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재계 사정 막전막후

검찰 캐비닛에 불량 기업들 ‘빼곡’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검찰의 대규모 비리 사정이 본격화되면서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잇따라 수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비자금 등 ‘비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내막에는 경기 불황에 따른 투자압박용이 아니냐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재계를 바짝 긴장하게 하는 정부의 진짜 노림수는 무엇일까.


검찰의 기업 사정이 포스코건설 비자금 의혹으로 시작해 역외탈세, 자원개발 비리 혐의 등 사정 칼날이 그룹 전체로 번지는 형국이다. 포스코건설에 이어 SK건설, 신세계, 롯데 금호아시아나, 동부그룹, 동아원이 검찰 수사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동국제강도 비자금 의혹을 받고 있다. 

기업 덮친 칼바람
어디까지 털리나
 
SK건설의 새만금 방수제 건설공사 담합의혹이 과징금 선에서 마무리될 것처럼 보였지만 검찰은 이례적으로 공정거래위원회 측에 고발요청권을 행사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정거래조세조사부(부장검사 한동훈)는 지난 17일 새만금 방수제 공사입찰 담합혐의로 SK건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2009년 12월, 한국농어촌공사는 새만금 방수제 건설공사를 공고했다. SK건설을 비롯한 12개 건설사가 응찰에 참여했다. 그러나 SK건설은 다른 경쟁사들과 짜고 들러리 업체를 세우는 방식으로 1038억원 규모 ‘동진 3공구’ 공사를 따냈다. 이를 감지한 공정거래위원회는 SK건설에 22억원 가량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공정위 심의위원회 의결서를 검토한 검찰은 SK건설에 대한 기소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검찰은 2013년 개정된 ‘공정위는 검찰총장의 고발요청이 있으면 반드시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는 법 조항을 발동, 고발요청권을 행사했다.
 

신세계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는 최근 이명희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등 그룹 총수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 신세계는 법인 계좌에서 발행된 수표를 물품 거래 대신 현금화해 총수일가 계좌에 일부 입금, 비자금 목적으로 법인 재산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계열사 당좌계좌에서 발행된 60억∼70억원 상당의 수표의 향방을 쫓고 있다. 이 중 30억원 가량이 총수일가로 흘러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나머지 30억∼40억원의 용처도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검찰은 해당 계좌를 통한 자금 거래 내역을 추적하면서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 행위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롯데도 마찬가지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부장검사 김영기)는 2011∼2012년 롯데쇼핑 본사에서 롯데마트와 롯데백화점, 롯데시네마 등 사업본부로 사용처가 명확치 않은 수십억원대 돈이 흘러간 정황을 포착하고 자금 흐름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검찰은 롯데쇼핑이 직원의 계좌를 거쳐 현금화한 후 비자금을 조성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칼 빼든 사정당국…대기업 노심초사
돌연 전방위 수사에 숨은 노림수는?
 
검찰은 이를 위해 롯데쇼핑 임직원들의 계좌내역을 추적하는 한편 예산담당 실무 직원 5명을 소환해 자금의 이동 경위와 사용처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검찰은 신헌 전 롯데쇼핑 대표이사의 개인적 비리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벌인 바 있다.
   
동부그룹에도 먹구름이 꼈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한동훈 부장검사)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계열사들로부터 수백억원을 횡령한 정황을 잡고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해 금융정보분석원(FIU)에서 관련 자료를 토대로 비자금으로 조성된 금액 중 상당액이 김 회장의 장남 김남호 동부팜한농 부장과 딸 김주원씨에게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자금의 흐름을 쫓고 있다.
 

이와 함께 김 회장의 동서인 윤대근 동부CNI 회장이 10억원 안팎의 회삿돈을 빼돌린 정황에 대해서도 확인 중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수사로 인해 동부그룹의 구조조정에도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알려진 동아원도 검찰의 수사망에 올랐다. 서울 남부지검 금융조사1부(박찬호 부장검사)는 동아원 자사주 매각과 관련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로 브로커 김모씨를 구속했다고 17일 밝혔다. 동아원은 전 전 대통령의 3남 재만씨의 장인 이희상 회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일회성? 기획설?
다음 타깃은…
 
검찰에 따르면 브로커 김씨는 2010∼2011년 동아원이 자사주를 성공적으로 매각하도록 돕기 위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다. 동아원은 지난 2013년 검찰의 '전두환 일가 미납 추징금' 특별환수팀의 대대적인 비자금 추적 조사 때 비자금 유입처로 의심돼 수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이 회장은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원 중 275억원을 부담하기로 한 바 있다. 검찰은 김씨와 함께 고발된 동아원 관련자 등에 대해서도 소환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건설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조상준)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수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검찰은 계열사 간 내부 거래를 통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보고 그룹 내 자금 흐름을 추적해 왔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으로부터 4000억원대 배임 혐의로 고소도 당한 상황이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는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이 미국법인을 통해 약 1000만 달러(약 110억 원)를 미국으로 빼돌리고 그중 일부를 도박에 사용한 정황도 포착해 사실관계를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18일 알려졌다. 장 회장이 현지 납품업체로부터 이 회사 미국법인 계좌로 약 1000만 달러를 받은 뒤 그중 수십억원을 손실 처리하고 빼돌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검찰은 장 회장이 미국의 여러 도박장에서 거액을 도박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차례 돈을 따 총 50억원 가량의 도박 수익을 얻었다는 자료를 미국 금융·수사 당국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장 회장에게 횡령 혐의와 함께 해외 재산도피 및 외화 밀반출 혐의 등을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국세청은 지난해부터 동국제강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벌였고 조사 자료를 최근 검찰에 넘겼다. 관세청도 국내외에서 장 회장 관련 자료를 입수해 상당 부분 조사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국세청, 관세청 조사 결과와 그동안 내사해 온 내용을 정리해 본격적인 수사를 벌일 예정이다. 동국제강이 당진제철소 건립 과정에서 건설비를 과다 계상했다는 의혹, 부산에서 진행한 사업 과정에서 홍콩법인에 보낸 거액의 회사자금의 용처를 둘러싼 의혹 등도 살펴볼 방침이다.
 
사정당국의 몰아치기식 수사 배경에는 금융정보분석원의 자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재계는 이번 검찰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금융정보분석원을 주목하고 있다. 2001년 설립된 금융정보분석원은 금융기관을 이용한 범죄자금 이동을 막고 외화 불법유출을 방지하고 있다. 금융권은 2000만원 이상 현금을 넣거나 뺄 경우 거래자의 신원과 거래금액 등을 전산으로 금융정보분석원에 자동 보고해야 한다. 불법 재산이라고 의심되는 뭉칫돈 거래가 있을 때에도 정보가 제공된다.
 
금융정보분석원은 검찰, 경찰, 국세청, 선거관리위원회, 금융위, 국민안전처 등 7개 법 집행기관이 요건에 맞춰 요청할 때 자료를 제공한다. 그간 논란이 됐던 비자금 사건 대부분이 금융정보분석원 자료에서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2013년 CJ그룹 비자금 수사가 대표적이다. 사실 지금 거론되는 대기업 비리는 금융정보분석원이 1∼2년 전에 발견해 검찰에 넘겼으나 묵혀져 온 것들이다. 재계는 금융정보분석원 자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혀 있을까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상황은 예견될 수 있었던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7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 그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며 “국방 분야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켜켜이 쌓여온 고질적인 부정부패에 대해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사회에 만연된 이런(부정부패) 관행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 경제를 살려냈다 하더라도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앞서 12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부정부패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것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투자 위한 채찍?
고용 위한 매질?
 
이 같은 박 대통령의 쓴소리를 두고 재계에서는 전방위 고강도 사정을 예고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와 재계가 지난해부터 미묘한 갈등을 빚었던 ‘사내 유보금’에 관심이 쏠린다. 정부는 그동안 재계에 투자를 적극 요청했다. 하지만 재계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내유보금을 풀지 않고 있다.
 
기업 경영성과 분석기관인 CEO스코어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10대 그룹의 83개 상장사 사내유보금은 총 537조8000억원에 달했다. 이는 6개월 전인 1분기의 508조7000억원에 비해 5.7% 증가한 규모다. 이 기간 유보율도 1679.1%에서 1733.6%로 54.5%포인트 상승했다.
 
기업들의 현금성자산 증가는 내수부진에 따른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 상승에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실제 국내 총설비투자는 2010년까지 상승세를 기록했으나 2010년 이후 4년째 120조원대에 머물러 있다. 오히려 2013년 설비투자액은 전년보다 5조원 감소했다.
 
 
이처럼 투자가 줄어들고 사내유보금이 증가하자 배당 등을 통해 주주에게 환원해 경기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하여 정부는 국민의 소득확대를 통해 경기회복을 이루는 순환구조를 구축한다는 명분 하에 배당 확대 정책을 펼쳤다. 기업이 자금을 쌓아두고만 있을 경우 자금 순환이 되지 않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배당확대 정책은 정부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총수일가와 외국인 투자자만 배당소득을 누리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정책목표와 어긋났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말 안 들으니 때릴 수밖에…길들이기?
기업이 두들겨 맞으면 경기 살아나나?
 
기업이 금고를 굳게 닫자 내수경기는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디플레이션 위기가 감지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사내유보금 과세 방안을 꺼내든 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7월 “가계 가처분 소득 증대 차원에서 기업의 과도한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인센티브 등 여러가지 제도적인 장치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래 투자재원 확보 차원이라는 명분이었다. 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재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들이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고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비판”이라고 지적했다. 재계의 거센 반발에 사내유보금 과세는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정부와 재계의 엇박자는 근로자 임금 인상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올해 임금을 동결한 삼성전자가 그렇다.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삼성SDS, 삼성전기, 삼성디스플레이 등 삼성의 주요 계열사들이 줄줄이 임금동결에 동참했다. 삼성SDI의 경우 1% 내외로 임금을 올렸지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동결이나 마찬가지다.
 
삼성의 임금동결에 힘입은 재계는 임금동결을 이어갔다. SK이노베이션은 노조 투표를 통해 올해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S-OIL도 올해 연봉계약서에 동결로 서명했다. 이처럼 재계는 내수진작을 강조한 정부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최경환 부총리는 “적정 수준의 임금을 인상해 소비가 회복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달라”며 “대기업의 임금인상이 당장 어렵다면 협력업체에 적정 대가 지급 등을 통해 자금이 중소 협력업체에 흘러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재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히려 최저임금 인상이 산업 경쟁력을 악화시킬 수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임금은 한 번 올리면 잘 내려가지 않는 하방 경직성이 크기 때문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면서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최저임금 인상이 실제로는 기업부문의 임금을 전반적으로 높여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정책 수단이 동반돼야 한다”고 정부에 역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정부-재계 밀당
내수경기 물음표
 
최근 정부는 이례적으로 기준금리를 1%대로 낮췄다. 내수진작을 이끌겠다는 심산이지만 재계는 고요하다. 종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재계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이를 두고 검찰 내부에서는 ‘정치적 고려는 없다’는 말이 나온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치적 고려 없이 대대적인 사정 칼날을 들이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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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