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그라운드 떠난 박지성

아듀! 축구화 벗어도 ‘영원한 캡틴’

[일요시사=사회팀] 이광호 기자 = 25년간 그라운드를 누빈 ‘캡틴’박지성(33·PSV에인트호번)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그는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은퇴와 동시에 결혼을 발표하며 앞으로 새로운 길을 걷겠다고 예고했다. 세계 최고의 명문팀에서 아시아 선수로서 이룰 것을 다 이룬 박지성은 한국축구의 전설로 기록될 것이다.

 
‘캡틴’ 박지성이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선수생활 동안 모든 것을 불태운 사나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띄며 향후 거취를 설명했다. 지난 14일 오전, 박지성은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은퇴 및 결혼발표 관련 기자회견을 열었다. 박지성은 이날 아버지 박성종씨, 어머니 장명자씨와 함께 푸른 잔디 위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무릎이 문제
“미련없다”
 
마이크를 잡은 박지성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오늘은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라며 입을 연 박지성은 담담한 어투로 “이번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박지성은 “내 거취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며 “지난 2월부터 은퇴를 결심했다. 계속 좋지 않았던 오른쪽 무릎 상태가 다음 시즌을 버티기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고 은퇴 이유를 밝혔다.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심정에 대해 박지성은 “은퇴에 대한 섭섭함이나 눈물은 없다. 아마 축구선수로서 미련이 남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며 “선수 생활 동안 내가 원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지성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축구선수 박지성으로서 인생은 여기까지다. 앞으로는 받은 사랑을 갚아나가는 인생을 살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그는 “우선은 유럽으로 건너가 휴식을 취할 것이다. 쉬는 동안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충분한 고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시즌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번에 임대돼 활약한 박지성은 원 소속팀 퀸즈파크 레인저스(QPR)와 계약이 2015년 6월 만료된다. 올시즌 잉글리시 챔피언십리그(2부리그)서 3위로 시즌을 마친 QPR이 프리미어리그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에 진출하며 ‘QPR이 승격하면 박지성이 QPR로 복귀할 것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지성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거취를 확정했다.
 
박지성은 은사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나를 지도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한 분이라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과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대해 “히딩크 감독은 내게 월드컵과 유럽무대를 경험하게 해줬다. 퍼거슨 감독은 내가 세계적인 선수들과 나란히 뛸 수 있도록 가르쳐줬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자신의 선수생활을 돌아보며 박지성은 “나는 뛰어난 테크니션은 아니었지만 남들보다 많은 활동량이 장점이었다. 내 장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뛰었다”고 말했다. 또 박지성은 “나는 부족함이 많은 선수였다. 내 커리어 평점은 10점 만점에 7점”이라고 말하면서 은퇴 순간에도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날 단상 앞에는 그의 역사와도 같은 유니폼 10벌이 전시돼 있었다. ‘세류국교’라고 가슴팍에 쓰여있는 세류초 유니폼에 이어 경기중, 수원공고, 명지대, 국가대표팀, 교토 퍼플상가, PSV에인트호번,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킌즈파크 레인저스, 그리고 다시 에인트호번. 박지성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빈 유니폼들이었다.
 
단상 왼쪽에는 그가 세류초에서 처음 신었던 검은색 축구화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아직 그라운드의 흙이 채 떨어지지도 않은 주황색 축구화와 축구공이 놓여 있었다. 그가 에인트호번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쓴 것들이었다. 박지성은 은퇴와 함께 결혼 소식을 알렸다. 박지성은 오는 7월27일 서울 W호텔에서 그동안 사랑을 쌓아왔던 김민지 전 SBS 아나운서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이른 은퇴에도
‘웃으며 안녕’
 

결혼에 앞서 박지성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의 일원으로 오는 22일 수원 삼성, 24일 경남FC와의 친선전에 출전해 국내 팬들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이어 6월과 7월에는 2차례 자선경기를 치러 현역 시절과 다름없이 바쁜 나날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일단 6월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글로라 붕카르노에서 자선 경기인 ‘아시안드림컵 2014’를 개최한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 대회에서 박지성은 유명 초청 선수들과 팀을 이뤄 인도네시아 올스타팀과 대결한다.
 
25년 달린 ‘산소탱크’ 선수생활 마침표
한국축구 세계에 알려…‘전설’로 기록
 
7월25일에는 한국프로축구연맹과 함께 K리그 선수들이 참여하는 여객선 세월호 추모경기를 연다. 이는 박지성이 그라운드에서 마지막으로 뛰는 고별 경기가 될 예정이다. 박지성은 이 경기를 통해 마련된 기금을 세월호 희생자와 관련된 장학재단에 기부할 계획이다.
 
이후 박지성은 축구 행정가를 위한 학업에 열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행정가를 꿈꾸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한국 축구, 한국 스포츠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 그때까지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박지성은 이미 2012년 모교인 명지대에서 체육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상태다. 베트남·태국 등 아시아 곳곳에서 열어온 아시안 드림컵 역시 축구 행정가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왔다. 지난 10여년간 아시아 축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데다 영어 실력도 능통해 박지성이 행정가의 길을 걷는다면 한국 축구 외교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박지성은 “우선 해외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정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지성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박지성은 부모님을 향해 “아버지는 선수생활을 더했으면 하는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부상 당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셔서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은퇴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면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부모님이다.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그렇게 힘든 일을 하지는 않을 거 같아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진 빚을 갚으면서 살아가겠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렇게 박지성의 은퇴 소식이 알려지자 맨체스터유나이티드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박지성이 현역에서 은퇴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올드트레포트에서 레즈 유니폼을 입고 205경기 27골을 넣은 박지성이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은퇴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박지성이 맨유에 있는 동안 프리미어리그 우승 4번, 3번의 리그컵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했다”고 언급하며 “맨유의 모든 사람들이 박지성의 건투를 빈다”고 전했다.
 
또한 SNS 트위터 계정에서도 “박지성의 미래에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고 언급하며 박지성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들고 있는 사진을 함께 공개했다. FIFA도 박지성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FIFA는 “한국 슈퍼스타 박지성이 은퇴했다”는 글에서 “박지성은 아시아 축구 선구자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가 커리어를 마감했다”고 전했다.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리거
 

박지성은 전남 고흥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전남 고흥이지만 유년 시절부터 쭉 수원시에서 자랐다. 그가 축구화 끈을 처음 묶은 건 수원 영본초등학교 4학년 때다. 6학년 때 전국 대회에서 세류초가 준우승을 차지해 차범근 축구대상을 수상했다.
 
안용중, 수원공고를 거친 그는 명지대 김희태 감독의 눈에 들어와 명지대에 진학하게 된다. 2000년 잠시 휴학하고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낸 J리그 ‘시미즈 에스펄스’ 대신 연봉 5000만엔(2000년 당시 한화 약 5억원)이라는 파격 조건과 주전급 대우를 보장한 ‘교토 퍼플상가’에 진출했다. 당시 J리그 진출은 황선홍 등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고참급 선수들만 가능했지만 박지성은 예외였다.
 
‘포스트 박’비상
공백 누가 메우나
 
박지성은 교토 퍼플상가에서 당시 동료들과 맹활약을 펼쳤다. 팀이 2부로 강등된 후에도 팀에 잔류해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팀을 다시 1부 리그로 이끌었다. 2003년에는 일본의 FA컵 대회격인 일왕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 ‘가시마 앤틀러스’를 맞아 0-1로 뒤지던 후반에 동점골을 성공시키면서 팀의 2-1 역전승을 도우면서 팀의 첫 우승을 안기는 데 기여했다. 사실 이때 박지성과 교토 퍼플상가의 계약은 종료된 상태였다. 그러나 팀의 컵대회 우승을 위해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해 찬사를 받기도 했다.
 
 
2002년 한국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결승골 등 4강 진출에 크게 기여한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 감독의 황태자로 거듭나며 이영표와 함께 ‘PSV에인트호번’의 부름을 받는다. 박지성은 3년6개월에 연봉 100만달러라는 계약조건으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PSV에인트호번으로 이적했다.
 

2003년, 이적 초기에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팀 동료들도 그의 부진한 활약을 꼬집을 정도였다. PSV에인트호번의 사령탑이었던 히딩크 감독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그를 주로 원정 경기에만 투입하도록 배려했다. 이후 차차 페이스를 되찾으면서 발군의 기량을 뽐냈고 팀내 주요 선수로 발돋움했다. 이듬해 정규리그 28경기에서 여섯 골을 넣으며 부진을 만회했다. 
 
2004-05 시즌에도 리그 28경기에서 일곱 골을 넣어 우승에 일조했다. 2005년 5월4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AC밀란(이탈리아)을 상대로 넣은 선제골은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원동력이 됐다. 이후 박지성은 경기 때마다 종횡무진 활약했고 네덜란드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당시 박지성을 상대했던 선수 젠나로 가투소는 박지성을 마크했던 일이 괴로운 기억이었음을 추억하는 내용의 에세이를 일본 축구잡지에 송고하기도 했다.
 
박지성을 괴룝혔던 PSV에인트호번 팬들도 야유가 아닌 열광적인 ‘위숭 빠르크’ 송으로 박지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2005년 박지성을 눈여겨보던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든 감독이 그를 영입했다. 박지성은 등번호 13번을 달고 맨유에 입단했다. 이듬해 아스널 FC전에서 프리미어리그 첫 골을 신고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맨유에서 박지성은 주로 오른쪽 윙어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왼쪽 윙어인 라이언 긱스와 번갈아가면서 출전했다. 그는 일곱 시즌을 뛰며 전성기를 보냈다. 프리미어리그 4회(2007, 2008, 2009, 2011년), 리그컵 3회(2006, 2009, 2010년), 커뮤니티 실드 3회(2008, 2009, 2012년), 챔피언스리그 1회(2008년),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1회(2008년) 우승을 함께했다.
 
2012년 2월6일 첼시와의 정규리그 경기에서는 맨유 창단 이후 92번째로 200경기 출전의 금자탑을 쌓았다. 통산 기록은 205경기 27골. 그의 성공을 계기로 잉글랜드에서 한국 선수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졌다. 낯선 유럽 리그를 친숙하게 만든 선봉장이다. 박주영(29·왓포드)을 비롯해, 기성용(25·선덜랜드), 이청용(26·선덜랜드), 지동원(23·아우크스부르크), 김보경(25·카디프시티), 윤석영(24·QPR) 등 열한 명이 프리미어리그를 거쳤다.

‘두 개의 심장’
제2의 축구인생
 
2012-13시즌 이적한 퀸스파크 레인저스(QPR)에서는 2부 리그 강등을 경험했으나 지난해 8월 친정팀 에인트호번에 임대로 이적한 뒤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전성기를 지난 데다 고질적인 무릎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지난 시즌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25경기에서 2골 5도움을 올려 다음 시즌 유로파리그 출전권을 따는 데 기여했다.
 
은퇴와 동시에 결혼 발표
김민지 아나운서와 결혼
 
역대 한국 국가대표 가운데 월드컵에 세 차례(2002, 2006, 2010년) 출전해 모두 골을 넣은 선수도 박지성이 유일하다. 4년 전 남아공 대회에서는 주장을 맡아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에 일조했다. 대표팀 100경기에서 열세 골을 넣은 그는 센추리클럽 가입과 함께 2011년 1월31일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박지성은 미드필더로 넓은 행동반경과 많은 활동량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스태미너를 갖고 있는 선수였다. 양쪽 측면에서 모두 뛸 수 있었던 건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을 다루는 경합 상황에서도 높은 집중력과 뜨거운 근성을 보였다.
 
특히 공간을 잘 활용하는 능력과 영리한 움직임으로 정평이 나 있어서 맨유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이 점을 수차례 칭찬하곤 했다. 맨유 시절에는 윙어임에도 불구하고 공격력과 수비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며 ‘수비형 윙어’라는 새로운 포지션을 개척하기도 했다. 패싱력 또한 준수해 팀의 승리를 위해 항상 헌신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다.
 
박지성은 지금껏 유럽 무대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을 알렸다. 그는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국외의 시선을 바꿔놓은 대표적인 선수다. 박지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 축구와 팬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러던 그가 이제 그라운드를 떠난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khlee@ilyosisa.co.kr>
 
 
[박지성 족적]
 
▲전남 고흥 출생
▲수원공고 졸업
▲명지대학교 졸업

<프로>
▲2000∼2002 교토퍼플상가
▲2002∼2005 PSV에인트호번
▲2005∼2012 맨체스터유나이티드
▲2012∼퀸즈파크레인저스
▲2013∼2014 PSV에인트호번 임대

<국가대표>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2004년 AFC 아시안컵 국가대표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
▲2011년 AFC 아시안컵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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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가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12월 초 후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는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