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혼이 급증하고 있다.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는 말이나 ‘수십 년 참았는데 다 늙어서 이혼하면 뭐하느냐’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지금의 중년 또는 노년 부부들은 서슴없이 이혼을 결심하고 있다. 자식이나 남들의 이목보다는 노후의 행복이 더 큰 가치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황혼이혼을 부추기는 또 다른 이유로는 수명이 길어진 데 반해 퇴직 시기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 꼽힌다.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오히려 부부생활에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황혼이혼을 원하는 부부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동 가정법원에는 이날도 이혼을 원하는 부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 중 눈에 띄는 부부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60대 부부. 한눈에 보기에도 서먹서먹한 이들 부부는 ‘황혼이혼’을 하기 위해 법정을 찾았다.
노년이라도 행복하게
대부분의 황혼이혼이 그렇듯이 이 부부 역시 이혼을 원하는 쪽은 부인이었다. 35년 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잔 A씨(남편)와 B씨(부인)가 이혼하려는 이유는 젊은 부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격차이’가 그것.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의 남편을 더는 참기 힘들다는 것이 부인이 내세우는 이혼의 이유였다.
B씨는 “젊은 시절에는 자식들 때문에 억지로 살았다. 늙으면 좀 나아지겠거니 하면서 수십년을 살았지만 독불장군 같은 성격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책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B씨는 남편이 10여 년 전 명예퇴직을 한 뒤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고 털어놨다. 대기업을 다니던 A씨는 IMF 시절 ‘명퇴’를 당했고 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지면서 사이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것. B씨는 “회사에 가 있는 시간만큼은 자유로웠는데 하루 24시간을 남편과 함께 부대끼니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히게 됐다”고 말했다.
당장에라도 이혼을 하고 싶었지만 B씨가 오늘까지 참은 것은 막내아들의 결혼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부모가 이혼을 했다면 사돈 집안에서 색안경을 쓰고 볼 것이 두려워 결혼을 할 때까지 참고 참았다고.
B씨는 “남편은 이혼을 반대하지만 평생 저 성격을 받아 주며 불행하게 살기는 싫다”며 확고히 이혼의 뜻을 밝혔다.
59세의 주부 C씨도 황혼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이유는 재산문제. 젊은 시절 고생하며 벌어 놓은 돈을 남편과 함께 쓰면서 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C씨의 남편 D씨는 젊은 시절 외도로 딴 살림을 차리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신 가정경제를 이끌어나간 것은 C씨.
노점상으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며 갖은 고생을 다 한 C씨 역시 자식들 때문에 이혼을 미뤄왔다. 그리고 60을 코앞에 둔 지금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중이다. 10억원에 가까운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남편을 더는 봐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C씨는 “미운정도 정이라지만 더는 남편을 미워하며 한집에 살고 싶지 않다”며 “하루빨리 이혼해 남은 인생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다”고 토로했다.
이들 부부처럼 황혼이혼을 했거나 결심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전체 이혼수는 줄었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남남으로 갈라서려는 중년 또는 노년 부부들의 수는 오히려 늘었다.
통계청이 지난달 27일 발표한 ‘2008년 이혼통계’에 따르면 2008년 이혼은 11만6500건으로 2007년의 12만4100건에 비해 7500건(6.1%) 줄었다. ‘홧김 이혼’을 줄이기 위한 이혼숙려제의 효과 때문이라는 것이 통계청의 분석이다.
그러나 황혼이혼은 오히려 늘었다. 20년 이상 같이 산 부부들의 이혼건수가 지난해 2만6900건으로 2007년보다 1900건이 증가한 것. 전체 이혼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96년 8.9%에서 지난해에는 23.1%로 두 배가 넘게 늘었다. 연령별로 보면 50세 이상에서 이혼한 건수가 남성의 경우 12.9%, 여성의 경우 16.9%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10여 년 전 일본에서 건너 온 황혼이혼이 오늘날에는 많은 중년 혹은 노년부부들이 한번쯤 생각해 보는 단어로 변화한 것이다.
처음 일본의 황혼이혼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우리의 문화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일본의 중년부부 사이에서는 유행처럼 황혼이혼이 번졌다. 젊은 시절 남편의 횡포를 꿋꿋하게 참았던 여성들이 남편이 퇴직을 하고 퇴직금을 받자마자 이혼을 요구해 퇴직금의 절반을 요구하는 것이 처음 시작된 황혼이혼의 방식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경우 이혼은 청년부부들이나 하는 것이란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노년에 부부의 연을 끊는다는 것에 문화적인 충격을 받는 이들이 많았던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사회의 많은 부분이 변화되면서 황혼이혼이 보편화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대등한 인격체로 대해야
전문가들은 황혼이혼이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로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을 들고 있다. 참고 살아 온 만큼이나 여생이 남아있다는 것이 부담감으로 작용해 나이를 먹어서라도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
또 다른 이유는 퇴직연령이 점차 어려진다는 것이 꼽히고 있다. 명예퇴직, 조기퇴직 등으로 직장생활이 짧아지면서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느는 것이 오히려 부부에게 독이 된다는 것이다. 부딪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갈등 또한 깊어지는 것이 황혼이혼의 큰 요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경기침체로 퇴직시기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돼 이로 인한 이혼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결혼 초기부터 배우자를 삶의 소중한 동반자로 여기고 서로를 대등한 인격으로 여기는 노력을 하는 것이 황혼이혼을 막는 방법일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