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비운의 농구스타 김영희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2.06 12:16:02
  • 호수 14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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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가…비참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한국화장품의 장신 센터 김영희가 점보시리즈 개막 이래 최고의 스타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5㎝에 98㎏의 거구 김영희는 점보 1차 시리즈서 센터답게 1게임에서 한국 여자농구 사상 최고 기록인 52점을 올렸으며 리바운드도 17개나 뽑아내 공수 양면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경향신문>, 공포의 최장신 김영희, 1983)

지난 1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충북 청주체육관에서 열린 청주 KB와 부천 하나원큐 경기 시작에 앞서 추모하는 묵념을 15초간 진행했다. 추모의 대상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LA)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리스트 김영희다. 김영희는 지난달 31일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영희의 별세 소식에 농구계가 슬픔에 잠겼다.

대한민국
최장신

김영희는 대한민국 역대 최장신 여자농구선수다. 205㎝ 키로 한국 여성 중에서도 최장신으로 알려졌다. 김영희가 아기 때부터 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작게 태어나 할머니가 백일기도를 할 정도였다. 김영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165㎝ 정도로 크지 않았다.

장신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는 맨 뒤에 설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5학년 때는 175㎝가 넘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 큰 키는 그 자체로 좋은 자질이 될 수 있지만, 운동선수가 아닌 사람에게는 콤플렉스가 될 수 있다. 김영희는 “어려서부터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 ‘장군감’이라고 말하던 동네 어른들을 피해 멀리 돌아다녔다.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 갔을 때 아이들이 집 앞에 몰려와 ‘거인 나와라’고 외쳐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키가 커서 운동을 시작한 것은 맞다. 중학생 때 감독님이 ‘너는 서서 그물망에 공만 집어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큰 키 때문에 고등학교 때는 러브콜을 많이 받기도 했다”고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학교에서는 김영희 때문에 배구팀을 만들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공부를 중단하고 서울로 상경해 1년 동안 실업 배구팀 생활을 했다. 당시 아버지는 결핵으로 요양 중이었고, 어머니는 생선 행상을 했다. 가난한 집에서 밥 구경도 못하다 서울 실업 배구팀으로 간 후 키는 187㎝까지 컸다.

결국 그가 운동을 선택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 1년 간 국수만 먹은 적도 있었다.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어 시작한 운동이었다. 어린 나이에 제안받은 월급은 김영희에게 큰돈이었다.

김영희가 처음부터 농구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농구와 배구선수를 전전하던 그는 동주여자중학교 농구부 시절 실업팀 한국화장품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큰 키는 축복이었다. 하지만 축복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1981년 한국화장품 여자농구단에 입단한 김영희는 대회 엠블럼에 코끼리 그림이 들어간 점보시리즈가 출범하면서 주목받았다. 1983년 12월11일 한국화장품 대 조흥은행 경기에서 최다인 52점을 넣으며 개인 타이틀 5관왕을 차지했다. 득점상, 리바운드상, 야투투사율상, 최우수상, 인기상이었다. 

큰 키로 고등학교 때부터 러브콜
84년 올림픽 은메달 쾌거 주인공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의 쾌거를 이룬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 공로로 이후 체육훈장 백마장과 맹호장 등을 받기도 했다.


언론은 김영희를 두고 “물찬 코끼리가 나르는 코끼리로 변했다”고 비유했다. 이때가 최전성기로 힘들어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면도 존재했다. 김영희는 성적 지상주의로 인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았다. 특별히 컸던 키는 뇌하수체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성장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과잉 분비되면서 발현된 결과였다. ‘거인증’이라고도 불리는 말단비대증은 초기에는 증상이 없고, 증상도 점진적으로 진행돼 최종 진단을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김영희는 고교 시절부터 병마에 시달렸다. 극심한 두통에 밤새 눈물을 흘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감독에게 훈련 및 경기를 빼달라고 사정하면 어린 선수의 꾀병으로 받아들였다. 아프다고 말하면 사우나에 들어가 몇 시간씩 러닝을 해야 했다. 

통증은 진통제로 해소했다. 경기에 나서기 전에는 독한 진통제를 먹어야 했고, 경기에 뛸 때는 고통을 잊었지만, 밤만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힘든 선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 스피드가 느리다는 지적을 받았다. 3점슛 제도 도입으로 농구 전술이 바뀐 것도 악재였다. 김영희는 “경기에 지면 모든 게 내 탓이었다. 대표팀에서도 벤치에 자주 앉아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체중이 120㎏까지 불어났다.

훈련받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무거워지자, 소속팀에선 체중감량을 요청해 물 한 방울조차 먹을 수 없었다.

1987년 11월 말단비대증 진단을 받았고 운동을 그만둬야 했다. 뼈 성장으로 손발과 얼굴 등은 물론 혀와 같은 연부 조직까지 커졌다. 저혈당 및 갑상선 질환, 장폐색 등 합병증도 김영희를 괴롭혔다. 

1987년 11월은 두통이 극심해졌다. 샤워할 때 머리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다. 이때가 스물다섯살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뇌종양 판정을 받아 꿈을 접어야 했다.

거인병
뭐길래…

김영희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수술실에 들어가려는데 간호사가 기쁜 소식이 왔다고 전했다. 신문에 ‘김영희, 점보시리즈 1000득점 돌파’라고 보도됐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농구공을 손에 놓지 않으며 재기 의지를 이어갔지만 끝내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렇다고 농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수술 직후 훈련을 시작했지만 다시 쓰러졌다. 병원에선 ‘생명이 위독하다’고 우려했다. 이렇게 김영희의 선수 생활이 막을 내렸다.

불행은 파도처럼 찾아왔다. 아버지가 방광암 판정을 받았고, 그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뇌출혈로 1998년 세상을 떠났다. 이어 2000년 세 차례의 암 수술 끝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김영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7개월 가까이 곡기를 끊었다. 130㎏ 나가던 체중이 70㎏까지 빠졌다. 목숨을 끊으려 한 적도 있다. 남동생의 간곡한 설득 때문에 다시 살기로 했다”며 “말단비대증으로 매달 150만원 넘게 드는 성장호르몬 억제 주사를 평생 맞아야 한다. 나를 왜 이렇게 크게 만들어 힘들게 하는지. 하늘을 수도 없이 원망했다”고 회상했다.

김영희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은메달리스트로 체육 연금 20만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 돈으로 한 달을 연명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부산의 8평 남짓한 아파트서 홀로 거주하며 계속되는 생활고를 겪었다. 어떤 때는 보름도 안 지났는데 7000원만 남은 적도 있었다. 

한 번 입원하면 2개월 넘게 했다. 안 좋은 일이 겹치면서 불안증, 우울증이 심해져 3~4년간 집 밖을 나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에 난방을 틀지 않고 울기도 했다. 

2002년 KBS <추적 60분> 방송팀이 김영희를 찾아왔다. 국가대표였던 김영희의 어려운 삶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것이었다. 방송팀과 함께 병원에 간 김영희는 자신이 거인병에 걸렸단 사실을 몰랐다. 은퇴 당시까지도 뇌하수체 종양으로 몸이 불편한 줄만 알았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은 김영희를 좌절시켰다.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었다.

지독한 병마
나눔의 시작


김영희는 “당시 국가대표 선수 연금으로 매달 받는 2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당연히 수술비도 없었고, 간병해줄 사람도 없었다. 너무 서러워서 주저앉아 울었다. 병원에선 3일 동안 수술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했다. 3일 뒤 그냥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당시 그는 “밖에 나가도 사람들이 다 저를 피한다. 너무 큰 몸 때문에. 지금 제 모습이 너무 싫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영희는 “그랬더니 병원에서 저와 비슷한 거인증을 앓던 남성이 약물치료로 나은 사례가 있다면서 수술 말고 치료를 권했다. 매달 주사 한 번 맞고 약 타는 데 300만원씩 들었다”며 “감사하게도 병원에서 ‘10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국위 선양한 만큼 도움을 주자’고 결론내렸다. 이분들의 나눔으로 생명이 연장된 것”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도움의 손길은 또 이어졌다. 한 택시기사는 10년 넘게 몸이 불편한 김영희의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했고, 집주인은 “평생 전세금을 올리지 않을 테니 이곳에서 편하게 오래오래 살라”고 배려했다.

쌀과 음료 등 식재료가 떨어질 때마다 몰래 채워주기도 했다. 제주도서 겨울마다 한라봉을 보내주는 따뜻한 이웃도 있었다. 선수 시절 혼자 경기를 보러 왔던 한 장애인은 김영희의 소식을 들은 뒤 매달 5만원의 성금을 보냈다. 

이런 김영희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있다. 바로 어머니의 유언이다.

모친은 “엄마, 아빠 다 죽고 너 혼자 되면 남에게 먼저 베푸는 삶을 살아라. 너가 나중에 늙어 걷기도 힘들 때 누가 널 도와주지 않는다”며 “힘들어도 누군가를 부축하고 일으켜야 너도 살 수 있다. 너가 먼저 고개 숙이고 베풀어야만 다른 사람들도 너를 돌봐주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기초연금과 메달 포상연금 등으로 생활한 김영희는 면도날 끼우기, 양말 실밥 제거, 전자제품 조립 등 가내 부업으로 장애인과 소년소녀 가장 등을 도왔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쌀 같은 구호품 등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줬다. 그렇게 하루 버는 돈은 1만원도 되지 않았지만, 김영희는 행복했다.

장애인 자원봉사는 김영희를 부끄럽게 했다. 불편한 몸으로 양말을 신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홀몸 노인에게 팥죽을 끓여주기도 하고 자신을 놀리던 꼬마들에게는 과자와 사탕을 건네기도 했다.

승합차에 과자, 음료수, 떡, 양말을 가득 싣고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중증장애인 시설을 찾았다. 김영희가 문에 들어서자 50명의 장애 아이들이 겁을 내며 달아났다. 처음엔 쭈뼛거리며 다가오지 않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져 결국 친구가 됐다.

말단비대증 합병증으로 선수 생활 중단
“장애인 봉사 시작으로 우울증 치료해”

김영희는 아이들이 신고 있던 낡은 덧버선을 예쁜 수면양말로 바꿔 신겼다. 다리와 발가락이 휘어져 양말을 신기조차 어려운 친구를 만났을 땐 눈물이 흘렀다. 

이런 경험은 그의 삶을 바꿨다. 자신이 가진 아픔으로 끙끙 앓던 과거 모습을 부끄럽게 느꼈다. 헤어질 때면 손을 꼭 잡고 가지 말라고 외치던 아이들의 모습이 항상 눈에 아른거렸다.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시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양손 가득 물품을 들고 찾아갔다. 그렇게 김영희가 다녀간 장애인 시설 및 보육원만 4곳이다.

김영희의 모습을 본 동네 주민들도 나눔에 동참했다. 인근 중국집 사장은 “혼자 좋은 일 하지 말고 같이하자”며 70인분 자장면을 들고 장애인 시설을 방문했다.

성금을 걷어 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증상이 악화된 이후부터는 독거노인을 위한 나눔을 시작했다.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기엔 걷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동네에는 혼자 사는 노인이 많았다. 김영희는 보름을 굶었다는 할아버지를 위해 갈비탕을 사 드렸다. 동네 노인이 김영희의 집에 오면 호박죽도 만들고 가락국수도 만들어 대접했다. 남은 음식은 용기에 담아 싸드리기도 했다.

먼저 다가가니 사람들도 그에게 다가왔다. 이때부터 김영희의 별명은 ‘거인 아줌마’에서 ‘이쁜이’로 바뀌었고,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됐다. 이웃은 “아픈 데 없냐” “밥은 먹었냐”며 매일 찾아와 음식을 나눠줬다. 김영희는 혼자 사는 어른과 한 가족처럼 의지하며 지냈다. 덕분에 심각했던 외로움과 우울증을 떨쳐낼 수 있었다.

평생을 미혼으로 살아온 김영희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아래층에서 조부모와 함께 사는 어린 자매에게 김영희는 또 다른 엄마였다. 성금이 들어올 때마다 생활비, 병원비는 물론 컴퓨터 등 필요한 학용품도 사줬다.

그렇게 8년간 아이들을 키웠고 고민 상담도 했다. 김영희는 “학교서 친구들이 계속 돈을 가져오라고 한다고 울었다. 안 그러면 엄청나게 맞는다면서 우는데, 나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학교 교장 선생님께 전화해 학교폭력을 해결해 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며 “담임 선생님이 찾아와서 아이 이야길 천천히 듣고는 해결을 약속했다.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됐고, 지금도 ‘이모 보고 싶다’며 연락이 온다”고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따뜻하게
기억되길

김영희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따뜻함은 여전하다. “제가 좋아하는 시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하늘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그렇게 살라 하네.’ 저도 그렇게 살고 싶다.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 키가 큰 여자가 있었는데, 마음은 솜사탕이더라’는 기억을 남기고 싶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 덩치에 마음이 좋으면 안 된다.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이야말로 나눔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절망 속에 있던 제가 일어선 것처럼.”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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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