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㉚각 사동의 은밀한 모의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4.12.02 04:00:00
  • 호수 15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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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판길이에 이어 그 아이가 가마니에 둘둘 말려 공동묘지로 떠나는 걸 보면서 원생들은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슬픈 곡조로 노래를 불렀다.

슬픈 곡조

가네 가네 나는 가네
구름같이 태어나 바람처럼 가누나
북망산이 어드메뇨 건너산이 북망일세
만장 같은 집을 두고 북망산천 찾아 가네 
어이 넘차 어허야~ 어허이 어허야~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 마라
영영 가는 나도 있다
어이 넘차 어허야…….

목소리가 차츰 하나 둘 합쳐지더니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모든 건 빠르게 진행되었다. 각 사동 간에 은밀한 모의가 신속히 오가더니 드디어 실행 날짜까지 잡혔다.

그날 아침 식당에 도착하는 대로 원생들은 각자 밥과 국을 타 들고 원장 관사 앞의 넓은 마당에 모였다. 줄을 맞춰 선 모습이야 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감도는 분위기는 이전 같지 않았다.

식당 앞에서 위압을 가하는 노란 완장도 보이지 않았지만 대열을 흩트리거나 잡담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동 개시!” 

앞쪽에 선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원생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들고 온 식기들을 마당 앞에 쌓기 시작했다. 쿰쿰한 곤쟁이젓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관사 쪽에서 선생들이 달려나왔다.

“뭐냐? 너희들 지금 뭣하는 거야?”

주임 선생이 인상을 사납게 구기며 물었지만 누구 하나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순서대로 식기를 올려놓고 약속이나 한 듯 길바닥에 줄지어 앉을 뿐이었다.


곧 마당엔 수많은 식기들이 쌓이면서 거대한 은회색 구릉을 이루었고, 그 광경은 원생들의 항변에 무게를 더해 주고 있었다.

행동을 끝내고 모두 길바닥에 앉자 주임 선생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야, 너희들 대체 왜 그래? 말을 해 봐!”

그러나 아직 모두 잠잠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건 선생들 눈에 첫 표적이 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였을까?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은 모습이었다. 분노가 공포감을 떨쳐내는 과정이랄까?

“이거 봐! 너희들이 할 말 있으면 차근차근 지휘 계통을 밟아서 하든지 해야지 무조건 이러면 되겠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열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어서 원장이나 나오라구 하슈!”

원장 관사 앞 거대한 은회색 구릉
“원장님의 확실한 해명 들었으면…”

불의의 사태를 당한 주임 선생은 잠시 입을 벌리고 멍하게 서 있더니, 권위 유지를 해야겠다 싶었는지 악을 썼다.

“네놈 누구야, 엉? 그건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너희들 모두 각자의 신분을 잊었나? 너희들은 각종 범법을 저질러 민심을 어지럽히고, 나아가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며 인간의 존엄한 권위까지 실추시킨 부랑자들이다. 따라서 국법에 의해 보호조치에 처해진 신세들이야. 요구사항이니 뭐니 따질 신분도 위치도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자숙은 못할망정 지금 혁명정부의 법 앞에 감히 도전하겠다는 거냐?”

권력이 막강하다 해도 1000여명의 원생들 앞에서 그렇게 호통을 친다는 건 보통 배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대열 앞쪽에서 원생 하나가 일어섰다. 아까 소리를 지른 그 원생 같았다. 키가 훌쩍한 게 스무 살이 가까워 보였다. 

용운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바로 선감도로 오는 배 위에서 소란을 피운 그 노랑머리였다.

“예, 수감 중이라는 건 저희들도 압니다. 그러나…….”

“소속부터 대라!”

“예, 각심사 3반 박호근입니다.”

“말해 봐!”


“보호조치 중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희들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원장님의 확실한 해명을 들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뭘?”

주임 선생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예. 아시겠습니다만, 얼마 전 한 원생이 지독하게 매를 얻어 맞은 나머지 탈출하다 죽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럼 우리가 탈출하라고 시켰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 사장님의 매질이 너무 가혹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원생은 그만한 죄를 범했어. 신성한 남의 집 음식을 훔치고 우리 선감학원의 얼굴에 먹칠을 했단 말야. 더구나 그 원생은 아주 상습적이어서 주의와 경고를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 체벌이 가혹하니 어떠니 따지기 전에 먼저 규율을 어기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규율을 잘 따르는데도 손찌검하는 선생이 있거든 어디 말해 봐!”

“저희들도 답답합니다. 과연 그 원생은 왜 혹독한 체벌을 받으면서까지 남의 부엌을 뒤졌겠습니까? 그리고 며칠 전에는 각심사의 원생 하나가 밀을 씹어먹다 죽었는데, 대체 왜 밀을 먹었겠습니까?”

“그게 골자냐?”

“네.”

부족한 식사량

“너희들의 식사량이 다소 부족한 건 안다. 그러나 재정이 그것뿐이기도 하지만, 그건 또한 전국의 모든 수용소와 동일한 양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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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성민 기자 =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최근 행적이 확인됐다. 지난해 탈옥에 성공한 이후 1년여 만이다. 박씨와 함께 탈옥에 성공했던 인물은 총 3명이다. 이들은 올해 초까지 말레이시아로 여러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박씨는 최근 필리핀 카비테 부근 한 시골 마을로 주거지를 옮겼다. <일요시사>는 지난해 초부터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탈옥 가능성을 제기했다. 외교·수사당국은 현지 담당자가 철저하게 관리 중이라며 ‘소극 행정’으로 대처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꼴이다. 1년이 지난 현재, 박씨는 필리핀 서부 지역 한 시골 마을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못 잡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박씨는 필리핀 카마린스 수르 교도소에서 탈옥한 이후 올해 초까지 총 세 차례 이상 말레이시아 사바주로 밀항을 시도했다. 이들이 밀항을 시도한 곳은 필리핀 남서부 잠비앙가와 민다나오 다바오 시티다. 잠비앙가의 경우 여행경보 4단계인 흑색 경보(여행금지) 발령 지역이다. 외교부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 없이 흑색 경보 지역을 방문·체류하는 경우, 여권법 제26조 등 관련 규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잠비앙가는 우리나라 국민이 여행할 수 없는 곳인 셈이다. 박씨와 송모씨 등 ‘탈옥 멤버’들은 다바오 시티에서 두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잠비앙가로 이동했다. 잠비앙가에서 술루 제도를 통해 말레이시아로 이동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술루 제도로 이동하던 박씨 일당들은 필리핀 반군에 억류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박씨가 밀항을 시도한 잠비앙가를 비롯해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는 이슬람 반군들이 주둔해 있다. 지난해 10월 말에도 무력 충돌이 발생해 최소 14명이 사망했다. 당시 민다나오 마긴다나오델수르주의 파갈룽간시에서 필리핀 최대 반군단체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의 두 지휘관과 수하 병력이 총기와 흉기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970년대부터 분리주의 무장투쟁을 벌여온 MILF는 2014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를 통해 정부가 민다나오섬에 설치한 이슬람 임시 자치정부인 ‘방사모로 과도당국(BTA)’과 ‘방사모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지역(BARMM)’ 구성에 참여했다. 잠비앙가·민다나오서 ‘뒷돈 도주’ 시도 이슬람 반군에 억류 후 풀려나 마닐라로 MILF는 2019년 9월부터 평화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무기 반납을 시작했지만, 무장 해제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전히 총기를 보유한 MILF 병력은 수천 명 이상이다. 박씨는 반군들에게 마약 및 보이스피싱으로 벌어들인 돈 수천만원을 뇌물로 전달한 이후 풀려났다. 지난 5월 초 박씨는 송씨와 헤어진 후 필리핀 루손섬 카비테주 카비테 시티로 이동했다. 지난달 말에는 카비테 시티 외곽 한 시골 마을에 자신의 현지 부인인 A씨까지 불러 정착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그간 마닐라 타기그에서도 부촌으로 꼽히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에 거주했다. 현지인들은 보니파시오를 BGC 또는 글로벌 시티로 부른다. 필리핀의 청담동으로 불릴 만큼 고층 빌딩, 고급 주거지, 쇼핑 거리 등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보니파시오의 경우 냉장고와 에어컨 정도만 구비돼있는 콘도 한 유닛의 월세가 필리핀 돈으로 13만~15만페소(약 304만~351만원)에 달한다. 필리핀은 주차장도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차장을 포함하면 월세도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더 늘어나게 된다. 같은 도시에 위치한 원룸 형식의 콘도 월세도 5만5000페소(약 128만원)에 달한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경찰도 관련 첩보를 파악해 현지 수사당국과 공조 중이다. 아직 정확한 집 주소나 확실한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박씨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출신의 전직 경찰이다. 2008년 수뢰 혐의로 해임된 그는 경찰 조직을 떠난 뒤 2011년부터 10년 넘게 보이스피싱계의 정점으로 군림해 왔다. 수억 비트코인에 차명 주택 부동산 소유 현지 부인이 조력해 “지속적 현금 조달” 특히, 조직원들에게 은행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구성된 대본을 작성하게 할 정도로 치밀했다. 경찰 출신인 만큼, 관련 범죄에선 전문가로 통했다. 그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지난 2012년 콜센터를 개설해 수백억원을 편취했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범죄는 2021년 10월4일에 끝이 났다.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게 “박씨가 마닐라에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총기가 허용되는 필리핀의 특성상 대부분 중무장했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무장 경호원들에 맞서 중무장하고 있었다. 2023년 초까지만 해도 박씨가 곧 송환될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박씨는 일부러 고소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여죄를 만들어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으려 범죄를 계획했다. 국내 정보기관은 박씨 일당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2023년 12월과 지난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필리핀 교정당국에 박씨의 탈옥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박씨가 탈옥한 것을 두고 필리핀 교정당국은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외교부와 경찰, 법무부 국제형사과 등이 일부 파견을 가 현지에서 한국 범죄자들을 관리하는데, 공문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범죄자와 면담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그저 공문만 보내는 것으로는 범죄자들의 탈옥을 막을 수 없다. 당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안 잡나 박씨는 A씨의 도움을 받아 오래된 교도소의 취약점을 파악해 탈옥을 계획했다. 사전에 철저히 ‘탈옥 계획’을 구상하고 보안이 허술한 교도소에 잡혔단 뜻이다. 말레이시아로의 밀항 준비도 A씨가 현금 조달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A씨는 박씨가 교도소에서부터 환전한 수억원 이상의 비트코인을 관리해 왔다. 박씨와 같은 교도소에 있었던 한 제보자는 “환전한 비트코인 외에도 A씨가 박씨의 차명 소유 자택 부동산 등 수십억원 상당의 재산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