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베트남 축구 영웅 박항서

베트남 뒤집고 돌아온 ‘쌀딩크’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스포츠 감독이란 잘해야 본전인 자리다. 여간해선 박수받으며 떠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은 달랐다. 베트남 국민은 지난 5년간 ‘마법’을 선보인 그의 마지막을 뜨거운 환호로 배웅했다. ‘백수’ 감독과 축구 변방국이 함께 일궈낸 기적은 우리 국민들마저 놀라게 했다. 일명 ‘쌀딩크’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축구계에선 인간적인 리더십과 발상의 전환 전술을 꼽는다.

비록 완벽한 마무리는 아니었지만,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쌀딩크’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과의 동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은 지난 16일, 태국 빠툼타니 탐마삿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년 아세안축구연맹(AFF) 축구선수권대회(미쓰비시컵) 결승 2차전에서 0-1로 패했다.

2018년 이후 4년 만에 우승컵 탈환을 노리던 베트남은 대회 최다 우승국인 태국에 가로막혔다. 앞서 박항서호는 베트남에서 열린 1차전에서 2-2로 비겼다. 이들은 결국 합계 점수 2-3으로 밀리며 대회를 준우승으로 마무리했다. 

5년의 매직
뜨거운 안녕

임기가 이달 말까지인 박 감독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박 감독의 지도력은 이미 동남아 축구계에서 널리 인정받은 지 오래다. 이는 이번 대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승에서 마주친 ‘적장’도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태국 축구 대표팀의 누안판 람삼 단장은 박 감독에 관해 “그를 정말 존경한다.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를 바꿔놨다. 나아가 동남아시아 축구의 판도에 변화를 일으켰다”며 칭찬했다. 이어 “현재 세계 랭킹도 베트남이 96위, 태국이 111위로 차이가 있다. 베트남 선수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졌다”며 박 감독을 추켜세웠다.


박 감독은 이날 경기 종료 후 베트남 사령탑으로 참여하는 마지막 공식 기자회견에 임했다. 박 감독은 “이제 나는 더는 베트남 감독은 아니지만, 베트남과 베트남 U23 대표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팬이 될 것”이라며 “서로 좋은 추억을 영원히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마지막 경기 후 여전히 실망과 아쉬움이 있다. 나와 팀이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고 싶기도 하다”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선수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슬픔을 위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고 전했다.

박 감독의 삶은 두 번의 우연으로 크게 뒤바뀌었다. 박 감독이 축구계에 발을 들인 것도, 베트남으로 향한 것도 모두 그가 쉽사리 예상했던 길은 아니었다.

박 감독은 1957년 10월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경찰 간부 출신 아버지는 직무 중 부상을 입었던 국가유공자였다. 어머니는 지역 명문 진주여고를 나왔다. 이들은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했고, 그 덕에 박 감독은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 편에 속했던 그는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장래희망이 군인이었다. 그는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당초 목표였던 배재고 입학시험에 낙방했다. 대신 경신고로 향한 박 감독은 배재고 낙방에 좌절하던 중 훈련하는 축구부원들을 목격했다.

알고 보니 당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불리던 차범근이 경신고 축구부 출신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 감독은 비록 늦깎이일지라도 축구부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키 166㎝에 깡마른 체격, 전무한 경력 등이 걸림돌이었다. 경신고 축구부가 마땅한 강점이 없어 보이던 박 감독을 받아줄 리 만무했다.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던 박 감독은 인맥을 활용한 ‘낙하산’ 작전까지 불사했다. 그는 당시 경신고 축구부 감독과 절친했던 친척에게 부탁해 기어코 축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축구 무경력자가 출전 기회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늦깎이 축구선수·짧은 선수 생활…특이한 이력
베트남 지휘봉 잡고 대반전 일궈 국민 영웅 등극

당시 박 감독은 반년간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운동부에 들며 학사관리가 미흡해진 탓에 1년 유급까지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종일 축구공을 가지고 훈련하며 실력을 빠르게 키워나갔다. 어느새 탄탄한 기량을 갖춘 미드필더가 된 그는 1976년 전국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결승 골을 넣었다. 이 골로 경신고는 우승컵을 들었다. 한양대 진학 이듬해인 1978년에는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박 감독은 한양대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팀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했다. 실업 선수로 데뷔한 직후 곧바로 육군 축구단에 입대해 군 복무까지 마쳤다.

전역한 박 감독은 1984년 럭키금성 황소에 창단 멤버로 입단해 프로 무대에 섰다. 현역 시절 등번호는 12번이었다. 그는 1985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동시에 리그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듬해에는 팀 주장으로 선임돼 팀의 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시즌이 끝난 후 돌연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호적상의 나이 29세, 실제론 31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결국 실업팀, 군 복무 기간을 뺀 박 감독의 선수 생활은 단 4년에 불과했다.

박 감독이 성인 대표팀으로 뛴 경기는 선수생활을 통틀어 1경기뿐이다. 그는 1981년 3월 한일 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뛰었다.

대신 박 감독은 이른 나이에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은퇴 후 친정 팀인 LG 치타스(전 럭키금성 황소)의 트레이너로 선임돼 1996년까지 활동했다. 이후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합류해 2000년 시즌 시작 전까지 직을 수행했다.

국가대표 코치진에도 수차례 발탁됐다. 1994년에는 미국 월드컵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김호 감독을 보좌했으며, 2000년 허정무 감독의 사퇴 뒤, 후임 감독을 보좌할 수석코치로 내정되기도 했다. 그해 박 감독은 12월20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에서 감독대행 자격으로 경기를 지휘했다.

2002년엔 히딩크호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한일월드컵 대표팀에서 감독과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감독은 4강 진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남긴
대기록들


월드컵 이후 2002 부산아시안게임 대표팀을 맡아 처음으로 감독직에 부임한다. 하지만 월드컵 4강 주역들을 일부 대동하고도 동메달에 그치자, 비판 여론이 빗발쳤다. 물론 일각에선 월드컵 준비에 너무 치중했던 나머지 아시안게임이 졸속으로 준비된 점, 전적만 놓고 보면 9전 7승 1무 1패(승부차기)였던 점 등을 감안하면 비판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박 감독은 결국 해임됐다.

그는 K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포항 스틸러스 코치를 거쳐 전남 드래곤즈 기술고문을 맡았다. 사실 박 감독은 당초 전남 감독직을 제안받았으나, 허 감독이 대표팀 수석코치를 그만두고 전남 감독으로 급히 부임하는 바람에. 사실상 명예직 수준이었던 기술고문 자리로 밀려났다.

그가 첫 프로 팀 감독을 맡은 곳은 고향을 연고지로 한 경남FC였다. 이후 전남 드래곤즈, 상주상무, 창원시청축구단 등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지도자 세대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17년, 팀을 나온 박 감독은 자신의 감독 생활도 사실상 끝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동남아 진출을 제안하며 에이전트와 직접 연결해줬다고 한다. 

며칠 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제의가 왔다. 박 감독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박 감독의 삶과 베트남의 축구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신의 한 수’가 됐다.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 A대표팀과 23세 이하(U-23) 대표팀 지휘봉을 동시에 잡으며 전권을 부여받았다. 박 감독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0위권에 있던 베트남 축구를 100위권 이내로 진입시키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박 감독의 지도를 받은 베트남은 2018년 초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이라는 돌풍을 일으키며 주목받았다. 이어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역사상 최초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2019년에는 동남아시안게임(SEA)에서 60년 만에 베트남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2020년 5월에는 자국에서 열린 SEA에서 2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아울러 A 대표팀도 눈에 띄는 성과를 여럿 남겼다. 2018년 AFF컵 대회에서 우승에 성공했다.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 진출에 성공했고, 지난해에는 베트남 최초로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이뤄냈다. 더 나아가 중국을 제압하며 최종예선 첫 승을 기록했다.

파파 리더십
동행 마무리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 베트남 정부는 박 감독에게 훈장을 3개 수여했다. 베트남 국민은 박 감독 재계약·연봉 인상 운동을 벌였다. 박 감독은 국민적인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서 여러 광고에 출연했고, 그를 주제로 한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도 개봉했다. 

이에 박 감독 한 명으로 양국 관계가 진전되는 듯한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우리 정부는 이 공로를 인정해 지난달 초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 방한으로 마련된 국빈만찬에서 박 감독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했다. 

박 감독의 성공 배경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에 따른 실리 추구형 전략이 깔려 있다. 박 감독은 부임 직후 베트남 선수단의 근본적인 약점으로 기술과 전술 이해도 부족을 꼽았다. 심지어 지금도 박 감독의 전술을 완전히 이해하고 움직이는 선수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축구계의 평가다. 

박 감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소 독특한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우선 그동안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용하던 4백 전술을 버리고 3-4-3 전술을 채택했다. 박 감독은 최후방 3백의 좌우를 일반적인 3백의 중앙수비수 2명 대신, 팀에서 가장 볼 간수를 잘하는 미드필더 선수들로 기용했다. 

비록 3백이지만 좌우 사이드백이 마치 측면수비수처럼 빌드업에 가담하게 한 것이다. 대신 미드필더 4명 중 중앙의 2명은 왕성한 체력과 속도를 앞세워 유사시 중앙수비수 역할을 병행하도록 했다. 사실상 중앙수비수와 중앙미드필더들의 자리를 바꾼 것이다.

베트남은 이 역발상을 통해 전술 이해도가 떨어지는 와중에도 질서 있는 공격·수비 전개가 가능해졌다.

냉철한 현실 인식, 실리축구 전략
따뜻한 리더십으로 선수단 이끌어

사실 이것이 완벽한 전술은 아니다. 상대의 최전방 공격수가 중앙 수비수들을 강하게 압박하면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상대 2선 공격수들의 공격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감독은 베트남 대표팀의 경쟁상대로 꼽히는 국가 사이에선 큰 위협이 되는 공격수가 많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그대로 적중했다.

박 감독은 ‘파파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그는 부임 후 베트남 문화를 존중하고 선수들을 자식처럼 대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2018년 12월 스즈키컵 당시, 결승 1차전을 위해 말레이시아로 이동하던 중 비행기에서 부상 선수에게 자신의 비즈니스석을 양보한 미담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또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기자회견 중인 박 감독에게 물을 뿌리며 깡충깡충 뛴 적이 있었다.

이때 박 감독은 싫은 내색 없이 선수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선수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였다. 박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박 감독은 선수단과 소통하기 위해 먼저 다가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대회마다 직접 의무실을 찾아가 부상 중인 선수들을 직접 위로했고,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선수들에겐 따로 양해를 구했다.

박 감독은 아직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국내 감독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박 감독이 직접 선을 그었다.

그는 지난 17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전에도 베트남과 한국에선 감독을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다”며 “한국에는 저보다 훌륭한 후배, 동료가 많다. 한국에서 현장 지도자로서 할 역할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가 성격상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못 한다”며 “소속사 대표가 제 미래에 대해 몇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도 생각해봐야 한다. 가족들과도 상의해야 할 부분이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저에게 적합한지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분명한 건 제가 축구를 가장 잘할 수 있으므로 축구계에 종사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박 감독은 행정가로 일할 생각도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국내에서 협회나 연맹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행정적인 건 제 능력이 안 된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제안이 온다면 고려하겠지만, 협회나 연맹에 갈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한국과 베트남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제안이 온다면 충분히 관심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은
어디로?

당장 다음 월드컵부터 종전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본선 참가국이 늘어났다. 아시아 국가의 본선 진출 자리가 늘어나면서, 이를 노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국가들이 박 감독을 영입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 감독 역시 아직 사령탑 자격으로 월드컵에 나서본 적이 없는 만큼, 이는 동기 부여를 명확하게 주는 제안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박 감독은 “이번 카타르월드컵 개최국 카타르를 보면서 월드컵에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며 “부족하지만, 저를 불러준다면 한 번 생각은 해볼 것이다. 하지만 저를 불러주는 팀이 있겠느냐”고 웃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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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