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 일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의 잇따른 광주 방문을 놓고 비판론이 거세지고 있다.
노씨가 지난해부터 광주를 찾아 부친을 대신해 사과하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규명에 협조하겠다고 밝혔지만 전혀 공염불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5∙18 단체들은 진실규명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노씨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말 뿐인 사과는 오히려 독(毒)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
광주 민심으로부터 직격탄 맞은 허울뿐인 사과
노씨는 지난달 29일,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국립 5∙18 민주묘지와 인근 망월동 묘역을 찾아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씨 명의의 조화를 바치고 피해자 묘역 앞에서 참배했다.
그는 옛 전남도청을 둘러본 뒤 5∙18 피해 여성들의 쉼터인 오월 어머니집도 방문했다.
노씨의 광주 방문은 지난해 8월과 12월에도 비슷한 동선으로 광주를 찾아 부친을 대신해 사과한 것까지 포함해 벌써 3번째다.
5∙18 피해자 가족들은 노씨가 지난해 노 전 대통령 회고록 수정 등 진상규명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힌 이후 기대감을 갖고 기다려왔다.
하지만 의례적인 방문 및 사과만 반복하고 진실규명에는 진전을 보이지 않자 광주 민심은 싸늘해졌다.
급기야 5∙18기념재단과 5월3단체(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는 지난 3일 “노씨가 5∙18 민주묘지를 찾은 것을 참회라고 보는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며 “몇 번의 묘지 참배로 마치 5.18 학살의 책임을 다했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은 “아무 사죄와 반성 없이 추모 화환을 전달하고 일부 언론서 이를 대단한 것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문제의 본질서 한참 벗어난 것”이라며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책임 인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정 사과 뜻이 있다면 노태우 회고록부터 수정해야
5∙18 피해자들은 노씨가 지난해 자신의 입으로 직접 밝힌 ‘<노태우 회고록> 수정’이야말로 진정한 사과의 첫 발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11년 출간한 회고록서 5∙18 민주화운동의 원인과 관련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기술해 5∙18 피해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왔다.
이와 관련해 노씨는 지난해 광주 방문서 “조만간 집을 정리하는 과정서 5∙18 관련 자료가 나오면 공개하고 아버지 회고록 개정판 출간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전두환씨와 함께 신군부 주역이었던 노 전 대통령이 회고록 개정을 통해 5∙18 민주항쟁의 진실규명에 나선다면 역사 바로 세우기의 물꼬를 트는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씨는 여전히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이에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노 전 대통령 측이 진정 5·18에 대한 참회의 뜻이 있다면 5·18 학살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시인하고 회고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언론 보도에만 관심 있는 것 아니냐” 비판 제기
5∙18 단체의 이 같은 비판은 노씨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진상규명 등 본질적 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자신의 광주 방문을 알리는 데만 신경 쓴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노씨가 지난해 8월과 12월, 그리고 지난달 광주를 방문했다는 뉴스는 사진과 함께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특별한 행사에 참석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 방문임에도 노씨 주변에는 늘 사진기자가 대동했다.
자신의 방문을 언론에 사전 공지한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대목이다.
이를 두고 5∙18 단체들은 “노씨는 말로는 사죄한다고 하지만 실천은 전혀 하지 않고, 언론보도에만 신경 쓰는 것 같다”며 “도대체 누구를 위한 광주 방문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때문에 일각에선 노씨의 잇따른 광주 방문은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 노 전 대통령을 국민묘지에 안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투병 중인 노 전 대통령의 국민묘지 안장은 현재 “헌정질서 파괴범은 국립묘지에 안치할 수 없다”는 국가보훈처의 유권해석에 따라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에 대한 우호적 여론 조성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소영∙재헌씨 남매, 우호적 여론 조성에 나선 속사정 있나
노씨 뿐만 아니라 누나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도 최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공교롭게 노 관장도 지난해 12월 전남대병원을 방문하거나 전남대 어린이병원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광주∙전남 끌어안기에 나서고 있다.
노씨 자매가 광주∙전남을 찾는 배경에 대해서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얽힌 수사와 재판 등 송사(訟事) 때문에 우호적 여론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노씨는 해외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검차 수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지난 4∙15 총선을 앞두고 노씨의 민주당 입당설이 돌았다.
민주당 입당을 위해서는 반드시 광주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노씨의 광주행은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거액의 재산분할 소송을 진행 중인 노 관장은 노 전 대통령의 직간접적인 도움으로 SK그룹이 성장했음을 입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좋아져야 하는 것은 기본 전제다.
노 관장은 지난 2018년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물건을 던지고 막말을 하는 등 갑질 언론 보도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는 지난 2016년 20대 총선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던 김문수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 지지를 선언한 뒤 선거 유세를 직접 지원할 만큼 영남∙보수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이혼소송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혼소송 중에 여론전 펼친 노소영 관장
실제로 노 관장은 이혼 소송 중에도 언론을 활용,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지난 4월 개최된 재산분할 재판 이후 “최 회장이 가정으로 돌아오면 이혼소송을 취하하겠다” “최 회장의 혼외자도 내가 키우겠다”고 언론에 공개된 노 관장 발언이 대표적 사례다.
노 관장 진술이 공개되자 최 회장 측 변호인은 “비공개로 진행돼야 할 법정 내 진술 내용을 노 관장 측이 외부에 언급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며 “노 관장도 이혼 의사가 확고함에도 언론에는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나오는 것은 대중 감성을 이용한 여론전일 뿐 진정성은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노 관장이 최 회장과 동거인 사이서 난 자녀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맞지 않는 이야기며 당사자인 자녀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는 전근대적인 사고”라고 지적했다.
노 관장은 지난 2015년 말 최 회장이 혼외사실을 고백했을 때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며, 가정을 지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 취지와는 정반대로 노 관장은 최 회장 사면에 반대하는 편지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같은 프레임이 실제 재판에 유리할 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서초동의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재판서 여론전은 늘 있는 일이지만 적정한 선을 넘어서면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