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울리는' 근생빌라 잔혹사 

눈 뜨고 코 베이는 ‘불량 주택’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근생빌라는 사무실이나 상가 등의 근린생활시설을 주택으로 불법 개조한 건축물을 말한다. 애초에 주택으로 지어진 게 아니라 각종 생활 여건이 부족한 ‘불량 주택’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따른 관련 규제가 날로 강화되고 있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수는 계속 늘어나는 실정이다. 가진 자 배 불리고, 덜 가진 자 울리는 근생빌라에 얽힌 기막힌 사연들을 톺아봤다. 

이른바 ‘가진 자’들 입장에서 근생빌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부동산 매물이다. 일반주택과 외관상·등기상으로는 구분이 어려우면서도 각종 규제는 적어 개발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건축주들은 주택 대신 근린생활시설(이하 근생)로 허가받아 층수·주차장 등의 제한을 비껴간다. 다가구주택은 3층 이하, 다세대주택·연립주택은 4층 이하로 층수 제한이 걸려있는 것에 반해 근생은 딱히 제한이 없다.

몰래 건축
폭탄 돌리기

주차장 면적도 줄일 수 있다. 서울시 부설주차장 설치 기준에 따르면 다가구주택 및 공동주택은 면적 기준에 따라 가구당 0.5대 이상의 주차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근생은 시설 면적 134㎡당 1대의 주차공간만 설치하면 된다. 면적에 따라 필요 주차공간을 2~3배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근생 기준에 맞춰 지은 건물에 몰래 취사시설만 달아주면 쉽게 근생빌라를 만들 수 있다. 주택으로 등록돼있지 않아도 신청만 하면 가정용 가스와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일반주택을 근생으로 자진 변경하는 일도 빈번하다. 정부의 다주택자 규제 강화에 주택 보유 부담이 커진 것이 주된 원인이다.


정부는 2020년 ‘7·10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다주택자의 주택 취득세와 양도세 부담을 키우는 내용이 핵심이다. 종합부동산세(종부세)까지 강화되면서 시장에서는 다주택 매입을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결국 ‘잔금 전 근생 용도변경’이라는 꼼수가 등장했다. 매도인은 1가구 1주택 양도세 비과세 혜택을 받으려면 주택으로 매각해야 하고, 매수인은 근생으로 취득해야 취득세 중과를 모면할 수 있어서다.

주로 매수자가 용도변경 약정 특약을 걸고 계약하는 수법이 활용된다. 매수인으로서는 대출 규제와 종부세 부담 등도 줄일 수 있다.

근생빌라는 종부세와 주택 대출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이 용도변경 주요 대상이다. 이들은 주로 단일 소유 형태여서 용도변경 허가를 위한 개조 절차가 비교적 간단하다. 다세대주택도 용도변경이 가능하지만 모든 소유주의 동의가 전제 조건이라 과정이 복잡해진다.

실제로 2020년에 단독주택 용도변경이 급증한 부분이 눈에 띈다. 국토교통부 건축행정시스템 ‘세움터’ 기록에 따르면 2020년 단독주택 용도변경 건수는 1만272건이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6000~7000건(5년 평균 6754건)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근생 용도변경도 7186건을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서울시 근생·다가구주택 용도변경 인허가 증가세도 가파르다. 세움터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 25개 자치구 중 금천구·도봉구를 제외한 23개 구에서 용도변경 사례가 증가했다.

특히 마포구(133.2%)·강동구(115.4%)·동작구(109%)·성동구(105%)·관악구(100.5%) 등은 용도변경 건수가 2배 이상 늘었다. 부동산업계에서는 이전 대비 증가분 대다수가 다주택 보유 회피에 활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건축법은 근생의 용도를 소매점·헬스장·병원·카페 등 상가와 생활편의시설로 한정해놨다. 근생빌라가 온전한 ‘주택’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다. 용도변경 역시 어렵다. 근생보다 주택 건축 조건이 더 까다롭기 때문이다. 구조상 문제로 소방법 등 기타 규제에 발목잡힐 가능성도 크다. 

알고도 짓고 사고…규제 회피 꼼수
모르고 샀다간 이행강제금 ‘날벼락’

결국 근생빌라는 일종의 주택이 아니라, 용도가 허위 신고된 불법 개조 건축물일 뿐이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보니 지자체에 적발되면 ‘이행강제금’ 등의 불이익이 뒤따른다. 지자체는 불법 개조된 건축물을 원상복구할 때까지 최대 1000만원에 달하는 이행강제금을 연 2회 부과한다.

근생빌라의 경우 도시가스·보일러·싱크대 등을 모두 철거해야 원상복구가 인정된다. 

하지만 그 실효성은 미지수다. 적발률과 원상복구 비율이 턱없이 낮은 탓이다. 아직도 소유주들 사이에서는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만연하다. 

서울시는 지난해 근생빌라 877곳을 적발해 이행강제금 62억700만원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날로 치솟는 근생빌라 증가세에 비하면 부족한 수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도는 지난 2년간 근생빌라 800여곳을 적발했다. 각 시·군은 건물주에게 시정명령(원상복구)을 내렸지만, 이를 이행한 곳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83곳뿐인 것으로 파악됐다.

“잡아 놓은 토끼도 제대로 못 몬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지자체들은 근생빌라 단속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토로한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단속 인력이나 시간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며 “현재 적발 사례 중 상당수는 주차시설 부족·화재 안전점검 등의 다른 민원을 처리하다 얼떨결에 이뤄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단속도 한계가 명확하다”며 “단속철이 끝나면 철거한 취사시설들을 다시 설치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그런 경우를 일일이 잡아낼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불법은 네가
피해는 내가

근생빌라는 계속 늘어나는 반면, 단속은 지지부진하게 이뤄지다 보니 부작용은 애먼 사람들을 향한다. 해당 건물이 근생빌라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선의의 매입자·세입자들이 근생빌라에 가해지는 각종 규제와 피해를 떠안고 있다.


피해자들은 근생빌라라는 생소한 개념과 소유자들의 의도적 속임수가 피해를 키웠다고 입을 모은다.

인천에 사는 정모씨(35·여)가 신혼집을 매입한 것은 지난 7년 전. 정씨는 거주 5년째가 돼서야 이 집이 근생빌라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씨는 “2년 전 구청에서 날아온 공문을 통해 이 집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며 “집을 구할 때부터 공문을 받을 때까지 공인중개사·분양사무소 등 그 누구도 이 집이 근생빌라라고 말해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정씨의 집이 위치한 건물은 총 8층이다. 정씨 부부는 7층 집을 눈여겨봤지만, 결국 4층에 입주했다. 분양사무소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설득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건물의 1층부터 4층까지는 근생, 5층부터 8층까지는 다세대주택 용도로 허가가 떨어졌다.

정씨는 “분양사무소가 4층 입주를 줄기차게 권유했다”며 “자기들이 각종 부대비용과 세금들을 부담해주겠다고 나섰다”고 말했다.

당시 분양사무소가 실제로 세금을 대신 내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근생빌라는 양도세·취득세 중과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씨는 분양사무소가 원래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을 대신 내주겠다고 속이면서 근생빌라 매입을 유도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정씨가 입주한 지 5년이 지나서야 불법 개조를 인지한 구청은 건축주와 분양사무소 대신 정씨에게 이행강제금 납부를 명령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선의의 피해자임을 입증하자, 이행강제금 납부는 잠정 중단됐다. 그래도 정씨는 여전히 가슴을 졸이는 중이다. 언제 납부 명령이 다시 떨어질지 몰라서다.


정씨는 발이 묶였다. 이사를 계획하고 집을 내놓으려 했지만 받아주는 부동산이 없다. 정씨가 매입할 때와는 다르게 등기부등본에 불법 개조된 상태라는 의미의 ‘빨간 줄’이 그어진 게 문제였다. 정씨는 졸지에 집을 팔려다 상가를 팔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도와준다며…
함흥차사

근생 용도로 재수선해 ‘불법’ 딱지를 떼는 것 역시 고스란히 정씨 몫이 됐다. 

이외에도 근생빌라 거주자들은 갖은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 취약한 안전장치와 부족한 생활시설은 기본, 1금융권에서는 주택 대출을 받을 수 없다. 세입자들은 전세금보증보험에 들 수 없어서 보증금을 위협받는다. 하다 못해 월세 세액 공제마저도 신청할 수 없다. 근생빌라는 법적으로 주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씨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이런 일을 겪기 전에는 근생빌라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등본을 확인했을 때도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며 “우리는 속은 죄밖에 없는데,(근생빌라) 지은 사람·속인 사람 제쳐놓고 왜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억울해했다.

정씨 말대로 등기부등본만 보고는 근생빌라와 일반주택을 구별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건축부대장에 기재된 용도나 세금 납부내역 등을 꼼꼼히 확인해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알고도 당한 사람’은 많이 없다는 것.

피해자는 대부분 정씨처럼 이행강제금 납부 공문을 받는 순간 근생빌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다.

근생빌라 피해가 속출하면서 한때 정치권에서도 구제 필요성이 논의됐다. 국회에서 구제 방안을 마련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해가 두 번이나 바뀐 지금, 아직 달라진 것은 없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는 특정건축물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8건 올라왔다. 그중 근생빌라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법안은 더불어민주당 윤영찬 의원과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2건이다.

두 법안 모두 근생빌라 등 불법 건축물을 떠안은 선의의 피해자들을 구제하고자 1년간 한시적으로 용도변경을 허용해주는 내용이 골자다.

여야 의견도 맞아떨어졌다. 피해자들은 법안 처리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 기대했다. 의외의 복병은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였다. 국토부가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법안 처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등기 봐도 구분 못해
적발되면 ‘빨간줄’

현재 두 법안은 소관위원회에 접수만 된 상태다. 국토교통위원장실에 법안 처리 계획에 대해 문의해봤더니 “정해진 것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토부는 피해자들의 반대 의견 철회 요구에 난색을 보였다. 국토부 관계자는 “법안 제·개정은 입법부의 고유 권한이므로, 이쪽에서 구체적 시행 일정이나 가부 여부 등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도 “해당 법안에 우려를 표명한 것은 형평성·주거 안전 등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라고 전했다.

그는 “다른 불법 개조 유형들은 그대로 금지하면서 근생빌라만 양성화한다면 형평성 문제가 대두될 것”이라며 “다른 불법 개조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도 많다. 간단히 여길 문제가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이 관계자는 “근생빌라는 애초에 주거 목적으로 지은 건축물이 아니라서 주거 여건이 비교적 열악하고, 화재에 취약한 경향을 보인다”며 “섣불리 양성화했다가 불량 주택들이 국민의 삶을 위협하는 것을 국가가 방관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구제가 미진하다’는 비판에는 “현재 관계 법률·법령에 근거해 구제안을 마련 중”이라며 “선의의 피해자와 악용자를 구분해 이행강제금을 가중·감경하는 조처를 내린 상태”라고 답했다.

이 같은 국토부 해명에 피해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오히려 근생빌라 피해자가 차별받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국토부는 선의의 피해자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지난해 7월부로 생활형 숙박시설의 주택 용도변경을 허용했다. 반면 근생빌라에 양성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피해자들은 국토부가 근생빌라에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고 비판한다.

지자체도, 정부도 지켜주지 못한 집. 피해자들은 그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간다. 네이버 카페 ‘다세대 근생빌라 피해자 모임’에서는 400명이 넘는 피해자가 모여들었다. 이들은 민원 제기·탄원서 제출 등 단체행동을 지속하고 있다. 우연히 카페지기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우리는 그저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온전히 살고 싶을 뿐”이라며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이 근생빌라로 이런저런 일을 벌이고 다닌다는 사실은 들었다. 잘못된 일이다.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외로운 싸움
포기 못한다

이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이 평생을 열심히 노력해 집 한 채 겨우 마련한 서민들”이라며 “불법 제품을 유통시키면 제조자가 처벌받는다. 우리가 아니라 불법 건축자들을 처벌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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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