일터서 사용하던 작업 장갑 등은 양관식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도구였다.

스타일리스트 팀은 “실제 90년대 중반 지방 근로자의 옷장서 가져온 듯한 설정을 위해 일부 의상을 리폼하거나 의도적으로 낡은 느낌을 주는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박해준은 캐릭터 해석에 있어 실제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참고했다. 그는 “저희 아버지도 과묵한 편이셨고, 가족을 위해 일하시면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다”며 양관식 캐릭터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개인적인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드라마 촬영 도중 부친이 암 투병 중이었음을 밝히며, 양관식이 병을 앓는 장면을 촬영할 당시 본인의 감정이 겹쳐져 더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는 철저히 준비된 연기를 위해 반복적인 대사 연습과 감정 조절을 병행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 캐릭터는 단순한 픽션이 아닌 현실 재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상적인 가장이면서도 갈등과 마찰을 피하지 않는 인물이다. 자녀들과 다투기도 하고, 일상의 피로감도 드러내지만, 어떤 상황서도 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한다.

이 같은 연기는 실제 박해준과 양관식이라는 캐릭터의 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박해준의 실제 성격은 가정적인 성향이 강했다. 본인의 아내에게서 “양관식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작품 관계자들 역시 그의 성품이 관식이라는 캐릭터와 부합한다고 입을 모았다.


드라마를 집필한 임상춘 작가는 “양관식은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혹은 있었던 아버지들의 복합적인 집합체”라며 “현실서 벗어난 이상형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라고 밝혔다. 연출을 맡은 김원석 감독은 “양관식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았고, 박해준이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관식 배역을 캐스팅할 때 “내가 아는 배우 중 가장 착한 사람을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묵묵한 가장’ 연기
전 세대가 눈물바다

넷플릭스 측은 양관식 캐릭터에 대한 전 세계 시청자 반응을 분석한 결과,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권, 중남미 일부 국가서도 ‘아버지’ 키워드와 함께 박해준의 이름이 급상승 검색어로 등장했다고 밝혔다. 특히 중년 이상 나이대 남성 시청자층에서 높은 공감을 얻은 사례로 분석됐으며, 이는 기존 드라마 소비층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관식이병’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양관식 캐릭터는 드라마가 공개된 이후 각종 포털과 SNS서 회자됐고, ‘관식이병’ ‘회색 숏패딩’ 등 관련 키워드가 유행했다. 시청자들은 양관식 캐릭터를 통해 자신들의 아버지를 회상했고, 댓글과 커뮤니티를 통해 “우리 아버지도 저랬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회색 숏패딩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사람들, 관식이를 닮고 싶다는 아버지들, 양관식이라는 인물에 자신의 부모를 투영하며 울컥했다는 시청자들까지. 단순한 인기 캐릭터를 넘어, 양관식은 ‘이상적인 아버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박해준은 이 캐릭터를 두고 ‘희생’이라는 단어를 경계했다.

그는 “관식은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산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향을 정했고, 그걸 따라 살아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삶을 희생이라고 부르기엔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했을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박해준 본인의 삶과 연기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박해준은 1976년 부산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자랐다. 학창 시절 내내 과묵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편이었으며, 외향적인 활동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선호하는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연기를 처음 접한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로, 당시 연극 관련 진로를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연기와의 인연은 뜻밖에 찾아왔다. 이모가 “외모가 받쳐준다”며 연극영화과 진학을 권했고, 그는 별다른 준비도 없이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연극원에 덜컥 합격했다.

입학 이후 그는 서울 생활의 낯섦과 예술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 실기 위주의 수업 방식 등에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철저히 준비된 학생들 사이서 비교적 짧은 준비기간으로 입학한 그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수업 결석이 잦아지면서 학사 경고 누적에 따라 자퇴를 권유받았다.

당시 교수에게 “자퇴할래, 아니면 우리가 퇴학시켜 줄까?”라는 말을 들으며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후 자퇴 절차를 밟고 군 복무를 마쳤다.

기나긴
무명시절

제대 후, 박해준은 연기가 다시 하고 싶어 2000년 한예종에 재입학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본격적인 연극 무대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소극장서 조연, 단역을 맡으며 실전 연기를 익혔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무대는 모든 연기의 뿌리’라는 인식을 각인시켰다.


직접 극단서 무대 세트를 조립하고, 조명과 음향 리허설을 병행하며 작업한 시간은 배우로서의 기초 체력을 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동료 배우들의 평가는 대체로 “조용하지만 몰입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기 시간에도 대사를 반복하거나 캐릭터의 동선을 그려보며 시간을 보내는 스타일로, 즉흥적인 감정보다는 장면마다 감정의 흐름을 미리 계산해두는 방식에 가까웠다.

스스로도 “감정은 절제된 상태서 더 크게 전달된다”는 말을 자주 인용하며, 표정보다는 리듬과 공기의 밀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철학은 소위 ‘보여주는 연기’보다는 ‘살아보는 연기’에 가깝다. 박해준은 캐릭터가 왜 이런 언어를 쓰는지, 왜 이런 방식으로 침묵하는지를 먼저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보다, 감정을 억제하며 전달하는 장면서 오히려 더 강한 몰입을 이끌어내는 배우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많은 연출자들이 그에 대해 “극적 장면보다 일상의 호흡을 잘 살리는 배우”라고 말한 바 있다.

현장서의 평판은 한결같다. “요구 사항이 적고 신뢰도가 높으며, 조용하지만 존재감이 크다”는 것. 이는 그가 사전에 준비해오는 과정이 매우 철저하고, 장면마다 자신의 감정과 상대 배우의 움직임까지 고려한 계산된 연기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대사를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의 표정, 카메라 앵글, 조명의 방향에 따라 감정의 높낮이를 세밀하게 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연극서 방송과 영화로 무대를 옮긴 이후에도 이 같은 접근 방식은 그대로 유지됐다. 장면마다 인물의 감정 곡선을 설계하고, 상황마다 말투나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은 연기자의 연륜이 배어 있는 결과였다. 감정을 선으로 표현하기보다 면으로 표현한다는 평가처럼, 박해준의 연기는 단순한 기교가 아닌 누적의 결과에 가까웠다.

박해준은 개인적인 생활 면에서도 자기 절제가 강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연예계 활동이 늘어나면서도 예능 출연을 자제했고, 공식 석상서도 감정적인 표현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SNS 활동도 드물었고 인터뷰서도 작품 중심의 이야기 외에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언급을 아끼지만, 방송을 통해 드러난 모습에서는 자녀와의 관계, 배우자로서의 자세 등이 모두 성실함과 배려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연기 철학과
이미지 변신

2000년대 초반, 재학 중 만난 아내 오유진과는 연극을 함께하며 인연을 맺었고, 2011년 결혼 후 지금까지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자녀 양육에도 적극적인 편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이 없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한 인터뷰서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라고 표현한 바 있다.

무명 시절, 그는 수입이 많지 않은 상황서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보다는 연기 연습과 작품 준비에 집중했다. 당시 생계는 아내와 함께 한 달 생활비 100만원 정도로 유지했고, 주거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마련한 전셋집이었다. 이로 인해 스스로 ‘의존감’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힌 적도 있다.

박해준은 이를 ‘채무감’으로 인식했고, 이후에는 부모에게 금전적 보답보다 자신이 배우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드리는 것을 더 중요한 ‘효도’라고 여겼다. 현재는 작품 활동을 통해 안정된 수입과 인지도를 갖게 됐고, 자녀 교육과 부모 봉양 모두 병행 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박해준은 지금도 연기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생활을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스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하나의 인물을 완성도 있게 표현해내는 데 만족감을 느끼는 배우다. 이 같은 태도는 지금까지의 연기 커리어를 통해 일관되게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연기 철학으로 평가된다.

박해준의 연기 커리어는 연극 무대서 시작됐지만,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린 건 영화 <화차>였다. 변영주 감독의 연출 아래 그는 악랄한 사채업자 역을 맡아, 짧은 출연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당시 여주인공이었던 김민희의 뺨을 실제로 때리는 장면은 단 한 번의 테이크로 끝냈을 만큼 몰입감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박해준은 “NG를 내지 않고 한번에 끝내야 된다는 압박감에 세게 쳤다”면서 “김민희가 그 장면을 촬영할 당시 입안에서 피가 났다고 했다”고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스나이퍼 범수역을 맡으며 범죄 집단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날카로운 눈빛과 절제된 대사, 압도적인 분위기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점차 충무로서 연기파 배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철저히 준비된 연기
반복적인 대사 연습

2014년 tvN 드라마 <미생>은 박해준에게 전환점이 된 작품이었다.

박해준이 맡은 천관웅 과장역은 ‘이너서클’에 끼지 못하고 혼자 분투하는 외로운 회사원의 현실을 그려냈다. ‘회식 자리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 ‘상사의 눈치를 보는 사람’ ‘가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 등 그가 연기한 천 과장은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샀다.

이후 드라마 <나의 아저씨>서 스님 겸덕으로 등장해 극 중 오나라가 연기한 정희와의 복잡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비구니가 아닌 남자 스님으로서, 연인과의 인연을 끊고 속세를 떠난 인물. 겸덕은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 캐릭터였으며, 박해준은 이 인물을 통해 ‘단순히 착하거나 악한 사람이 아닌 복잡한 사람’도 연기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다 박해준은 운명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2020년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서 온 국민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 됐다. 김희애가 연기한 지선우의 남편 이태오를 연기한 그는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인물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이후 <부부의 세계>는 엄청난 인기를 끌며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대사를 밈으로도 남겼고, 그는 한동안 ‘국민 불륜남’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박해준은 이 작품을 맡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지나친 악역이라 출연을 고사하려 했지만, <화차>의 변영주 감독이 “김희애와 함께하는 드라마는 무조건 하라”고 권유한 덕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노태건역을 맡아 다시 한번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전두광(황정민)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는 역할로, 역사적 반감을 일으키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박해준은 그 복잡한 심리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이후 <폭싹 속았수다>에서 그는 양관식이라는 캐릭터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양관식은, 박해준의 필모그래피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로 남았다. 배우 스스로도 이 작품에 대해 “내가 한 건 없다. 주변이 나를 좋게 만들어준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시청자들은 누구보다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야당>서 박해준은 마약수사대 형사 오상재로 분해 관객과 다시 만났다. 정의감과 복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연기하며, 또 다른 ‘가장의 얼굴’을 보여줬다.

중년 아이돌
노년 아이돌

<폭싹 속았수다>와 촬영 시기가 겹쳐 고된 일정이었지만, 그는 “연기할 땐 몰입하지만 생활까지 끌고 오진 않는다”며 프로페셔널한 자세를 유지했다. 인터뷰서 그는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할 것 같다”며 웃었지만, 관식이로 불리는 것과 국민 아버지라는 수식어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박해준은 “중년의 아이돌이라는 말도 좋지만, 언젠가 노년의 아이돌이란 말도 듣고 싶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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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