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이슬처럼 떠난 김민기

너희가 김민기를 아느냐

[일요시사 취재1팀] 최윤성 기자 = 대학로 소극장 학전을 이끈 가수 김민기가 암 투병 끝에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민기의 비보에 대중문화계 인사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김민기는 ‘아침이슬’ ‘상록수’ 등 민중가요를 통해 민주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한국 대중음악과 공연예술계에 큰 획을 그으며 큰 업적을 남겼다. 김민기는 학전에서 수많은 후배 예술인을 키워냈고 대중문화 발전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뒷것 인생을 살다 떠났다.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을 이끈 연출가이자 ‘아침이슬’을 부른 가수·작곡가 김민기가 지난 2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학전 관계자들은 지난 22일 “김민기가 21일 오후 8시20분쯤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병세 악화
추모 행렬

지인들에 따르면 최근까지 경기 고양시 일산 집에서 통원하며 항암치료를 받아왔지만, 암세포가 간까지 전이된 상태라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병세가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학전 측은 이날 “조의금과 조화는 고인의 뜻에 따라 정중히 사양한다”며 “빈소 및 발인 등 모든 장례 절차는 취재진에게 비공개로 진행된다”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자 하는 고인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마음으로 애도해달라”고 당부했다.

김민기의 조카이자 학전 총무팀장인 김성민은 지난 22일,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댁에서 요양 중이던 선생님(김민기)의 건강이 지난 19일부터 안 좋아졌고 20일 오전 응급실을 찾았다”며 “병원에 갔을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다가 다음날 오후 8시26분에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어 “갑작스럽게 떠나셨지만 3∼4개월 전부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며 “학전과 관련해선 ‘지금 끝내는 게 맞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후 지난 24일 오전 8시 빈소가 마련됐던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발인식이 엄수됐다. 별도의 영결식은 진행되지 않았다. 발인식이 끝난 후 장지인 천안공원묘원에 향하기 전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꿈밭극장’ 마당을 들렀다.

이곳에는 아르코꿈밭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병국 위원장을 비롯해 설경구, 장현성, 황정민, 이황의, 최덕문, 방은진, 배성우, 가수 박학기, 박승화(유리상자), 유홍준 교수 등 김민기와 추억을 함께한 이들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정치계 인사들의 추모 물결도 더해졌다. 윤석열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당 대표 후보,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등 애도의 뜻을 전했다.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와 지난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뒤 미술을 접고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획일적인 수업 방식에 거부감을 드러낸 그는 1학년 1학기를 마친 뒤 고등학교 동창 김영세와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학전 들리고 떠나
“떠나기 전 고맙다는 말 전해”

이듬해 김민기는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관의 ‘청개구리의 집’에서 공연을 열며 그를 대표하는 곡 ‘아침이슬’과 ‘가을편지’ ‘꽃 피우는 아이’ ‘친구’ 등을 작곡했다. 그러나 김민기의 음악 활동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난 197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당시 가르쳤던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김민기의 이름이 올라가 있으면 사전 심의 통과가 어려워 작곡을 해 놓고 이름을 올릴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 1974년 10월에는 카투사로 입대해 군복무를 시작했으나 1975년 초 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이유가 문제가 돼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아침이슬’은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보안대 조사가 끝나고 김민기는 영창살이를 한 뒤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됐다. 

중등교사 자격증을 가졌지만, 김민기는 대학 졸업 후 봉제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렸고 익명으로 비밀리에 작곡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은 1977년 작곡해 발표한 ‘상록수’에 담겼다. 

틈틈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지만, 박정희정권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76년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당시에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는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음악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김민기는 고향인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10·26 사건으로 맞은 ‘서울의 봄’ 시기에 잠시 음악 활동을 재개했지만, 12·12 군사 반란으로 전두환 일당이 정권을 잡자 다시 낙향했다. 지난 1981년 전두환정부가 관제 예술제인 ‘국풍81’에 참여하도록 김민기를 회유했지만, 농사일을 핑계로 끝까지 참가를 거절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고난의 연속
민주화 상징

1980년대에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 등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면서도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농촌과 탄광촌 등의 현실을 담은 마당극과 노래극 등을 공연하고, 1984년 대학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노래패 ‘노찾사’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정부의 방해로 음반은 거의 팔리지 못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금지곡들이 해제될 때까지 초라한 신세를 겪었다.

1987년 민주항쟁 당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선 언제나 ‘아침이슬’이 불렸다. 해당 시기 양희은이 노래한 ‘아침이슬’은 대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며 ‘민주화의 상징’이 됐다. 1989년에는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후 1990년 <한겨레신문>의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 참여해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한 뒤 이를 기념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20년 만에 ‘아침이슬’을 공개한 장소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불렀다. 

김민기가 공연계에 입문한 것은 1970년대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첫 무대 공연 경험을 쌓은 김민기는 이듬해 마당극 <아구>의 대본을 맡았다. <아구>는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상연 금지처분을 당했지만, 김민기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재공연을 강행하며 저항했다. 


연이은 금지곡 지정으로 음악 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1978년에는 개신교 계열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 사측이 고용한 용역 깡패에 의해 좌절하는 노동자들의 고투를 담은 작품으로 지난 1979년 2월 제일교회에서 상연됐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농사를 짓던 1981년에는 전북 지역의 연극패, 노래패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제작했다. 이 극은 1983년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김민기가 익명으로 연출을 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성기 시작
대배우 배출

김민기가 공연계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지난 1991년 김민기는 극단 학전을 세우며, 30년간 문화예술계에 큰 공을 세웠다. 

학전은 ‘못자리 농사를 짓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배우가 성장하면 내보내고 새로운 사람을 심고 키웠다. 그는 4장의 앨범으로 구성한 <김민기 전집>을 발매하며 받은 선불금으로 180석 규모의 학전을 열었다. 

지난 1994년 독일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가 각본을 쓰고 비르거 하이만이 작곡한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맡아 학전에서 올렸다.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역사에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 있다.


2001년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을 했고,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였다. 이 공연은 2023년까지 8000회 이상, 7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김민기는 30년 넘게 학전을 운영하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다양한 예술 장르 간의 교류와 접목을 통한 새로운 문화창조 공간의 역할을 해왔다. 소극장 뮤지컬 최초로 라이브 밴드를 도입하기도 했다.

오래도록 저항가요와 민주화의 상징으로 각인됐지만, 김민기는 ‘백구’ ‘인형’ ‘식구 생각’ ‘꽃 피우는 아이’ 등의 동요를 쓰기도 했다. 이 같은 행보는 학전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학전에서 어린이 청소년극에 관심을 이어가며 주류 공연계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에도 마음을 뒀다. 

김민기가 이끈 학전은 한국 대중문화계를 이끄는 수많은 스타를 발굴하고 육성한 곳이었다. 라이브 공연으로 팬들과 만난 고 김광석은 학전이 배출한 최고의 음악인이다. 김광석을 비롯해 윤도현, 나윤선, 정재일 등 음악가들이 학전 출신으로 성장했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도 배출했다. 

학전은 한국 문화예술의 산실이며, 대학로의 상징과 같은 공간이었다. 김민기는 무대 앞에 서는 배우를 ‘앞것’, 무대 뒤에 있는 스태프인 자기를 ‘뒷것’이라고 불렀다. 

특히 학전은 배우들과 계약서를 쓰고 4대 보험을 하는 극단이었다. 총 수입을 배우들에게 다 공개하면서 투명한 정산으로 더욱 신뢰받은 극단이었다. 

김민기는 척박해진 대학로에서도 추수를 내다보는 못자리로서 자리를 지켰다. 1991년 개관 당시 임대료, 설비비 등 재원을 마련하려다 매일 병원 신세를 지고, 극장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22년 만에 신보(1993년)를 내는 등 악착같이 버텼다. 

금지곡 80년대 중반서야 해금 
“현실적인 한계에 아쉬움 남아”

그러나 다른 소극장과 마찬가지로 관객 감소 등 경영상 어려움이 이어지며 학전은 지난 3월15일 폐관했다. 폐관에 앞서 이곳을 거쳐간 50여명의 배우, 가수, 예술인이 모여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를 열기도 했다.

김민기는 지난해 11월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죽는 날까지 학전을 운영하려 했는데,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며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학전은 지난 17일 건물을 리모델링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이 운영하는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재개관했다. 김민기는 학전의 정체성 훼손을 걱정한 듯 학전이란 이름을 쓰지 말라고 요구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지켜온 학전은 뮤지컬 <의형제> <개똥이>와 어린이극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등을 연출하며 대학로 공연 문화의 산실로 굳건히 버텨왔다. 개관 33주년을 맞으며 문을 닫는 학전에서 김민기가 연출한 마지막 작품은 <고추장 떡볶이>였다.

그는 학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좀 더 열심히, 더 많이 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전을 기억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김민기의 별세를 추모하기 위해 SBS는 지난 24일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재편성했다. 

지난 4월21일부터 5월5일까지 총 3부작에 걸쳐 방영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탄생시킨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못자리 학전과 철저히 무대 뒤의 삶을 지향하며 방송 출연을 자제해온 학전 대표 김민기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또 학전 운영을 통해 후배 예술인을 양성하는 등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과 문화적 저변 확대에 공헌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뒷것 김민기의 숨겨진 활동을 사실적이고 감명 깊게 전달했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가수 송창식·조영남, 김창남(노찾사/성공회대 교수), 임진택(연극연출가) 등 김민기의 오랜 지인들을 비롯해 가수 박학기·장필순·강산에·윤도현, 배우 설경구·황정민·장현성·이정은·안내상·이종혁·김대명·이선빈 등 학전이 배출한 아티스트들은 물론, 학전 스태프였던 강신일(총무부장), 정재일(음악감독) 등 유명인사 100여명이 김민기와 학전을 돌아본 유일무이한 프로젝트로 주목받았다.

숨겨진 헌신
마지막 인사

김민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지난 2020년 호암재단이 수여하는 ‘제30회 호암상 수상자’ 예술상을 받았다.

또 생전에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한국평론가협회 음악극 부문 연극상, 서울연극제 극본상 및 특별상, 제3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제6회 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은관 등을 수상하는 등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yuncastl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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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유튜버 데뷔 진짜 이유

문재인 유튜버 데뷔 진짜 이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잊히고 싶다던 사람의 행보는 절대 아니지 않나?”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국민 행보를 시작했다. 전임 대통령과 달리 퇴임 후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입길에 오르더니 최근에는 그 행보를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퇴임을 얼마 앞둔 시점에 남긴 “잊히고 싶다”는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보수 정당은 문 전 대통령의 말을 ‘허언’이라고 치부하는 중이고 진보 세력에서도 “좀 너무한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임 대통령의 행보라고 하기엔 과하다는 지적이다. 의도 없어도 정치 행보로 문 전 대통령은 2022년 3월30일 불교계 원로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잊혀진 삶,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퇴임을 40일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앞서 2020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대통령 이후에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이라든지, 현실 정치와 계속 연관을 갖는다든지 그런 것은 일절 하고 싶지 않다”며 “대통령을 하는 동안 전력을 다하고 대통령이 끝나고 나면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대국민 소통을 이유로 SNS를 시작했다. 책을 추천하거나 시국과 관련해 발언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행사에 참석해 직접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 적도 있다. 선거 때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에게서는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다. 문 전 대통령의 행보는 매번 입길에 올랐다. 전직 대통령인 만큼 행보 하나하나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부분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이다. 백번 양보해서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자리”라고 말했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의 언행은 정치권은 물론 국민에게도 얘깃거리가 되곤 했다. 그런 문 전 대통령이 이번에는 유튜버로 깜짝 변신했다. 전직 대통령이 유튜버로 데뷔한 사례 역시 역대 최초다. 무엇보다 영상 제작을 방송인 김어준씨가 운영하는 ‘겸손방송국’이 맡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적 해석이 줄을 잇고 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초 친명 측서 민감하게 반응 문 전 대통령은 지난 17일 유튜브 채널 ‘평산책방’에 게재된 ‘EP. 1 시인이 된 아이들과 첫 여름, 완주’ 영상에 출연했다. 채널명인 평산책방은 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머무는 경남 양산에서 운영 중인 서점이다. 앞서 문 전 대통령은 지난 16일 ‘평산책방’ 계정에 45초 남짓의 영상을 올려 유튜버로서의 출발을 알린 바 있다. 영상은 문 전 대통령과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대담 형식으로 구성됐다. 문 전 대통령은 평산책방의 ‘책방지기’로 소개됐다. 첫 번째 추천작은 시집 <이제는 집으로 간다>였다. 소년보호 사건 재판에서 보호위탁 처분을 받은 경남 청소년위탁센터의 청소년 76명이 작성한 시를 엮어 만든 책이다. 문 전 대통령은 “이 아이들은 앞으로 우리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느냐, 안 그러면 계속 빗나간 생활을 하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며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애들은 들어주기만 해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집의 표제시인 ‘가만히’를 가장 기억에 남는 시로 꼽았다. 두 번째 책으로는 류기인 창원지방법원 소년부 부장판사 등이 엮은 <네 곁에 있어줄게>를 추천했다. 청소년회복센터 교사, 자원봉사자 등이 소년재판과 소년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담은 책이다. 문 전 대통령은 “이 책은 평산책방이 직접 출판했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면서 “책이 많이 팔려서 아이들에게 인세(저작권 사용료)를 나눠주고 아이들이 ‘시집도 냈고 인세도 받았다’는 자긍심으로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의 유튜버 데뷔는 정치권을 흔들었다. SNS 글, 직접 발언 등으로 메시지를 던진 적은 있지만 고정 출연을 명목으로 한 주기적인 방송 활동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 결이 다르다는 의견이 나왔다.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문 전 대통령의 행보에 이재명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른바 ‘친명(친 이재명)계’ 쪽에서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뜬금없이 갑자기 왜? 실제 유튜브 영상은 물론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커뮤니티 등에는 문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의견이 다수 올라왔다. ‘잊혀지고 싶다고 했으면 조용히 있어달라’ ‘왜 대통령이 순방길에 나선 시점에 유튜브를 하나’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 영상 제작을 맡은 김씨와의 연관성을 언급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문 전 대통령의 행보를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와 연결 짓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 전쟁이 본격화할 즈음에 ‘친문(친 문재인)’ 세력을 규합해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국민의힘 등 야권을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내부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의도로 비친다는 것이다. 지방선거 후보 공천 시기가 다가오면 민주당 지지층이 친명과 친문(친 문재인)으로 갈릴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이미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과 정청래 대표 사이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고 있다. 정 대표는 임기 초부터 이 대통령이 주목받아야 할 시기마다 ‘자기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도 정 대표는 당원 주권 강화를 취지로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표값을 1인1표로 하겠다는 내용을 두고 의견 수렴을 하겠다며 전 당원 여론조사를 밀어붙였다. 이번 여론조사는 당 대표 선거에서 ‘당심’을 등에 업고 당선된 정 대표가 당헌·당규 개정을 통해 연임을 노리고, 앞으로 있을 지방선거의 공천권을 쥐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에 문 전 대통령의 지지층이 힘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대표적인 친문 스피커로 불리는 김어준씨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 대표가 되기 전부터 김씨가 운영하는 <딴지일보> 온라인 게시판에 자주 글을 남겼다. 당 대표 취임 후에는 “사법개혁안을 당론으로 추진해 본회의에 통과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인사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공천 전쟁 친문 결집? 지난 6일 제주도에서 열린 민주당 초선 의원 모임 ‘더민초’ 워크숍 강연에선 “민주당 지지 성향으로 봤을 때 <딴지일보>가 가장 바로미터”라고 발언해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특정 지지층에 휘둘린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에서는 문 전 대통령이 전면에 나타나면서 지방선거가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또 한편으로는 문 전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 과거와 비교해 많이 훼손된 상황에서 지방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임기 내내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점, 퇴임 후의 행보가 지지세를 깎아 먹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게 지난해 총선 때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난해 4·10 총선 당시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원하는 유세 활동을 펼쳤다. 당시 그는 “이렇게 못하는 정부는 처음”이라며 윤석열정부를 연일 공격했다. 국민의힘이 “최악의 정부는 문재인 정부”라고 정면 반박하면서 문 전 대통령이 선거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결과는 ‘폭망’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부·울·경 일대를 돌며 민주당 후보 11명을 지원했다. 이 가운데 9명이 낙선한 것이다.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이 대통령의 지지층을 중심으로 ‘문재인 책임론’이 불거졌다. 문 전 대통령의 등장이 역풍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보수층에서 ‘문 전 대통령 덕분에 보수가 결집했다’는 조롱이 나올 정도였다. 지난해 총선 유세 ‘폭망’ 조국 사면으로 민심 악화 이재명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의 사면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의 중심에 섰다. 조 대표는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돼 수감된 상태였다. 조 대표가 받은 형량은 2년으로 만기 출소는 내년 2월로 예정돼있었다. 그런 그를 ‘광복절 사면’ 대상에 포함해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의 조 대표 사면 요구는 이정부의 임기 초반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처음 정치권에서 조 대표의 사면 이슈가 흘러나왔을 당시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역대 정부에서 임기 초에 정치인 사면을 한 적이 없던 점, 조 대표에 대한 민심이 부정적인 점 등이 근거로 떠올랐다. 이른바 ‘조국 사태’는 대학 입시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 논란과 결합하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줬다.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가장 크게 흔들린 시점도 조국 사태였고, 결정적으로 윤정부의 탄생에 단초가 됐다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이 사면 요구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기류가 변했다. ‘조국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다’는 문 전 대통령의 생각이 사면 요구로 나타나면서 조 대표의 사면을 지지하는 쪽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 지지층에서는 ‘(대통령) 임기 때에도 못 한 일을 왜 현 정부에 해달라고 하느냐’는 의견이 분출했다. 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조 대표의 배우자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에 대한 사면 요구가 있었지만 이뤄지지 않은 점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에 부담 주지 말라는 의견도 빗발쳤다.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대통령실은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면서 말을 아꼈다. 그러다 이 대통령이 조 대표의 사면을 결정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을 이겼다’ ‘친문 살아 있다’는 등의 말이 나왔다. 후폭풍은 거셌다. 60%대를 견고하게 유지하던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대로 주저앉았다. 공정 이슈가 훼손됐다고 생각한 2030세대가 지지율 하락을 이끌었다. 영향력은 두고 봐야 문 전 대통령은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평산책방’ 계정에 올라오는 영상 중 ‘평산책방 TV’라는 코너에 고정 출연할 예정이다. 문 전 대통령이 내놓는 발언, 추천하는 책, 출연자 등이 하나하나 입방아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문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트로이 목마’가 될까, ‘서포터’가 될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