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제2의 전두환’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판검사도 굽실굽실…‘광주대통령’으로 불렸다

[일요시사=사회팀] 일당 5억원 ‘황제 노역’ 논란을 일으킨 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의 벌금형 노역이 중단됐다. 검찰은 허 회장의 재산을 찾아내 벌금을 거두기로 했다. 허 회장은 광주교도소 노역장을 나와 자연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이와중에 그는 ‘돈이 없다’며 시간을 끌고 있는 상태다. 전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허 회장은 도대체 누구일까.

지난 26일 검찰이 일당 5억원 ‘황제 노역’ 논란을 일으킨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 대해 벌금형 노역을 중단하기로 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국민 법 감정에 맞는 조치라고 보고 있다. 노역 중단 결정이 내려진 뒤 허 회장은 검찰을 나와 광주교도소 노역장에서 짐을 챙기고 가족이 몰고 온 차로 귀가했다. 노역장에서 자연인 신분으로 돌아간 허 회장은 검찰에게 “지금은 돈이 없다”며 미납 벌금 224억원은 지인에게 빌려 1∼2년 내에 갚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역 중단
“돈 없다”

허 회장은 조세포탈과 횡령 혐의로 기소돼 2010년 1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을 선고받았다. 판결은 2011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그러나 허 회장은 벌금을 내지 않고 뉴질랜드로 도피했다가 지난달 22일 귀국했다. 귀국 뒤 그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벌금을 낼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일당 5억원’ 노역 중이었지만 검찰의 이번 결정으로 노역장에 들어간 지 닷새 만에 형집행정지로 노역을 중단하게 됐다.

이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노동을 한 시간은 기껏해야 10시간 안팎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제대로 된 노동을 했을 리 만무하다. 수사 과정에서 체포됐던 1일도 노역장 유치 기간에 포함돼 254억원의 벌금 가운데 지금까지 모두 30억원이 탕감돼 이제 224억원이 남았다.

검찰은 허 회장에 대한 출국금지 요청을 하는 한편, 국내외 은닉 재산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검찰은 허 회장의 딸 집에서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미술품 115점, 골동품 26점에 대한 감정을 의뢰했다.


지난해 아내가 사망하면서 수십억원대 부동산을 상속받은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다. 또한 허 회장이 수년동안 매월 1000만원의 건물임대료를 차명 계좌를 통해 받아 관리해왔던 것도 드러났다. 허 회장이 소유 재산으로 밀린 국세와 지방세를 모두 납부한 뒤에야 벌금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에 해외재산을 파악해야만 벌금 완납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은 그동안 국세청이 파악한 허 회장의 해외재산에 대한 자료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은 지난해 12월 체납 세금 징수를 위해 허 회장이 도피했던 뉴질랜드 현지 조사를 벌여 은닉 재산 일부를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 자료를 토대로 본격적인 재산 추적에 나설 방침이다.

현재 국세청은 충분한 조사를 통해 숨긴 재산을 모두 확보해 놓은 상태다. 지방세 중 14억원은 허 회장이 소유했던 대주건설 부동산을 압류해 확보했다. 또한 허 회장이 황제노역과 함께, 출소까지 황제대접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반 교도소 수감자의 경우 약 200여m에 달하는 교도소 안쪽 길을 걸어 나와 정문경비초소를 통과해 출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허 회장은 개인차량을 안으로까지 들여 자연스럽게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교도소 측은 허 전 회장이 사라진 지 10분여가 지난 뒤 뒤늦게 “허재호 수감자가 출소했다”고 밝혔다.

잘나가던 건설재벌이 돈 없어 노역
5일 25억 탕감…비난 빗발치자 중단

출소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 27일 오전 광주 남구 월산동 허 전 회장 부인 소유인 것으로 알려진 주택 주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허 회장의 행방을 찾는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허 회장이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는 해당 주택은 약 3000여평의 고급주택으로 알려졌다. 문이 굳게 닫힌 채 주택 내부에 설치된 CCTV만이 오가는 사람을 관찰하고 있다. 허 회장은 전 대주그룹 측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 회장에 대한 특혜 이면에는 그를 둘러싼 화려한 인맥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찰, 법원, 언론 등을 꽉 잡고 있었던 것이다. 허 회장의 아버지 허진명씨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37년간 판사로 일했던 향판이었다. 광주지법 순천지원장과 목포지원장을 지냈다. 허 회장의 매제는 광주지검의 ‘넘버2’ 자리인 차장검사를 지냈다.


사위는 현재 광주지법 형사단독 판사로 재직 중이다. 남동생은 2000년대 법조비리의 상징으로 지목된 전·현직 판사들의 골프모임 ‘법구회’의 스폰서로 알려졌다. 여동생은 지난해 법무부 산하 교정중앙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첫 여성회장이었다.

재소자들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에는 법무부장관상을, 2010년에는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허 회장이 광주지역 유력 일간지를 거느린 점도 주목된다. 해당 일간지는 2003년 11월 대주그룹의 ‘가족’이 됐다.

허 회장 재산
전방위 파악

‘일당 5억원의 사나이’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허 회장은 1942년 전남 광양에서 현직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공업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를 졸업한 그는 20대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전남 광주 지역 경제 ‘호남 맹주’ 대주그룹의 수장이 됐다.

대주그룹은 7개 사업분야와 함께 1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한때 재계순위 50위권까지 올랐었다. 대주그룹의 모태는 1981년 설립한 대주종합건설이다. 1988년 주택사업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외형 확장에 나섰다. 대주콘도, 동양상호신용금고, 두림제철산업 등도 이 당시 설립했거나 인수했다.

미디어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4년에는 광주방송을 설립했고 2003년에는 <광주일보>와 케이블 채널 <리빙TV>를 인수하기도 했다. 다이너스티 골프장 등 레저분야에도 진출했다. 2000년대 들어 대주건설은 브랜드 ‘피오레’를 앞세워 전국으로 진출하면서 성장가도를 달렸다.

대주그룹 매출은 2000년 3000억원에서 2002년 1조3000억원, 2006년 2조원으로 늘었다. 특히 2007년 분양한 용인 공세지구 사업이 성공을 거두는 등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내 건설업계 시공능력평가 순위도 2004년 98위에서 2007년 52위까지 뛰어올랐다. 메이저기업인 대우건설 인수전에 뛰어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잘나가던 대주그룹에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은 2007년 국세청과 검찰이 작정하면서부터다. 국세청은 2007년 6월부터 3개월간 대주그룹 2개 계열사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실시했다. 2005~2006년 대주그룹이 법인세와 부가가치세 등 520억원을 탈세한 사실을 밝혀내고 검찰에 고발했다.

당시 재계는 대주그룹의 조세포탈사건을 두고 배임 또는 횡령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이중처벌 소지를 줄이겠다’는 국세청의 당시 방침에 따라 국세청은 단순 조세포탈사건의 경우 검찰 고발을 자제해 왔기 때문이다.

다만 대주주 또는 대표 등 회사 고위관계자들의 횡령·배임·비자금 조성의혹이 짙을 땐 제한적으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조세포탈사건을 수사하던 광주지검은 2007년 11월11일 허 회장에게 소환장을 발송했고 같은 달 14일 허 회장은 검찰에 자진 출두해 집중 조사를 받았다. 이틀 뒤 검찰은 허 회장에 대해 500억원대 탈세에 개입한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당시 허 회장은 대주건설과 대주주택 탈세에 개입한 혐의와 함께 부산 남구 용호동의 한 아파트 공사 시행과정에서 거액의 회사자금을 빼돌린 혐의를 받았다.

화려한 법조계 인맥
사업마다 특혜 시비


그러나 허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기각 이유였다. 이에 광주지검은 허 회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허 회장 지시에 따라 탈세를 실행한 대주건설 전 사장 이모씨와 이 회사 전무 정모씨도 불구속 기소하고 국세청으로부터 고발된 대주건설과 대주주택 등 2개 법인에 대해서도 함께 기소했다.

허 회장은 2008년 12월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원을 선고 받았다. 광주지법은 판결문에서 “조세정의나 조세형평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 데다 포탈과 횡령 금액이 수백억원에 이르는 등 죄질이 좋지 않지만 조세포탈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득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점, 법인세 탈루부분에 대해 추징금으로 납부한 점 등을 참작해 형의 집행은 유예한다”고 밝혔다.

이어 2010년 1월 진행된 항소심에서 허 회장은 벌금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관용성 판결’을 받았다. 광주고법은 허 회장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을 선고했다.

광주고법의 이 같은 결정은 2011년 12월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됐다. 검찰은 대법원 확정 판결 후인 2012년 3월 벌금수배를 내리고 그해 6월 토지 등 13건의 재산 압류·인터폴 청색수배 등의 조치를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법조계·언론계
거느리고 특혜

허 회장이 뉴질랜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는 2002년이다. 호주 오클랜드에 대주하우징이란 법인을 설립하며 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65층 규모의 엘리어트 타워 개발사업을 진행하며 현지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조선을 비롯해 해운, 금융 등 15개 계열사로 영역을 확대하던 대주그룹은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유동성이 크게 떨어졌다. 대한조선의 조선소 건립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고 부산 정관지구, 광주 수완지구 등 미분양 사업장이 늘면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알짜 회사인 대한화재를 3500억원에 롯데그룹에 넘기고 청라지구 등 13개 주택사업장을 매각하는 강수를 뒀지만 그룹을 다시 세우기에는 이미 늦었다.

게다가 허 회장이 500억원대 세금을 포탈하고 회사돈 100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룹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허 회장은 현재 벌금을 낼 돈이 없다며 검찰에 납부 연기를 요청했지만, 뉴질랜드에만 14개에 달하는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회사로는 아들이 지분 100%를 가진 KNC 건설을 비롯해 허 회장과 부인이 지분을 각각 46%와 30%를 가진 KNC 건설엔지니어링, 아들이 85% 지분을 가진 KNC 글로벌 매니지먼트 CO. 등이 있다. 이외 허 회장이 지분을 100% 가진 가나다 개발 오클랜드, 투자 코리아 CO.와 부인이 100% 지분을 가진 HH 개발 CO.와 크리스티 부동산 홀딩스가 있다.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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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