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하)

“한 기업이 정치적으로 희생됐다”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지금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국가서 만든 대형 증권사가 망하던 날, 피해자들의 삶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피폐해진 삶은 지금도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 투성이다. 멀쩡한 회사 산업증권은 도대체 왜 망했을까?

“산업증권은 정치적인 이유로 없어졌습니다.” <일요시사>가 만난 산업증권 피해자들은 이같이 이구동성 했다. 증권 순위는 높지 않았지만, 국가서 만든 증권사라 모두 망할 일이 없다고 믿었다. 산업증권은 산업은행이 초기 투자금 1500억원을 들여 만든 회사로, 직원 수가 한때 80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도 컸다. 도청 소재지 도시에 점포가 대략 10군데 정도 있었다. 당시 국제업무에 특화돼있어 해외서 자금조달이 상당히 유리했던 증권사다. 

빵빵했는데
하루아침에…

피해자들에 따르면 산업증권은 망할 회사가 전혀 아니었다. 국가서 만들어 내놓은 회사인 덕에 위세가 말 그대로 대단했다.

<일요시사>는 직접 산업증권 피해자 중 한 명인 김영수(가명)씨를 만났다. 지난 9일, 김씨를 잠실 소재의 한 카페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이날 김씨는 산업증권이 정말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삼성 직원이 거절당한다는 미국 비자를 산업증권은 단번에 받았다. 과거엔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대사관에 가서 면접을 보는 게 필수였고, 그나마 1년짜리가 나올까 말까 했다. 나는 당시 신혼여행을 위해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는데, 재직증명서 하나로 면접도 없이 10년짜리 비자가 단 3일 만에 발급됐다”고 말했다. 


1997년 11월 IMF가 터지면서 산업증권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가진 못했다. 첫 구조조정을 통해 약 400명 정도 인원이 정리해고됐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회사는 잘 굴러갔다.

하지만, 이듬해 7월25일 갑작스레 파산 발표가 나오면서 내부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산업증권의 파산은 증권시장의 침체와 대기업의 연쇄 부도, 과거 부실 요인의 노출 등으로 인한 경영난 봉착 때문이었다. 실제로 부채가 240억여원을 초과하면서 이를 변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산업증권 파산 사건은 알려져 있는 배경과 다른 부분이 존재했다. 2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다수의 관계자들이 사망했다. 이 중 의문이 드는 갑작스러운 사망도 포함됐다. 

2008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공성진 의원실서 파산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주도했으나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고, 누구 한 명 처벌받지도 않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회사가 갑자기 한순간에 공중분해 됐다. 근로자들은 한순간에 삶이 무너무너졌고, 여전히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다. 산업증권서 영업직을 담당하던 김씨는 회사가 사라지던 날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김씨는 명예퇴직을 하지 않고 버텼다. 지방서 근무하던 그는 자신의 근무지가 정리돼 서울로 발령받아 본사에서 일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사망자 다수 발생 
시장에 충격 주기 위한 케이스?

1차 구조조정 이후 괜찮아졌다고 안심하던 차에 일이 터졌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이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에 명찰을 단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김씨는 “점심시간이 끝난 뒤 회사로 돌아왔는데, 사무실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보안시스템도 전부 다 바꿔놨다.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산업증권은 오늘부터 없어지는 회사가 됐으니 책상으로부터 손을 떼라’고 했다”며 “금고를 비롯해 모든 걸 다 봉인하고 직원들은 밖으로 쫓아내 실랑이도 벌였는데, 경찰까지 출동했다. 그날이 회사 출근 마지막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입사 3년차 직원이었던 그는 서울로 발령받아 친구의 원룸에 얹혀 살았다. 신혼이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산업증권의 폐쇄가 결정됐다.

대구 집은 정리했고, 전세자금 대출 빚이 막막했던 김씨는 당장 돈이 없어 임신 중이던 아내는 처갓집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김씨가 산업증권을 퇴직하면서 받았던 돈은 위로금 및 3개월치 봉급인 800만원이었는데, 퇴직금은 없었다. 당시 대기업만큼 연봉이 높았지만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그대로 주저앉기에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가장인 김씨는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새로 창업한 회사에 들어갔다. 

그 회사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벤처기업 특성상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아 정리하게 됐고, 알음알음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아등바등 살았다. 여전히 김씨는 전세살이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주변 도움을 받아 살아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주변 사람을 만나면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학원, 과외 이야기를 한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아이가 학원을 가고 싶다고 하면 돈이 없다고 이야기하기가 참 비참했다. 배우자는 우스갯소리로 새 차를 타본 지가 몇 십년은 됐다고 하는데, 지금도 차가 퍼질 때까지 조이고, 기름을 쳐서 탄다”고 말했다. 

옛 직원들
찾아가니…

또 다른 피해자의 유족인 최금숙(가명)씨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씨의 집은 허름했고, 조만간 재개발이 시작돼 현재 거주 중인 곳을 떠나야 한다. 임플란트도 해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상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근근이 보험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다리도 아파서 오래 걷기도 힘들다는 그는 여전히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묵묵한 아들이었지만, 늘 가족을 챙기던 장남이라고 기억했다. 


최씨는 “산업증권 초기에 입사했던 아들이 거기서 결혼했으며, 생활비를 꾸준히 주는 등 평범한 가장으로 가정에 충실했다. 그러다 급작스레 회사가 사라졌다. 아들은 성격상 티를 잘 내지 않았는데 상당히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당시 남편이 사업하다가 부도도 났다. 집도 함께 무너졌다”고 황망해했다. 

가장의 무게를 많이 느꼈던 아들은 남편 입장에서도 아무 일이라도 당장 구해야 했다. 가구점, 대리운전, 막노동, 노점상까지 닥치지 않고 일을 했다. 

아들의 얼굴은 항상 어두웠고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가족과 부인을 챙기느라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다. 최씨는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던 현실이 개탄스러웠다고 한다. 그 사이 아들은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왔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던 아들에게는 생기가 없었다. 그나마 낚시가 마음을 위로해주던 유일한 취미였다. 10년 동안 힘든 삶을 살아오던 아들은 낚시를 하러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최씨는 “(아들이)어렸을 때부터 낚시를 좋아했다. 종종 낚시를 갔는데 큰 돈이 안 들고 속상한 것도 털어버리려고 다녀오곤 했다. 어느 날 며느리에게 ‘발을 헛디뎌 사고를 당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날따라 날씨가 좋지 않았다. 아들에게 느낌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렇게 사고를 당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너무 억울
풀어주세요”


이때부터 그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떠난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먹먹하다. 마음의 병은 깊어졌고, 몸도 쇠약해졌다. 몇 년 전에는 대장암을 진단받아 건강도 좋지 않다. 

최씨는 이 모든 원인이 산업증권이 갑자기 사라진 탓이라고 주장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겠다고 마음먹은 부부는 함께 아들을 대신해 싸웠다. 직접 집회에 참가해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며 거리로 나섰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몇 년 전 사망한 남편도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함께 싸웠으나 끝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최씨는 ‘아들이 힘들어했을 때 낚시 대신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등 많은 후회가 든다고 했다.

 그는 아들의 마음을 대변한 글을 한 자 한 자 담아 꾸깃꾸깃한 달력에 적어 <일요시사>에 건넸다. 

달력에는 “강제퇴직 이후 스트레스가 죽음의 원인이 됐습니다. 원통한 마음이 한이 됩니다. 나도 암수술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죽지 못해 삶을 영위할 정도입니다. 당시 나는 미쳤습니다.(중략) 산업증권이 해체되고 나니 아들은 너무 고통스러워 살아갈 의지를 잃었습니다.(중략) 지금도 억지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제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아들이 하늘나라서 편히 쉴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날 이후…막노동부터 대리까지 
“지금이라도 정부가 살펴봤으면”

최씨와 김씨는 산업증권이 사라진 이유에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은행이 국책은행이고 시장논리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정치 논리와 정권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여러 증권회사들이 존재했으며, 많이 어려웠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수의 증권사가 인수합병을 당하거나 매각되기도 했고, 자본잠식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문제는 산업증권이 결코 자본금이 작은 회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태생 자체가 산금채(금융채의 일종으로 기간산업 개발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한국산업은행서 발행하는 채권)로 유통되는 업체였다. 

김씨는 “산업증권은 IMF 이후에도 32개 증권사 중 25위 안쪽을 오가던 회사로, 메이저 회사를 제치고 생산능력이 8위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문제는 금융기관들이 증권사를 포기하기 싫어했다는 점이다. IMF가 터지면서 구조조정도 필요하고, 다른 것도 해야 하는데 대기업은 대부분 증권사를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기업이 금융사를 놓지 못하니까 맛보기로 산업증권을 없앤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며 “시장에 충격을 주기 위한 시범 케이스였다.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희생됐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다른 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는 구조조정 및 매각의 기조가 뚜렷했다. 김씨의 말을 빌리면 ‘개길 수 있으면 개겨봐라’는 신호였다.

IMF로 온 나라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금융시장에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국민들에게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단순히 ‘노조’가 꼴보기 싫어 고용 승계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산업증권 폐쇄를 반대하기 위한 집회를 노조서 단행했는데, 산업은행이 이를 상당히 불편해 했다는 것. 노조서 폐쇄 반대를 주장했지만 경영진에선 할 만큼 했으며 아쉬울 것도 없다는 이유로 쓸어버리라고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해당 사안으로 26년간 싸워온 국민의힘 이충현 강서구의원은 답답한 마음이다. 산업은행서 산업증권으로 옮겨 채권팀서 근무하며 산업증권의 시작부터 끝을 지켜봤던 이 의원은 피해자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웠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모은 자료를 토대로 민원을 넣었다. 

회사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자료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보따리 속에는 그동안 이 의원이 모아온 자료가 가득 들어 있었다. 긴 싸움을 이어오는 동안 이 의원은 다수의 협박도 받아 휴대전화 번호를 5번이나 바꿨다.

그는 자료를 토대로 어렵게 사는 피해자를 하나둘 모아 소송까지 진행했다. 이들에게 소송은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으나 산업증권의 파산이 정당했다고 판결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 역시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폐쇄 아닌 
매각했어야”

이 의원은 “폐쇄가 아니라 매각 시도가 먼저 이뤄졌어야 했다.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폐쇄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 사태와 관련해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피해는 오롯이 근무했던 이들이 떠안았는데, 어떤 식으로든 보상 절차가 있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침묵 속에 사는 게 늘 마음에 걸려 (여기에)인생을 바쳤다. 늦었지만 정부서 관심을 갖고 다시 한번 살펴봤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의 시간을 이제는 끝내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ckcjfdo@ilyso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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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10년 묵은’ 서불대 교수 학위 논란

[단독] ‘10년 묵은’ 서불대 교수 학위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전체 구성원이 200명도 안 되는 학교서 한 교수를 둘러싼 논쟁이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교수의 학사학위가 논란의 시발점이다. 임용 당시 서류에 기재한 내용을 두고 사실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고등교육법 제30조(대학원대학)에 따르면, 특정 분야의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대학원만 두는 대학, 이른바 대학원대학을 설립할 수 있다. 일반적인 종합대학과 달리 학사과정을 운영하지 않고 석·박사 과정만 두는 교육기관이다. 작은 학교 오랜 잡음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이하 서불대)도 그중 한 곳이다. 재단법인 불교안양원의 이사장인 덕해큰스님이 설립했다. 2002년 9월1일 개교한 서불대는 불교학과, 상담심리학과, 심신통합치유학과 등 3개 학과로 구성돼있으며 현재 석‧박사 학위과정 입학정원은 81명이다. 학교법인 보문학원서 운영을 총괄한다. 최근 서불대가 소속 교수의 학사학위 문제로 시끄러워졌다. 부교수인 정모씨의 학사학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두고 경찰 고발까지 진행되는 등 심각한 상황이 연출됐다. 문제는 정 교수의 학위 논란이 불거진 게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2월 서불대 관계자는 정 교수를 고발했다. 고발장에는 정 교수가 지원 당시 제출한 서류에 학력 부분을 허위로 기재하고 임용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고발인은 “학사학위도 없는 교수가 석‧박사를 지도하는 엉터리 같은 상황이 우리 대학원서 자행되고 있다”며 “사실 여부를 정확히 가려 일벌백계해달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2005년 9월1일 서불대 전임강사로 신규 임용됐다. 2007년 9월1일 조교수로 승진, 2015년 3월1일 부교수가 된 이후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쟁점이 된 부분은 정 교수가 2005년 7월 서불대 전임강사 임용 과정서 제출한 ‘신원진술서’와 ‘교수초빙 지원서’의 학력란이다. 정 교수는 학사 부분에 학교명 ‘Buddhist and Pali University’(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교), 학과명 ‘Buddhist Social Philosophy’, 전공 ‘Buddhist Social Philosophy’라고 기재했다. 수학 기간은 1992년 3월부터 1997년 2월로 1997년 1월1일에 문학학사학위를 취득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정 교수가 함께 제출한 ‘신원진술서’에 1994년 6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군대에 다녀왔다고 적은 부분이다. 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서 공부한 기간과 군 복무 기간이 겹치는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정 교수는 1997년 1월에 스리랑카로 출국, 같은 해 3월에 입국했다. 2015년 첫 문제 제기 2021, 2022년, 올해도 기록의 모순점이 알려지면서 정 교수의 학사 학위를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서불대 학위검증위원회는 2014년 1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정 교수의 학사학위를 검토했다. 그리고 정 교수의 학사학위에 하자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 교수는 당시 소명서에 학사과정을 적은 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교가 아닌 한국분교서 군 복무 기간에 진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심지어 한국분교인 ‘한국불교대학’은 당시 교육부 미인가 대학이었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보문학원 이사회의 처분이다. 보문학원은 2015년 9월2일 개최한 이사회서 정 교수의 임용 과정 중 면접위원이었던 이모 교수와 김모 교수를 중징계 조치했다. 정 교수가 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교의 한국분교서 학사과정을 한 사실을 인지했지만 이를 이사회에 보고하지 않아 보문학원과 서불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퇴직 상태였기 때문에 ‘퇴직 불문’ 처리됐다. 근무 중 문제가 발생했지만 징계 절차 전에 퇴직해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서불대에는 기관경고 처분을 하면서도 정 교수에는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징계처분을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정 교수의 학위 논란에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이다. 일단락되는 듯했던 학위 논란은 지난 2021년 재차 불거졌다. 이번에 문제된 부분은 성적증명서였다. 한국불교대학서 정 교수가 학부 과정을 진행했다는 시기와 인접한 때에 발부한 성적증명서와 그가 제출한 문서가 다르다는 새로운 의혹이 드러난 것이다. 실제 정 교수가 제출한 서류는 성적증명서가 아닌 졸업시험성적표로 확인됐다. 서불대는 ‘계약제 교수 업적평가 규정’에 따라 계약제로 임용된 교수의 계약기간을 1~3년으로 정하고 있다. 정년보장 교수(정교수) 승진 전까지 1~3년 단위로 재계약을 진행하는 것이다. 교원인사위원회가 영역별로 평가한 뒤 임용 혹은 면직을 제청하면 법인서 이를 승인하는 방식이다. 정 교수는 당시 일정 기간 단위로 계약을 새로 체결해야 하는 부교수 신분이었다. 6년 만에 바뀐 결론 서불대는 2021년 6월21일 열린 교원인사위원회서 정 교수의 부교수 임용 심의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정 교수가 임용 서류에 학사학위 관련 허위 사실을 기재한 것이 면직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는 법률 자문 결과를 들어 면직을 제청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립학교법 제58조(면직의 사유)는 ▲인사기록에 있어 부정한 채점‧기재를 하거나 거짓 증명 또는 진술을 했을 때 ▲거짓이나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임용됐을 때 등의 이유로 해당 교원의 임용권자는 그 교원을 면직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변호사는 정 교수가 교원으로 임용될 당시 제출한 지원서에 허위 사실을 기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면직 사유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자문했다. 그러면서 교원인사위원회서 심의하고 교원징계위원회의 동의가 이뤄지면 정 교수를 면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서불대 교원인사위원회는 정 교수의 면직을 보문학원에 제청했다. 이후 보문학원은 서불대 교원징계위원회에 정 교수에 대한 면직 동의를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보문학원이 기재한 징계 사유는 “(정 교수가) 임용 지원 당시 교원임용지원서에 ‘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 한국분교 한국불교대학’으로 표기했어야 하는 것을 당시 면접위원들과 논의해 ‘한국분교 한국불교대학’을 제외하고 ‘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교’만으로 표기했다”는 것이었다. 정 교수는 “2015년 학위검증위원회서 ‘문제 없음’, 이사회서 ‘불문 처리’됐다며 항변했지만 결국 면직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2015년과 2021년 두 차례 걸친 검증 과정서 서불대와 보문학원 이사회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는 점이다. 서불대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2015년에 진행된 학위 검증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판단은 또 달랐다. 보복이냐 허위냐 정 교수는 면직된 이후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면직 처분 취소 청구’를 제기했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정 교수의 면직 처분이 위법하다며 취소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정 교수는 ▲2014~2015년 학위 검증 ▲사학비리 신고에 대한 보복성 조치 ▲면직 사유 부존재 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2021년 1월경 서불대 전 총장 황모씨 등 일부 인사의 입시 및 학위 수여 부정, 다국어교육원 운영과 관련한 횡령 혐의 등을 교육부에 감사 요청한 것을 두고 그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면직 처분을 진행했다는 설명이다. 또 학사학위를 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교서 받은 사실과 수학한 곳이 해당 학교의 한국분교라는 사실은 서로 다른 범주라고 강조했다. 공부한 곳을 지원서에 적지 않았다고 해서 학사학위를 받은 자체가 허위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2014~2015년에 이뤄진 학위 검증에 대해 언급했다. 서불대가 요청한 학부‧석사 성적, 재학증명서에 대해 스리랑카 국립 팔리불교대학교가 서류를 보낸 점, 당시 면접위원이었던 김모 교수의 확인서 등을 근거로 삼았다. 김 교수는 “학사 및 석사학위에 하자가 없음을 확인했다”고 진술했다. 또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학위검증위원회의 판단 자체도 문제가 없다고 봤다. 반면 문제를 제기한 쪽은 정 교수가 신규 임용 재계약 과정서 제출해야 할 서류를 내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서불대 규정에 따라 진행하는 재임용 과정서 정 교수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서불대 관계자는 “사립대학 교원의 임용권은 학교법인이나 학교의 장에게 있다는 교육부의 유권해석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서불대 교원의 신규 임용 후보자는 규정에 따라 14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대학 졸업증명서 및 성적증명서 ▲석·박사 학위증명서·성적증명서 및 학위기 사본 ▲경력증명서 등이다. 서불대 관계자는 “정 교수는 학사(대학)학위 관련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200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학사 성적증명서를 누락했다”고 주장했다. 학내 결정, 외부 기관 뒤집혀 면직→복직, 재임용 1년→3년 2022년 또다시 학위검증위원회와 교원인사위원회가 잇따라 개최됐다. 정 교수를 포함한 교수 3명의 재임용을 논의하는 과정서 학위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반영됐다. 학위검증위원회는 정 교수의 학사학위에 대해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2015년 학위검증위원회가 잘못 심의한 부분과 2015년 이후 추가로 밝혀진 부분을 참고해 재검증한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불대 교원인사위원회는 학위검증위원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정 교수에 ‘재임용 불가’를 의결했다. 보문학원은 단서 조항을 달아 ‘조건부 1년 재임용’으로 결론내렸다. 하지만 정 교수가 법인의 결정에 반발해 국민권익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안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민권익위원회가 1년 조건부 재임용 계약을 취소하고 3년 재임용 계약을 체결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정 교수는 서불대의 교직원 부당 채용 의혹 등을 신고한 뒤 재임용 계약기간 단축 등 불이익 조치를 받았다며 ‘신분보장등조치’를 신청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정 교수의 신고가 없었더라도 동일한 내용의 불이익 조치를 받았을 만한 정당한 사정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정 교수가 2021년 2~3월에 신고한 교직원 채용 관련 문제에 대해 교육부가 징계 조치 등을 요구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보문학원은 정 교수와 3년 재임용 계약을 맺었다. 강의 배정, 논문지도 교수 위촉 등 국민권익위원회의 주문 사항도 처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월에 이뤄진 경찰 고발사건 역시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해 불송치됐다. 경찰은 정 교수의 업무방해 혐의에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를 들었다. 업무방해 혐의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서류 누락 진실은? 서불대 관계자는 현재 상황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정 교수는 ‘교원의 자격’ ‘신규 임용자의 제출서류’ 등 학교 규정을 무시한 채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며 “학사학위와 관련한 서류를 내면 모든 게 마무리되는데 2005년 신규 임용 때부터 1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걸 못 내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학교나 법인 차원서 처리하지 못하는 게 답답하다”고 한탄했다. 정 교수의 입장을 듣기 위해 질의서를 보내고 통화를 시도했다. 정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학교법인 보문학원에도 질의서를 보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