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잇 노리는' 최음제 변천사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10.14 00:00:00
  • 호수 13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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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줄 놓게 하는 유혹의 한 방울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여성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음료수를 받아 먹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음료수나 술에 몰래 최음제를 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범죄에 악용되는 ‘최음제’에 대해 알아봤다. 

지난달 3일, 고양시 소재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나이트클럽에서 돼지발정제를 탄 술을 마실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등 부적절한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나이트클럽에서 이뤄지는 남녀 간 교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돼지발정제’와 ‘마약’을 거론한 것이다.

보내는
‘칵테일’

지난해 7월에는 고등학교 1학년 남녀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시간에 나이트클럽에서 이뤄지는 부킹에 대해 설명했다. 또 나이트클럽에서 여성이 조심해야 할 점을 언급하면서 “클럽에서 술에다가 돼지발정제를 타는 애들이 있다”며 “얘(돼지)들이 (발정제를) 맞으면 맞은 순간부터 막 서로 하려고 붙어서 난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효과가 있을까 없을까? 그거 타서 먹고 난 다음에 여자애들이 더 뭐랄까? 정신을 놓게 되는 경우가 있다”며 “그 사람들이 다 데리고 나가서 다시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따라주는 술 아무나 함부로 막 먹으면 안 돼”라고 발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엔 돼지발정제를 성범죄에 악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개그맨 노홍철씨 역시 돼지발정제를 섞은 소위 ‘칵테일’을 만들어 여자친구에게 주려 했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논란이 일자 노씨는 “화끈한 술자리 얘기를 해달라는 친한 기자의 얘기를 듣고 농담 분위기로 한 말”이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남성이 여성을 흥분시켜 성적욕구를 풀기 위해 돼지발정제를 최음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는 최음제 역사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대 초반부터 마약의 일종인 ‘엑스터시’를 최음제로 복용하는 연예인이 존재했다. 이들은 마약 복용으로 검거된 뒤 “마약이 아니라 최음제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이때부터 대중에게 최음제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서 관심이 증폭돼 판매상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돼지발정제 옛말 GHB 등 종류 많아져
제조법? 데이트 강간 등 성범죄에 악용

노점상이나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판매하지 않고 행인에게 노골적으로 권하는 호객행위도 했다. 이들이 취급하는 최음제는 여러 가지였다. 술이나 음료수에 타서 마시는 액체로 된 제품부터 알약, 가루약 등 다양한 형태의 최음제가 존재한다. 원산지도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다양했다. 

이때만 해도 가격이 저렴했던 ‘총알약’이 인기가 많았다. 총알약은 3㎝ 길이의 플라스틱 앰플통에 액체 상태 최음제가 들어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총알과 비슷하게 생겨서 붙여진 총알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총알약에 돼지발정제 성분이 들어 있어 여성을 성적으로 흥분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음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페니시 플라이’는 청계천 판매상들을 통해 유통됐다. 곤충에서 추출한 물질로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최음제는 정체불명의 약물로 원료, 제조 방법은 물론 스페인과의 연관성도 알려지지 않았다. 청계천에서는 2∼3회 사용량인 10cc 한 병에 1만5000원 선에서 거래됐다.


스페니시 플라이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 최음제 ‘요힘빈’도 청계천에서 1회분 1만원대에 유통됐다. 요힘빈은 아프리카에 있는 ‘요힘브’라는 나무의 속껍질로 만든 가루로 원주민들에게 흥분제로 사용되는 것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면서 상품화됐다.

그러나 스페니시 플라이나 요힘빈의 경우 의학적인 약효는 미미하다는 게 의료계 정설이다. 미국 FDA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두 최음제는 효과가 없다고 공표했다. 최음 효과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심리적인 ‘위약 효과’ 때문이라는 설명도 내놨다.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많은 최음제는 독일제 ‘프로코밀 크림’이다. 이 최음제는 1회분 가격이 2만5000원으로 고가였지만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구하기도 어려워 단골들만 거래할 수 있었다. 

구매자들은 대부분 유흥업계 종사자들이, 유명 나이트클럽에서는 단골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은밀히 건네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도 최음제는 불특정 다수에게 쉽게 노출됐다. 스팸 메일이나 인터넷 카페, 포털사이트 등을 통해 남성들을 유혹했다. 

업소 매니저
서비스 제공

이메일 영업과 포털사이트 등을 통해 유통되고 있는 ‘물뽕’은 무색무취의 액체 상태로 판매되며 음료수나 술에 타서 복용하면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이트 강간 약물(Date Rape Drug)’로 알려져 있다. 

이 물뽕은 24시간 이내에 체내에서 빠져나가 사후 증거를 찾기가 힘들고 가해자를 찾더라고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 양승조 의원은 2010년 국회 국정감사 보건복지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마약이나 향정신성의약품은 엄격하게 단속되고 있지만 최음제 성분이 담긴 돼지발정제나 말발정제는 어느 부처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돼지발정제는 개체 수 증가나 우량종자 관리를 위해 쓰이는데 농어촌 가축병원 수의사나 동물의약품 유통업소에서 2만~50만원 선에 팔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표적인 최음제로 인식되면서 전국 곳곳의 성인용품 전문점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유통돼 유흥가와 청소년들 사이에서 손쉽게 매매되고 광범위하게 오용되고 있다.

양 의원은 돼지발정제가 섭취량에 따라 간질이나 내분비계 교란 등 인체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와 식약청·농림부·국립수의과학검역원 어느 곳도 소관이 아니거나 별도 관리대상이 아니라고 답해 문제가 크다고 주장했다.


당시 시중에 유통 중인 돼지발정유도제나 발정촉진제·시기조절제·성선호르몬자극제 등은 모두 전혀 다른 용도로 인허가를 받은 뒤 불법적으로 전용되고 있던 셈이라고 양 의원은 강조했다.

이후에도 포털사이트와 SNS에서 ‘물뽕’을 판매하는 게시글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기자가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5분도 채 되지 않아 답이 왔다. 효과에 대한 질문에 “운영 5년 차로 많은 단골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단골로 모시려 하지, 돈 몇 푼 벌고 문 닫으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격은 3회용 한 병이 30만원, 6회용 한 병이 55만원이었다. 기자가 물뽕 검색부터 계좌번호를 받아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15분 남짓이었다. 다음 판매자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며 질문에 대해 금세 답이 왔다. 그는 일본 수입 제품으로 효과가 확실하다며 절대 들킬 일 없다고 자신했다. 이번 판매업자는 25만원으로 조금 더 저렴했다.  

SNS·포털 등
구하기 쉬워

기자가 한 시간 동안 찾은 판매자는 총 7명이었는데 그중 6명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산, 유럽산, 미국산이라며 저마다 효과를 확실히 보장한다고 구매를 부추겼다. 

그룹 빅뱅 승리가 운영해 유명했던 클럽 버닝썬이 흔히 물뽕이라 불리는 마약 GHB(Gamma-Hydroxy Butrate)를 이용해 성폭력 방조 의혹으로 강간약물에 대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버닝썬에서 폭행을 당했다고 <일요시사>에 첫 제보(<단독> ‘승리 클럽 버닝썬’ 성추행 막다 수갑 찬 사연)했던 김상교씨는 SNS에 “버닝썬 고액 테이블 관계자들, 대표들이 술에 물뽕을 타서 성폭행당한 여자들 제보도 받고 방송사 촬영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외국의 유명 포르노 사이트에 해당 클럽 VIP룸 화장실을 배경으로 약물 강간을 당하는 듯한 여성의 동영상이 게재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유엔 마약위원회는 2001년 GHB를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했고, 우리나라도 같은 해 GHB를 마약류로 지정했다. 그러나 원재료를 구하기 쉽고 제조 방법도 쉬워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심지어 포털사이트에 제조 방법까지 올라와 있다. 

국내서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는 증가 추세다. <약학회지>에 실린 ‘약물 관련 성범죄 사건 유형 분석 및 검출 약물 경향’에 의하면 2006년부터 2012년까지 국과수 본원에 약물감정이 의뢰된 성범죄 관련 건은 총 555건이었으며, 연도별 분포는 ▲2006년 28건(5%) ▲2007년 10건 ▲2008년 38건 ▲2009년 75건 ▲2010년 91건 ▲2011년 133건 ▲2012년 180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다. 

지난 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관세청을 통해 제출받은 ‘신종 마약 단속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까지 신종 마약 적발량은 9만4532g으로 전년인 2만1378g보다 4.4배 증가했다. 

관세청은 신종 마약 가운데 성범죄에 자주 사용되는 약물 6종(MDMA·LSD·GHB·케타민·러쉬·기타)을 추출해 장 의원에게 보고했다. 올 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이들 적발량과 전년 대비 증가 폭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물뽕’이라 불리는 GHB 적발량이 급증했다. 지난해 적발량은 469g이었지만 올해는 61배에 달하는 2만8800g이 적발됐다. 이는 96만명이 동시 투약 가능한 양이다.

흔히 ‘엑스터시’라 불리는 MDMA는 지난해 3328g에서 6060g, LSD는 487g에서 931g, 러쉬(RUSH)는 1만1454g에서 1만7947g으로 늘었다. 졸피뎀 등 기타 신종 마약 적발량도 전년도 4572g에서 3만6234g으로 크게 늘었다.

세관별로는 인천에서 전체 88%(8만3421g)에 달하는 신종 마약이 적발됐으며, 부산(6.9%·6604g)이 뒤를 이었다. 불과 5년 전인 2016년 신종 마약 적발 건수가 ‘0’건이었던 광주세관서도 올해 3097g의 신종 마약이 적발됐다. 이는 유입 경로가 ‘개발’되고 있다는 얘기다.

나이트·클럽 판매상 활개
‘비쌀수록 효능 좋다’ 광고

데이트 강간에 주로 쓰이는 약물이 매년 더 많이, 더 다양한 지역에서 적발되고 있는데도 약물 사용 성범죄 처벌 규정과 적발 역량 모두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문제는 국내에선 약물 사용 성범죄를 처벌할 별도 가중처벌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형법 299조(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한 간음은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한다)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등을 동시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약류 관리법은 마약류의 자가 복용·유통·거래·소지를 규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타인에 대한 사용 규제, 데이트 강간 등 성범죄에 사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은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선 관련 범죄 현황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표적 범죄 통계인 경찰 ‘통계 연보’나 대검찰청 ‘범죄분석’에서도약물을 이용한 성범죄 관련 통계는 찾아볼 수 없다.

국회 입법조사처 전윤정 입법조사관은 보고서에서 “데이트 강간 등 성범죄에 오남용되는 약물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실태 파악과 함께 성폭력 범죄에 연루된 현황을 조사하고 통계를 구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나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2015년 <약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으로 약물 사용 성범죄 증가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2006~2012년 국과수 본원에 약물 감정이 의뢰된 성범죄 사건은 총 555건(2006년 28건, 2007년 10건, 2008년 38건, 2009년 75건, 2010년 91건, 2011년 133건, 2012년 180건)으로 매년 증가했다.

‘버닝썬 사건’이 터지기 7년 전 자료에 불과했다.

장혜영 의원실에 따르면, 현재 마약 조사에 투입된 인력은 인천·부산·서울·김해공항 세관 등 총 4개 기관 61명이다. 인천세관에 전체 인력의 77%(47명)가 집중됐다. 부산·서울세관은 전담 인력이 없어 일반 직원이 투입돼 마약 조사 업무를 겸하고 있다. 게다가 관세청이 보유한 마약 탐지기 82대 중 13대(15%)는 사용연한이 이미 지났다. 

장 의원은 “버닝썬 사건 뒤 여성들의 물뽕 등 데이트 강간 약물에 대한 공포는 여전하다. 급증하는 마약 적발률, 변화하는 마약 보급 경로 등을 분석해 적절한 곳에 인적·물적 인프라를 보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온라인 거래
단속 어려워”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강간 약물의 무분별한 사용 배경에는 성의 상품화라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물뽕은 관리감독 제재가 쉬운 다른 약물, 프로포폴 등과 달리 장소와 경로가 특정되지 않는다. 온라인이나 우편 거래 모두를 단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 같은 특성을 이용해 일부 유흥업소에 대량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데, 준강간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문화를 바꾸고 사건이 일어나는 유흥업소 현장을 단속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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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