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하)

“한 기업이 정치적으로 희생됐다”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지금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국가서 만든 대형 증권사가 망하던 날, 피해자들의 삶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피폐해진 삶은 지금도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 투성이다. 멀쩡한 회사 산업증권은 도대체 왜 망했을까?

“산업증권은 정치적인 이유로 없어졌습니다.” <일요시사>가 만난 산업증권 피해자들은 이같이 이구동성 했다. 증권 순위는 높지 않았지만, 국가서 만든 증권사라 모두 망할 일이 없다고 믿었다. 산업증권은 산업은행이 초기 투자금 1500억원을 들여 만든 회사로, 직원 수가 한때 80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도 컸다. 도청 소재지 도시에 점포가 대략 10군데 정도 있었다. 당시 국제업무에 특화돼있어 해외서 자금조달이 상당히 유리했던 증권사다. 

빵빵했는데
하루아침에…

피해자들에 따르면 산업증권은 망할 회사가 전혀 아니었다. 국가서 만들어 내놓은 회사인 덕에 위세가 말 그대로 대단했다.

<일요시사>는 직접 산업증권 피해자 중 한 명인 김영수(가명)씨를 만났다. 지난 9일, 김씨를 잠실 소재의 한 카페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이날 김씨는 산업증권이 정말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삼성 직원이 거절당한다는 미국 비자를 산업증권은 단번에 받았다. 과거엔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대사관에 가서 면접을 보는 게 필수였고, 그나마 1년짜리가 나올까 말까 했다. 나는 당시 신혼여행을 위해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는데, 재직증명서 하나로 면접도 없이 10년짜리 비자가 단 3일 만에 발급됐다”고 말했다. 


1997년 11월 IMF가 터지면서 산업증권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가진 못했다. 첫 구조조정을 통해 약 400명 정도 인원이 정리해고됐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회사는 잘 굴러갔다.

하지만, 이듬해 7월25일 갑작스레 파산 발표가 나오면서 내부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산업증권의 파산은 증권시장의 침체와 대기업의 연쇄 부도, 과거 부실 요인의 노출 등으로 인한 경영난 봉착 때문이었다. 실제로 부채가 240억여원을 초과하면서 이를 변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산업증권 파산 사건은 알려져 있는 배경과 다른 부분이 존재했다. 2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다수의 관계자들이 사망했다. 이 중 의문이 드는 갑작스러운 사망도 포함됐다. 

2008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공성진 의원실서 파산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주도했으나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고, 누구 한 명 처벌받지도 않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회사가 갑자기 한순간에 공중분해 됐다. 근로자들은 한순간에 삶이 무너무너졌고, 여전히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다. 산업증권서 영업직을 담당하던 김씨는 회사가 사라지던 날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김씨는 명예퇴직을 하지 않고 버텼다. 지방서 근무하던 그는 자신의 근무지가 정리돼 서울로 발령받아 본사에서 일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사망자 다수 발생 
시장에 충격 주기 위한 케이스?

1차 구조조정 이후 괜찮아졌다고 안심하던 차에 일이 터졌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이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에 명찰을 단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김씨는 “점심시간이 끝난 뒤 회사로 돌아왔는데, 사무실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보안시스템도 전부 다 바꿔놨다.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산업증권은 오늘부터 없어지는 회사가 됐으니 책상으로부터 손을 떼라’고 했다”며 “금고를 비롯해 모든 걸 다 봉인하고 직원들은 밖으로 쫓아내 실랑이도 벌였는데, 경찰까지 출동했다. 그날이 회사 출근 마지막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입사 3년차 직원이었던 그는 서울로 발령받아 친구의 원룸에 얹혀 살았다. 신혼이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산업증권의 폐쇄가 결정됐다.

대구 집은 정리했고, 전세자금 대출 빚이 막막했던 김씨는 당장 돈이 없어 임신 중이던 아내는 처갓집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김씨가 산업증권을 퇴직하면서 받았던 돈은 위로금 및 3개월치 봉급인 800만원이었는데, 퇴직금은 없었다. 당시 대기업만큼 연봉이 높았지만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그대로 주저앉기에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가장인 김씨는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새로 창업한 회사에 들어갔다. 

그 회사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벤처기업 특성상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아 정리하게 됐고, 알음알음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아등바등 살았다. 여전히 김씨는 전세살이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주변 도움을 받아 살아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주변 사람을 만나면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학원, 과외 이야기를 한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아이가 학원을 가고 싶다고 하면 돈이 없다고 이야기하기가 참 비참했다. 배우자는 우스갯소리로 새 차를 타본 지가 몇 십년은 됐다고 하는데, 지금도 차가 퍼질 때까지 조이고, 기름을 쳐서 탄다”고 말했다. 

옛 직원들
찾아가니…

또 다른 피해자의 유족인 최금숙(가명)씨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씨의 집은 허름했고, 조만간 재개발이 시작돼 현재 거주 중인 곳을 떠나야 한다. 임플란트도 해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상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근근이 보험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다리도 아파서 오래 걷기도 힘들다는 그는 여전히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묵묵한 아들이었지만, 늘 가족을 챙기던 장남이라고 기억했다. 


최씨는 “산업증권 초기에 입사했던 아들이 거기서 결혼했으며, 생활비를 꾸준히 주는 등 평범한 가장으로 가정에 충실했다. 그러다 급작스레 회사가 사라졌다. 아들은 성격상 티를 잘 내지 않았는데 상당히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당시 남편이 사업하다가 부도도 났다. 집도 함께 무너졌다”고 황망해했다. 

가장의 무게를 많이 느꼈던 아들은 남편 입장에서도 아무 일이라도 당장 구해야 했다. 가구점, 대리운전, 막노동, 노점상까지 닥치지 않고 일을 했다. 

아들의 얼굴은 항상 어두웠고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가족과 부인을 챙기느라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다. 최씨는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던 현실이 개탄스러웠다고 한다. 그 사이 아들은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왔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던 아들에게는 생기가 없었다. 그나마 낚시가 마음을 위로해주던 유일한 취미였다. 10년 동안 힘든 삶을 살아오던 아들은 낚시를 하러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최씨는 “(아들이)어렸을 때부터 낚시를 좋아했다. 종종 낚시를 갔는데 큰 돈이 안 들고 속상한 것도 털어버리려고 다녀오곤 했다. 어느 날 며느리에게 ‘발을 헛디뎌 사고를 당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날따라 날씨가 좋지 않았다. 아들에게 느낌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렇게 사고를 당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너무 억울
풀어주세요”


이때부터 그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떠난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먹먹하다. 마음의 병은 깊어졌고, 몸도 쇠약해졌다. 몇 년 전에는 대장암을 진단받아 건강도 좋지 않다. 

최씨는 이 모든 원인이 산업증권이 갑자기 사라진 탓이라고 주장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겠다고 마음먹은 부부는 함께 아들을 대신해 싸웠다. 직접 집회에 참가해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며 거리로 나섰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몇 년 전 사망한 남편도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함께 싸웠으나 끝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최씨는 ‘아들이 힘들어했을 때 낚시 대신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등 많은 후회가 든다고 했다.

 그는 아들의 마음을 대변한 글을 한 자 한 자 담아 꾸깃꾸깃한 달력에 적어 <일요시사>에 건넸다. 

달력에는 “강제퇴직 이후 스트레스가 죽음의 원인이 됐습니다. 원통한 마음이 한이 됩니다. 나도 암수술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죽지 못해 삶을 영위할 정도입니다. 당시 나는 미쳤습니다.(중략) 산업증권이 해체되고 나니 아들은 너무 고통스러워 살아갈 의지를 잃었습니다.(중략) 지금도 억지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제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아들이 하늘나라서 편히 쉴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날 이후…막노동부터 대리까지 
“지금이라도 정부가 살펴봤으면”

최씨와 김씨는 산업증권이 사라진 이유에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은행이 국책은행이고 시장논리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정치 논리와 정권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여러 증권회사들이 존재했으며, 많이 어려웠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수의 증권사가 인수합병을 당하거나 매각되기도 했고, 자본잠식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문제는 산업증권이 결코 자본금이 작은 회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태생 자체가 산금채(금융채의 일종으로 기간산업 개발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한국산업은행서 발행하는 채권)로 유통되는 업체였다. 

김씨는 “산업증권은 IMF 이후에도 32개 증권사 중 25위 안쪽을 오가던 회사로, 메이저 회사를 제치고 생산능력이 8위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문제는 금융기관들이 증권사를 포기하기 싫어했다는 점이다. IMF가 터지면서 구조조정도 필요하고, 다른 것도 해야 하는데 대기업은 대부분 증권사를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기업이 금융사를 놓지 못하니까 맛보기로 산업증권을 없앤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며 “시장에 충격을 주기 위한 시범 케이스였다.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희생됐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다른 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는 구조조정 및 매각의 기조가 뚜렷했다. 김씨의 말을 빌리면 ‘개길 수 있으면 개겨봐라’는 신호였다.

IMF로 온 나라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금융시장에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국민들에게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단순히 ‘노조’가 꼴보기 싫어 고용 승계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산업증권 폐쇄를 반대하기 위한 집회를 노조서 단행했는데, 산업은행이 이를 상당히 불편해 했다는 것. 노조서 폐쇄 반대를 주장했지만 경영진에선 할 만큼 했으며 아쉬울 것도 없다는 이유로 쓸어버리라고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해당 사안으로 26년간 싸워온 국민의힘 이충현 강서구의원은 답답한 마음이다. 산업은행서 산업증권으로 옮겨 채권팀서 근무하며 산업증권의 시작부터 끝을 지켜봤던 이 의원은 피해자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웠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모은 자료를 토대로 민원을 넣었다. 

회사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자료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보따리 속에는 그동안 이 의원이 모아온 자료가 가득 들어 있었다. 긴 싸움을 이어오는 동안 이 의원은 다수의 협박도 받아 휴대전화 번호를 5번이나 바꿨다.

그는 자료를 토대로 어렵게 사는 피해자를 하나둘 모아 소송까지 진행했다. 이들에게 소송은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으나 산업증권의 파산이 정당했다고 판결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 역시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폐쇄 아닌 
매각했어야”

이 의원은 “폐쇄가 아니라 매각 시도가 먼저 이뤄졌어야 했다.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폐쇄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 사태와 관련해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피해는 오롯이 근무했던 이들이 떠안았는데, 어떤 식으로든 보상 절차가 있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침묵 속에 사는 게 늘 마음에 걸려 (여기에)인생을 바쳤다. 늦었지만 정부서 관심을 갖고 다시 한번 살펴봤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의 시간을 이제는 끝내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ckcjfdo@ilyso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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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