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 ⑤미화·과장된 사무라이

2014.09.22 12:06:54 호수 0호

"사무라이는 야만적인 싸움꾼에 불과"

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연재한다.



이 화려한 문화는 그의 수하 무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부하 무장으로 있을 때부터였다.

여러 책에 나오는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오다 노부나가’의 수하 무장으로 전선을 누비면서도 갑옷과 말 장식 등이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12만 석의 영주가 되어 영지에 입성할 때, 갑옷은 금으로 장식을 했고, 투구는 은으로 만든 것을 썼으며, 깃발에는 금으로 만든 표주박을 달고, 부하 무사들에게는 자주색 비단옷을 입혔다고 했다.

꾸며진 이미지

호화롭게 치장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거의 모든 가신급 사무라이들은 화려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당시 고위급 사무라이들의 갑옷과 투구는 단순히 전쟁에서 몸을 보호하는 이상의 예술성을 지닌 화려한 것이었다. 이 갑옷과 투구는 한국이나 중국은 물론 유럽 무사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매우 화려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갑옷과 투구로 평가될 정도이다.

심지어 일부 사무라이는 상투에 향을 넣고 다니기도 하였다. 당시 향은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하는 값비싼 물품이었다. 다도에 열광했던 ‘도요토미’는 오사카 성에 아예 황금다실을 만들었다. 방 한칸을 전부 황금으로 만들고, 거기에 장식한 그림과 병풍도 황금박이로 만들고, 차를 마실 때 사용되는 찻잔과 탁자 등 다구들도 전부 황금으로 만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모모야마(桃山) 문화를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좋게 말해서 문화이지, 그 실상은 바로 사치였다. 사치도 보통 사치가 아닌 도를 넘어선 사치였다. 갑옷을 금으로 장식하고, 투구는 은으로 만들고, 방 전체를 황금으로 꾸미는 사치였다.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고위급 가신들 또한 화려한 갑옷에 은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머리에는 비싼 향을 넣고 예복으로 ‘가미시모도’라고 하는 화려한 옷을 입는 등 나름대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겐로쿠’라고 하는 화려하게 염색된 옷이 유행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평화가 찾아온 에도시대에 들어오면서 무사들의 생활은 더욱 사치스러워졌다. ‘아사히 분자에몬(朝日文左衛門 : 1673~1718년)’이라는 에도시대의 하급 무사는 그의 나이 18세가 되는 1691년부터 사망 일 년 전인 1717년까지 약 27년간을 상세하게 기록한 오무로추기(鸚鵡籠中記 : 앵무롱중기)라는 37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일기를 남겼다.

사치스럽고, 허세 가득했던 사무라이
청빈한 생활은 허구로 꾸며진 이미지


고작 100석의 영지를 받는 하급 무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여 회나 연극을 관람한 기록이 있고, 즐겨먹던 맛있는 먹거리에 대한 자세한 묘사, 만나서 놀았던 여자들에 대한 기록, 그리고 즐기던 도박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생활 모습을 통하여 볼 때 당시 무사들의 생활이 얼마나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절제되고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당시의 사무라이들이 일본 역사상 가장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맞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일부 사무라이들은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불교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는 사무라이들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사무라이들이 생활의 규범 내지 사회적 관념으로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을 미덕으로 여기고, 주어진 생활 여건보다 의도적으로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가식되고 미화된 얘기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맞는 얘기가 아니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배운 것 없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며,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허세부리는 것을 좋아하던 단순한 싸움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무라이를,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는 서양의 기독교 정신과 상통하는 근검과 청빈을 강조하는 청교도적인 모습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서양의 기사도를 거론하고, 셰익스피어 작품까지 들먹거리면서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지만, 이 모든 것이 근거 없는 허황된 주장이었고, 일본 정부는 이 왜곡된 사실을 더욱 과장시켜가면서 자국 국민을 세뇌시켰던 것이다.

셋째는 사무라이가 ‘의와 명예’를 목숨같이 중요시했다는 것도 미화되고 과장 되어 있다. 전국시대 당시의 여러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사무라이들은 주군의 뜻에 어긋나는 바른말 한마디, 주군의 뜻을 거스르는 고집 한번 제대로 부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매사에 주군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을 것이다. 신하된 도리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군(主君)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충(忠)이라고 강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군이 올바르지 못한 명을 내렸을 경우 이에 복종하는 것을 충(忠)이라고 할지 몰라도 결코 의(義)라고 할 수는 없으며 명예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충(忠)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맹종하는 행태에서는 결코 ‘의’와 ‘명예’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의’와 ‘명예’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관철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주군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하고, 주군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행태에서 나오는 것은 아부뿐이다. 사육신처럼, 그 모진 고문과 형벌 속에서도 단종을 향한 충절을 꺾지 않았던 그 충정에 ‘의’가 있고 ‘명예’가 있는 것이다.

아부에만 열중


물론 일부 사무라이들이 ‘의’와 ‘명예’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경우도 있었다. 사무라이 책을 보면 감동을 주는 훌륭한 인물들의 얘기가 많이 나온다. 어찌 일본엔들 충신이 없고 영웅호걸이 없었겠는가. 일부 학자들이 이러한 감동을 주는 사무라이들의 행동을 들어 사무라이 정신이 있었다고 주장하나, 감동을 주는 충신의 이야기, 귀감이 되는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아프리카 우간다 사람들도 그들의 영웅 이야기를 한다. 특별히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영웅호걸들의 행동 때문에 일본에 사무라이 정신이 있었다고 강변한다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 있었던 영웅호걸들의 행동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들에게도 사무라이 정신과 비슷한 어떤 정신적, 도덕적 개념이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그들의 충신이나 영웅의 행동에 그러한 개념을 붙이지 않고 있다. 단순히 충신 또는 영웅호걸로서 존경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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