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버려진 북파공작원, HID 요원들 비스토리

내란 동원된 대북 살인 병기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오혁진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12·3 계엄 사태와 관련해 HID(북파공작원,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언급되고 있다.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인 HID가 비상계엄 선포 전부터 관여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일각에선 그림자처럼 살아온 HID 요원들이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고 토로했다.

앞서 노상원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 ‘정보사령부 수사2단’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시키면 다 하고, 힘 좀 쓰는 애들”이라는 기준 아래에 HID 요원도 합류시켰다. ‘살인 병기’로 훈련된 HID의 전술적 판단력은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반면,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무시했고, 보상조차 까다롭게 했다. 오죽하면 스스로 “(정부가) 키워서 잡아먹는 돼지 같다”고 평가했을까?

체포된 윤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령부 고위 간부 출신 제보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상호 정보사령관이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이 원스타다.

또, 비밀 조직 특성상 역할이 도드라진 적이 없다. 1980년 12·12 사태 때도 정보사는 주요 가담 세력이 아니었다. 그런 정보사가 계엄에 관여한 것은 이례적이다.

HID는 북한에 침투해 고위층을 암살하고 파괴 공작을 수행하는 특수부대다. 국내 민간인을 상대로 HID를 투입했다는 것은 반대 세력에 대한 윤 대통령의 적대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지금까지 예우와 보상 문제 해소되지 않아
“다쳐도 병원 못 가”···상이 등급 ‘별 따기’

일각에선 투입 목적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 체포나 거짓 민란 기획 등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매체를 통해 “(작전에)깊숙이 관여돼있던 인원의 양심 고백을 들었다”며 “선관위 과장 등 핵심 실무자 30명을 무력 제압해 케이블타이로 손·발목을 묶고 복면을 씌워 B-1 벙커로 데려오라는 임무였다”고 말했다.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용현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 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용현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상원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상원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권력의
그림자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부는 HID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 지역에 파견돼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양성됐으며 적 생포 및 사살, 적군 진지 주요시설물 파괴, 적지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 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이 주요 임무였다.

HID는 북파공작원의 대명사로 통한다. 과거 북파 작전을 수행했던 부대는 여럿 존재했다. HID의 전신은 1948년 1월 미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다. 이후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 안에 첩보 수집을 담당하는 공작과가 신설됐는데, 이 부서가 영문자 HID로 표기됐다.

육군첩보부대가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한 기간은 1950년 7월부터 1961년 7월까지다.

이후 HID라는 명칭이 육군정보부대(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변경됐다. HID는 현재 정보사령부 산하서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육상특임대인 ‘설악개발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과거 정부는 1968년 1·21 사태 이후 응징보복부대로 설악개발단을 비롯한 해군의 UDU 등 특수부대를 여럿 창설했다.

1972년 AIU는 육군정보사령부(AIC: Army Intelligence Command)로 확대됐고, 1990년 11월 육군과 해군 등의 정보부대가 합쳐져 오늘날의 국군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가 만들어졌다. 그러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등 화해 분위기를 타고 폐쇄와 통폐합을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독한
후유증

HID 요원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보급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서 생식, 칡뿌리 등을 먹어가며 버티기도 했다.

어떤 요원은 “훈련 당시 헬기서 속옷만 입은 채 숲에 던져진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추억이지만, 그때는 살기 위해 죽어라 (훈련)했다”며 “HID 출신들은 대부분 강제 징집된 사람들이다. 나도 1970년대 후반에 특전사에 지원했지만, ‘제대하면 집도 주고 억대 연봉을 주고 특별 대우해주는 부대가 있다’는 말에 따라간 곳이 설악개발단이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HID 훈련 기간은 60개월 이상이었고, 속초에 갇혀 생활했다. 보안상 휴가도, 병원도 보내주지 않았다”며 “임무에는 3인 1조로 투입됐지만, 각각 임무 내용이 다른 적도 있어 사실상 개인적으로 움직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임무 수행 중 다치면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작전에 투입돼 살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북파공작원 보상을 위해 정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51년 HID가 창설된 뒤 1994년까지 양성한 HID는 1만3000명이며, 임무 수행 중 7987명이 사망·실종됐다.

HID에 30년 이상 몸담았던 고위 관계자는 “2000년대 들어서야 요원을 관리하는 공작팀장을 잘 만나면 훈련 중 다쳐도 조용히 병원에 보내줬지만, 예전엔 신분 노출 우려로 병원에 갈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제보자 본인도 훈련 중 발목과 허리를 다쳤지만, 국군병원에 갈 수 없어 2010년까지 약으로 버텼다고 주장했다. 수술을 받고 제대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에 참아야 했다.

처참히 짓밟히고 무시당한 흑역사
사령관 진급 때문에···불명예 투입

이후 그는 목과 허리디스크에 철심 10여개를 박아 넣는 수술을 받고 2015년경 제대했으나, 상이 등급을 인정받지 못했다. 부상 당시 병원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보훈처에 “북파공작원 특성상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주장했음에도 상이 등급 외 판정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전역했다.

통상 척추부상과 관련해 추상적인 용어인 경미한 기능장애 기준을 구체화해 ‘엑스레이 검사 등에서 명백한 기형’이 있거나, ‘추체 높이 10% 이상 30% 미만의 압박골절’로 통증을 동반하는 경우 7급을 인정하게 된다.

HID 부대원들의 역사와 훈련 과정은 듣기만 해도 일반인이 견디기 힘든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내가 죽더라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가치와 명예를 믿기 때문이다. 실제 군인들이 출연하는 예능프로그램 <강철부대3>서 압도적인 기량과 팀워크를 선보이며 우승한 HID 출신 강민호 팀장도 ‘진짜 영광은 현역분들께’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한 HID 요원은 인터뷰서 계엄 동원 및 임무 지시에 대한 수행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자기 군번도 모르고 그냥 훈련만 받다가 나중에 기간이 끝나면 (급여)통장 받고서 집에 가는 시스템”이라며 “계엄 동원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 같다. 거기(HID) 인원들은 사회와 아예 단절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에 뉴스나 신문을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이들은 어떤 정치 이념도 갖지 않고, 하달받은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계급도
명예도

만약 국내 정치인 사살 명령이 있었다면 실행할 수 있었을지 묻는 질문에는 “그냥 저 사람 죽이라면 안 죽이겠죠. 그런데 ‘저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서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어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어’라고 잘 포장했으면 죽였을 수도 있겠지만, 북파공작원들은 그런 거에 조금의 머뭇거림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잘못된 선택(명령)을 내린 분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HID는 존재 그 자체로도 북한 도발에 대한 억지 전력으로서 의미가 있는 부대다. 취재진이 만난 HID 출신들은 하나같이 “12·3 내란 사태로 반란과 테러에 동원되는 부대라는 오해는 불명예스럽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진짜 간첩과 싸운 ‘김신조 사건’ 재조명

1968년 1월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군부대)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 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이다.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때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비군과 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 3사관학교가 창설됐다.

을지 연습과 유격훈련이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고, 육군 방첩대가 국군보안사령부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했다.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4개 부대가 바로 선갑도부대(육군), 장봉도부대(해군), 684부대(공군, 실미도) 마니산 까치부대(해병대)였다.

첩보조직들도 김신조 일당의 침투 이후 이에 대응하고자 보강했으며 이때부터 특수공작부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전략 목표·전술 목표·훈련 계획 등을 정하고 조직도 개편했는데 설악개발단 창설기획자인 이춘국 예비역 대령에 따르면, 선갑도부대가 803대로 변경됐고, HID 기능을 이어받은 설악개발단이 909대로 확대 편성됐다.

북한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공작원의 희생이 있었다. 이들은 비밀스러운 공작의 세계만큼이나 그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00년 하반기부터 북파공작원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말로만 듣던 북파공작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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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혁만 아는 보수대연합

장동혁만 아는 보수대연합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방선거를 53일 앞두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자 일각에선 “장 대표가 지방선거 패배 후 부정선거론을 제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장 대표가 취임 직후 구상했던 보수 대연합은 이미 무너졌다. 그의 구상은 왜 무너졌을까? 그리고 누가 그다음을 노리고 있을까?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난 11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장 대표는 미국 국제공화연구소의 초청을 받았다. 원래는 지난 14일부터 2박4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초청 측의 요청으로 3일 앞당겨 출국했다. 누가 뭐래도 앞당긴 출국 장 대표는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는 세계의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 워싱턴 DC로 출발했다”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코 외면할 수 없기에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6·3 지방선거를 53일 앞둔 시점에서, 그것도 일정을 더 늘린 출국이었다. 그 스스로는 “6·3 지방선거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는 거대한 전선이 될 것”이라며 “지방선거를 앞둔 현재의 분열과 고통의 시간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고, 위기의 대한민국 앞에서 우리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내 일각에선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김재섭 의원은 지난 14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너무 갑작스럽게 비밀스럽게 가셔서 명분을 모르겠다”며 “선거를 코앞에 앞둔 상황에서 공천도 마무리가 안 됐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도 같은 날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지금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선거가 어려운 상황에서 뛰어야 하는 후보들이 단 하루라도 낭비하지 않도록 후보를 빨리 결정지어 주는 일”이라며 “그걸 포기하고 미국에 간 것은 이번 선거가 이미 어렵게 된 마당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차라리 다음에 어떤 정치적 행보를 위해서 지지층 결집을 목적하려고 간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도 지난 11일 경기 수원 방문 도중 기자들을 만나 “미국에 지방선거 표를 찍어줄 유권자가 있느냐”며 “리더가 이번 지방선거를 포기한 거 아니냐는 느낌을 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이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김 전 최고위원은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지난 9일 KBS 라디오 <세상의 모든 정보 윤인구입니다>에 출연해 “국제공화연구소의 중요한 목적·역할 중 하나는 각국 부정선거 감시”라며 “장 대표가 그에 대한 기법을 배우고 와서 지방선거 패배 후 부정선거 때문에 졌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친한(친 한동훈)계인 국민의힘 윤희석 전 대변인도 같은 날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비슷한 주장을 했다. 보다 못한 <조선일보>는 지난 10일 국제공화연구소 근무 경력이 있다는 익명의 워싱턴 DC 외교·안보 싱크탱크 연구원의 발언을 인용해 “개발도상국·후진국의 선거 도중 발생할 수 있는 부정을 감시하는 국제공화연구소를 단순히 부정선거론 연구기관으로 매도하는 것은 상당히 모욕적인 수사”라면서 장 대표를 두둔했다. 장 대표는 지난해 8월 당 대표 당선 과정에서 대여 투쟁과 단일 대오를 강조했다. 선출 직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도 “단일 대오로 뭉쳐 제대로 싸우는 야당의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며 “지금부터 단일 대오에서 이탈해 내부 총질하는 분들과 당론을 계속 어기는 분에 대해서는 결단하겠다”고 주장했다. 선거 앞두고 미국행…일각선 “부정선거론 배우러?” 극복 못 한 모순…당내 한 제외하고 당외 이와 연대? 이후 진행된 것은 한 전 대표·김 전 최고위원 제명과 배 의원 당원권 1년 정지 등 친한계 일원들에 대한 징계였다. 이들 중 배 의원은 법원에 징계 효력 정치 가처분을 신청했고, 지난달 인용돼 징계 효력에서 벗어났다. 친한계 구성원들은 다수의 방송 시사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출연하면서 이익과 불이익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원외 인사들도 방송 출연을 통해 존재감을 유지하면서 이들의 의견을 왕성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장 대표 등 친한계가 아닌 국민의힘 인사들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의견을 밝히기 때문에 비판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장 대표는 지난해 9월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면서 “방송에서 의견을 가장해 당에 해를 끼치는 발언을 하는 것도 해당 행위”라며 “국민의힘을 공식 대변하는 인물임을 알리는 패널 인증제를 시행하겠다”고 강조했다. 그가 한 전 대표 대신 선택한 연대 시도 대상은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였다. 지난 1월엔 이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공천 헌금 의혹·통일교 게이트 특검법 공동 추진을 합의했다. 지난달엔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여 투쟁 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대해선 장 대표가 이 대표와의 연대를 통해 보수 대연합을 시도한 것이라는 해석이 다수 나왔다. 하지만 이 대표는 “공조와 연대는 다르다”면서 선거 연대에 대해선 선을 긋고 있다. 개혁신당 지지자들도 이 대표가 국민의힘에서 징계를 받고 대표직에서 물러나 개혁신당을 창당하기까지의 과정을 토대로 국민의힘에 대한 강한 반감을 유지하고 있다. 당내 경쟁자와의 투쟁을 위해 불미스럽게 당을 나간 외부 인사와의 연대를 추구하는 그림에 대해선 한동안 “모순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보수 대연합은 당내 갈등을 봉합한 후 추진하는 것이 합리적인 순서”라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당선 과정에서 구 친윤(친 윤석열)계와 강경 보수 성향 윤 어게인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장 대표의 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장 대표는 친한계를 국민의힘에서 내보낸 후 구 친윤계·윤 어게인을 묶어 강경한 선명 보수 야당을 만들어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구 친윤계 중 상당수는 대구·경북·강원 등 국민의힘의 텃밭으로 통하는 지역 내 유지들과 밀착해 정치활동을 이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어게인 세력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를 두둔하면서,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반대했다. 두 세력에 대해선 “같은 ‘보수’라는 테두리 안에 있을 뿐, 성향이 전혀 다르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구 친윤계는 언론 노출을 가급적 피하면서 지역구 관리에 공을 들이는 토착 보수 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윤 어게인 세력은 대규모 집회 개최·유튜브 활동 등 강경한 의견을 왕성하게 표현하는 것에 주력한다. 실패한 연대 이대로 포기? 아울러 구 친윤계는 윤 어게인 세력과 밀착하는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지난달 국민의힘 의원 전원 명의로 발표된 절윤(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 선언에도 참여하는 등 윤 전 대통령을 이미 지웠다. 반대로 전한길씨 등 윤 어게인 세력은 절윤 선언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장 대표에 대해서도 독한 비난을 이어갔다. 장 대표로선 지난해 당 대표 선거 출마 이후부터 구상했던 “구 친윤계·윤 어게인을 묶는다”는 목표가 어긋난 것으로 보여질 여지가 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 지방선거 패배와 장 대표 체제 붕괴에 대비해 ‘포스트 장동혁’을 거론하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거친 후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선출할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현 시점에서 포스트 장동혁에 도전할 수 있는 인사로는 ▲오세훈 서울시장 ▲한 전 대표 ▲신동욱 수석최고위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달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 공천 1차 마감 시한까지 신청하지 않았다. 이어 당의 인적 쇄신·절윤 선언 실천·혁신 선대위 설치 등을 요구하면서 장 대표와 대립각을 세웠다. 오 시장은 추가 공모 기간 내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이때까지도 “서울시장 출마가 아니라 장 대표 체제 붕괴 후 당권에 도전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아다녔다. 따라서 오 시장의 선거 당락을 떠나 그가 당권에 도전할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서울시장 5선에 성공하더라도 당 대표 출마 및 당선 후 겸직을 막을 법적 제한은 없다. 한 전 대표는 지난 14일 전입신고를 하는 등 부산 북갑에서 재보궐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유력해졌다.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확정된 전재수 의원은 이곳에서 3선을 했고, 현재 부산 내 유일한 민주당 의원이다. 한 전 대표가 이곳에서 당선돼 민주당의 부산 내 근거지를 소멸하면 국민의힘에 복귀해 다시 당권·대권에 도전할 명분이 붙는다. 신 최고위원에 대해선 지난해 12월부터 “포스트 장동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장 소장은 지난해 12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국민의힘 내 대구·경북에 지역구를 둔 몇몇 의원이 장 대표로는 안 되겠다면서 신 최고위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으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고 주장했다. “구 친윤계로서는 오 시장도 구 친윤계와 성향이 다른 수도권 내 보수 성향 엘리트에 속해 부담스러워할 것이고, 오랫동안 갈등했던 한 전 대표는 말할 것도 없다”는 분석도 돌아다녔다. 신 최고위원에 대해선 한동안 서울시장 출마설도 돌았지만,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다. 3인방 행보는? 성향이 전혀 다른 세력을 조율하면서 그 수장으로 군림하는 데에는 ▲전략적 경계 설정 및 수용 ▲고도화된 소통 ▲정치적 영향력 행사 기술 ▲유연한 지도력 등 고난도 정치술이 필요하다. 이 정치술을 갖추고 세력 조율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정치인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였다. 효종·현종은 어느 한 세력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지 않는 방향으로 서인·남인의 당쟁을 관리했다. 하지만 2대 독자로서 강한 정통성과 고집 센 성격을 가졌던 숙종은 주기적으로 환국을 일으켜 한 세력에 일방적으로 정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서인은 학문 방향·남인에 대한 대응 등 논점에서 의견이 엇갈려 노론·소론으로 갈라졌다. 영조가 즉위했을 때는 노론·소론의 당쟁이 극대화됐다. 이 때문에 소론·남인 강경파가 영조를 인정하지 못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다. 이후 영조가 추진했던 탕평책은 노론·소론의 온건파만 조정에 남겨놔 균형을 유지하는 완론 탕평이었다. 이 때문에 종전엔 없던 탕평파라는 당파가 탄생했다. 이들은 영조의 완론 탕평에 협조해 살아남았다. 하지만 탕평파에는 영조의 사도세자 살해를 끝까지 막지 못했다는 정치적 약점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탕평파의 핵심이었던 사도세자의 처가 풍산 홍씨는 세손 정조의 정치 보복을 우려해야 했다. 정조의 즉위를 도왔던 세력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처가 경주 김씨 가문이었다. 결국 영조의 완론 탕평은 유교에서 금기시하는 척신 정치로 나아갔다. 정조는 즉위 초엔 홍인한·정후겸 등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의 핵심을 숙청한 후 측근 홍국영에게 전권을 맡겼다. 그러다가 홍국영이 과도한 권력욕을 드러내자 숙청한 후 영조와 정반대로 준론 탕평을 추진했다. 준론 탕평은 각 당파의 강경파를 전면에 내세워 당파마다 선명한 당론을 내세우게 한단 것이다. 이는 곧 “영조 이전의 정치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고, 각 당파에 스스로 생각하는 의리를 명확하게 밝히라고 요구하는 체제였다. 그들의 의리 중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택하는 심판 겸 절대자는 정조 자신이었다. 정조가 홍국영 숙청 이후 선택한 정국 관리 대리인은 소론 강경파 겸 시파였던 서명선이었다. 이어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영조 대에 사실상 조정에서 사라졌던 남인을 조정에 편입시키려고 남인 영수 채제공에게 고위직을 부여했다. 아울러 자신의 스승이었던 김종수와 초강경파인 심환지 등 노론 벽파와 정민시 등 노론 시파도 조정에 공존시켰다. 각 당파의 수장들을 골고루 챙겨 자신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경쟁을 시킨 것이었다. 각 당파의 강경파만 엄선해 조정에 공존시켜야 했기 때문에, 정조의 갈등 조정 업무는 매우 많았다. 김종수는 이따금 갈등을 일으켰다. 정조는 매번 적당한 선에서 김종수를 처벌하면서 그 갈등을 무마했다. 정조도 김종수에 대해선 “위험에 직면하면 위험에서 건져주고, 거의 죽게 되면 죽음에서 구원해 줬다”고 말했다. 선거 패배하면 주목받을 ‘포스트 장’ 누구? 정조의 준론 탕평 갖가지 비결…누가 갖췄나? 서명선은 공개적으로 “저는 채제공과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고, 채제공이 역적이 아니면 저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선은 이인좌의 난 이후 남인에 대한 감정이 격렬해진 소론 일각의 정서를 조정에서 공론화했다. 그런데 막상 서명선은 심환지로부터 탄핵당했다. 서명선이 영의정이 된 것에 심환지가 불만을 품은 것이었다. 그러자 정조는 크게 분노해 김종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렵다”면서 벽파를 ‘우리 벽패는’이라고 일컫는 등 심환지에게 수많은 밀지를 보냈던 사람은 정조였다. 심환지는 보는 즉시 태워 없애야 하는 밀지를 보관해 후세까지 전하게 했다. 이 밀지 모음이 ‘정조 어찰첩’이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밀지를 보내 정국 관리 구상을 밝히면서 심환지에게 구체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등 막후에서 ‘정국’이란 거대한 연극의 감독 겸 주연을 맡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정조는 세자에게 양위한 후 스스로 정예부대로 육성했던 장용영을 데리고 수원 화성으로 물러앉아 조정을 감독하는 원격 통치를 구상했다. 정조가 정했던 시기는 1804년이었지만, 정조는 1800년 훙서했다. 정조가 구상했던 준론 탕평은 정조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극진한 총애를 받을 정도로 공부에 몰두해 즉위 후엔 스스로 성리학의 정통이자 스승을 자처했다. 이는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을 없애고, 임금이 신하를 가르치는 초계문신제를 채택한 것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서명선·김종수·정민시 등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사조직 동덕회를 조직할 정도로 측근이었다. 조정 내부엔 정조의 준론 탕평에 동조하는 시파가 있었고, 정조 어찰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벽파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조정 외곽엔 영남 남인 1만명이 연명해 정조의 사도세자 복권을 시도하고 정조의 준론 탕평에 호응하는 등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친위 무력 기반 장용영도 있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밀지를 주고받으면서 막후에서 정국을 설계하면서 이끄는 부지런함까지 갖췄다. 꿈꾸는 잠룡들 과연 국민의힘은 서로 전혀 다른 구 친윤계·친한계·강경 보수를 모두 조율할 수 있는 수장을 배출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모두의 인정을 받는 월등한 실력과 부지런함을 갖춰야 한다. 장 대표가 지금이라도 이를 소화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누군가가 나타날지, 보수 성향 유권자의 가슴은 타들어 가고 있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