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으로 튄 흉악범 6인 추적> <단독> 검거된 ‘도박왕 조삼’ 사라진 1조3000억 추적

입수한 공소장 보니 “돈이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필리핀 도박왕’ 김모씨가 송환된 지 6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9월 구속 기소됐으나 아직 선고기일이 잡히지 않았다. 범죄조직단체 및 도박 혐의를 받는 만큼 중형이 선고돼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다. 부당이득을 환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금액만 약 1조3000억원이다.

‘필리핀 도박왕’ 김모씨는 2년간 국내 송환을 피해 1조3000억원대 도박 수익을 냈다. 그의 별명이 ‘조삼’이라고 불린 이유다. 사정당국은 이 금액을 환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사 과정서 포착하지 못한 차명계좌의 존재가 걸림돌이다. 당국은 사실혼 관계로 추정되는 그의 두 번째 아내가 핵심 ‘키맨’이라고 보고 있다.

역대급
불법 수익

김씨의 도박사이트 운영은 2014년 10월부터 이뤄졌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2019년 9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김씨가 필리핀서 사무실을 마련하고 불법 온라인 도박사이트를 운영한다는 결정적인 첩보를 입수했다.

경찰은 관련 첩보 자료를 국정원과 함께 분석한 뒤 김씨를 포함해 22명에 대한 국제형사경찰기구(이하 인터폴) 적색수배를 발부받고, 국정원·필리핀 수사당국과 2년간 이들의 행방을 쫓았다.

검거 당시 김씨는 최고급 리조트에 거주하며 마이바흐 등 고가 외제차량 10대를 타는 초호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소 무장 경호원들도 대동하고 있어 붙잡기도 쉽지 않았다.


지난 2021년 9월18일, 경찰과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담당관, 필리핀 이민청 도피사범 추적팀 FSU, 현지 경찰특공대 등 30여명으로 꾸려진 검거팀은 김씨의 거주지를 급습해 그의 신병을 확보했다. 그러나 필리핀 형사사법체계를 잘 아는 그는 현지서 형사사건에 엮이면 재판 종결 전까지는 한국으로 추방되지 않는다는 꼼수를 이용했다.

타인에게 자신을 사기와 특수협박 혐의로 2차례나 고소하게 한 것이다.

국내 송환이 계속 미뤄지자, 경찰은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을 통해 필리핀 법무부에 조기 송환 협조를 요청했다. 경찰은 지난해 7월부터 필리핀 법무부와 매주 실무회의를 열었고, 양국 간 공조로 필리핀 법무부의 추방 결정을 끌어냈다.

그는 막판까지 국내 송환을 늦추려고 발버둥 쳤다. 추방 결정이 난 뒤에도 다시 제3자로 하여금 자신을 위조수표 사용 등 조세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게 한 것이다. 필리핀 법무부가 추방 결정을 번복하자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이상화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는 송환 협조를 재차 강력하게 요청했다.

결국 필리핀 법무부가 이 대사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그의 시도는 불발됐다.

결론적으로 경찰은 김씨와 2020년부터 필리핀에 체류 중이던 조직원 20명 중 16명을 국내로 송환했다. 서울청 마약범죄수사대는 국내 조직원 177명 중 166명을 검거해 사실상 범죄조직을 와해시켰다. 김씨는 지난해 8월 말 송환돼 구속 기소된 것으로 확인됐다.

필리핀 도주 후 200여명 규모 범죄조직 꾸려
체포 2년 만 국내 송환…지난해 9월부터 재판


<일요시사>가 입수한 김씨의 공소장에 따르면, 그는 ▲범죄단체조직·활동 ▲도박 공간개설 및 국민체육진흥법 위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김씨 조직 사이트의 서버는 서울과 일본, 홍콩 등에 있었다. 2017년 2월 필리핀 마닐라로 도주한 김씨는 마카티에 있는 한 호텔 카지노서 진행되는 바카라 등의 도박을 생중계해 이용자들로부터 게임의 결과에 돈을 결제하게 하는 사설 스포츠 토토 도박사이트를 만들었다.

이용자에게 재산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와의 거래가 시작된 것이다.

그의 조직은 철저했다. 마닐라에 오자마자 2020년 5월까지 모집된 200여명의 조직원들을 총괄 관리하면서 ▲스포츠토토팀 ▲바카라팀 ▲사이트관리팀 ▲지원팀으로 나눠 팀장과 팀원까지 정했다.

스포츠토토팀은 사이트관리팀이 제작한 카바라 사이트의 이용자들이 도금을 배팅하는 것을 모니터링하면서 지정된 계좌의 대포통장으로 도금이 입금되는 것을 확인하고 게임머니를 충전해 줬다. 특히 총판 모집 및 지원팀의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홍보 문자메시지를 발송하고 인터넷 전화로 연락을 시도했다.

사이트관리팀인 CS팀은 도박사이트 제작과 관리에 집중했다. 팀장들은 팀원들의 업무에 따른 수익을 정산해 총책인 김씨와 이사에게 보고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 팀원들에게 전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 특히 김씨가 텔레그램을 통해 업무지시가 이뤄지면 조직원들이 서로를 본명이 아닌 명칭으로 부르게 해 수사기관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했다.

변호사 교체
시간 끌기?

지원팀은 CS팀의 백업 역할을 담당했다. 지원팀은 개인정보 판매업자로부터 구입한 불특정 인물들의 핸드폰 번호 중 신규회원으로의 유치가 가능하거나 관리가 필요한 회원들의 정보를 엑셀 파일로 정리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해 다른 팀이 해당 데이터로 회원을 모집하고 관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같은 방법으로 김씨의 조직은 150개가 넘는 계좌로 약 150만회에 걸쳐 도박사이트 이용자들로부터 1조3000억원이 넘는 돈을 입금받아 약 40억원을 취득했다. 사이트가 2021년까지 운영됐던 점을 고려하면 김씨가 굴린 판돈 전체 규모는 2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취득한 범죄수익에 관한 취득이나 처분을 은닉하기 위해 타 명의의 가상자산 거래 계정을 이용하기도 했다. 일부 수익금으로 가상화폐를 매수하고 거래소 거래를 통해 매도해 현금화한 이후 천안 시내에 위치한 한 토지를 매수하려 했다.

김씨의 조직이 소탕됐으나 아직 해결돼야 하는 문제는 산더미다. 1조원이 넘는 부당이익금을 환수하고 재판이 원활하게 진행돼야 한다. 그러나 김씨가 재판에 넘겨진 지 6개월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 1심 선고기일조차 잡히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김씨의 공소장이 접수된 건 지난해 9월20일이다. 김씨는 이때부터 ‘시간 끌기’ 전략을 썼다. 그가 처음 선임한 법무법인은 공소장이 접수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사임했다. 개인 변호사는 공판기일 연기를 신청했다.


그다음에 선임했던 대형 로펌은 선임계를 중앙지법에 제출한 다음 날, 사임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부장검사,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들을 선임해 이른바 전관 혜택을 노리는 모양새다.

한 서초동 변호사는 “재판 절차를 미루기 위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며 “6개월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공판이 다섯차례도 진행되지 않은 건 피고인이 재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거나 불구속 구사를 받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고 봤다.

차명계좌
운영 의혹

수사기관 안팎에서는 김씨의 혐의를 두고 사기도박 혐의가 추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건 내용에 밝은 한 수사관은 “수년간 이뤄진 조직적인 범죄고 수사 과정서 김씨가 보이스피싱을 주도했다는 정황도 여러번 포착된 바 있다”며 “검찰의 추가 기소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다른 수사관도 “1조3000억원대 부당이익은 역대급 범죄라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 상황으로는 중형이 선고되기 어렵지 않나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추가 기소가 이뤄지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민경철 법무법인 동광 대표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이용자를 기망한 행위를 입증해야 한다. 승률을 조작했다거나 이용자들을 속였다는 근거가 필요하다. 단순히 인터넷상에 도박장을 개설하거나 상대방과 도박하는 구조를 만들고 수수료 형식으로만 수익을 냈다면 사기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남부지검의 한 검사도 “차후 공소장 변경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검찰서 신중하게 기소했을 것”이라며 “피고인이 전관을 썼다고 해도 재판부서 솜방망이 처벌을 하기에는 어려운 사례”라고 말했다.

윤석열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검찰은 ‘범죄수익환수’에도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대검찰청은 일선 검찰청에 도박사이트 운영 및 자금세탁 조직원의 재산을 철저히 추적해 몰수·추징보전 조치하고, 실물 재산도 압수해 범죄수익을 완전히 박탈하도록 지시했다.

그동안 도박사이트 운영자들은 도박 개장 혐의로 기소됐으나 형량이 높지 않아 ‘몇 년 징역 살고 나오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만약 조세포탈죄로 기소하면 포탈세액이 10억원 이상인 경우 무기 또는 징역 5년 이상 선고가 가능하고, 포탈세액의 2~5배 상당의 벌금도 필요적으로 병과할 수 있어 실질적인 범죄수익환수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의 범죄수익환수 대응팀에는 법무부, 교육부, 문체부, 복지부, 여가부, 방통위, 대검찰청, 경찰청,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포함) 등 9개 부처가 참여하고 있다.

부당이득금 환수 불가
“사막서 바늘 찾는 격”

그러나 국내의 미납 세금은 역대 최대로 쌓여있는 체납액만 100조원이 넘는다. 이 중에서도 80% 이상은 사실상 못 받을 가능성이 큰 세금으로 분류돼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누계체납액은 102조5000억원에 달했다. 이 중 징수 가능성이 큰 정리 중 체납액은 전체의 15.2%인 15조6000억원에 그쳤다. 못 받을 가능성이 큰 정리보류 체납액은 86조9000억원이다. 범죄수익의 경우 전체 추징액 대비 환수로 이어지는 금액이 1%에도 못 미친다.

동년 기준 유죄판결이 확정됐지만 거둬들이지 못한 추징액 규모는 31조4000억원에 달한다. 미납 세금처럼 징수할 방법이 제한적인 데다, 현행법상 추징금은 벌금과 달리 노역장 유치 집행과 같은 방법으로 납부를 압박할 수도 없다.

김씨 사건의 경우 돈의 흐름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조직원들을 통해 은닉하거나 벌어들인 수익 일부를 필리핀 길거리 환전소서 대량으로 바꿔치는 방법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코인 거래소도 추적이 어려운데 수십서 수백만원을 환전소서 현금화한다면 추적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김씨가 은닉한 금액을 추적할 순 있어도 이미 현금화된 돈은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사정당국은 김씨의 두 번째 아내로 추정되는 A씨가 김씨의 수익 일부를 차명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조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대포통장으로 관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필리핀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조사 중”이라며 “범죄수익환수를 담당하는 수사관들이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A씨가 관리하는 금액의 규모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다. 당국 안팎에서는 수천억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있으나 현재까지 첩보일 뿐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진 못했다.

부자가 아니었던 A씨는 김씨를 만난 이후 생활고에 시달린 적이 없다. 마땅한 직업이 없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다. A씨는 현재 마닐라 지역 중 ‘필리핀의 청담동’으로 꼽히는 곳에 거주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그의 자식은 일반인이 다닐 수 없는 국제학교를 다니며 호화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세컨드가
핵심 키맨?

대검 관계자는 “마약 수사와 더불어 범죄수익환수도 지난해부터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문제다. 지금까지 검찰이 환수한 범죄수익환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검찰은 김씨 사건과 관련해 타 기관 조사관들과 현지에 상주하며 들여다보고 있다. 아직 조사가 이뤄지고 있기에 자세한 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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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