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기획>충격의 토요일! 노무현 서거⑦ 전직 대통령 수난사

2009.05.26 11:28:33 호수 0호

무소불위 권력 끝은 언제나 모진 풍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전직 대통령들의 수난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노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정점에 섰던 9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부분 하야와 시해, 검찰 수사를 겪는 등 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 속 모진 풍파에 휘말렸던 전직 대통령들의 뒤안길을 좇아가 봤다.



‘대통령’은 권력의 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대통령직이 생긴 이후 권력의 달콤함을 맛봤던 이들의 말로는 씁쓸했다.

전직 대통령의 수난사는 초대부터 3대 대통령으로 1948 ~1960년 재임한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전 대통령은 반공에 기초해서 당시 강대국들의 정치적 각축전 아래서 나름대로의 외교력과 국가관으로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정부를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원치 않아도 쫓겨가고

그러나 끝은 좋지 못했다. 건국 초기에 필요한 국민통합과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초법적·권위주의적·폭력적 정치형태로 12년간의 장기집권을 시도한 과욕이 화를 부른 것. 3선 개헌과 3·15 부정선거로 이어진 이 대통령의 권력욕은 1960년 4·19 혁명이라는 역풍으로 이어졌다.

이 전 대통령은 결국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 그는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망명길에 오르면서 사법심판은 피해갔으며 대신 최인규 당시 내무부장관 등 측근들만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전 대통령의 뒤를 이은 윤보선 전 대통령은 내각책임제 하의 상징적 대통령이었다. 실질적인 국가지도자 역할을 했던 장면 총리와 갈등하고 사회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지 못해 5·16 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 도중하차했다.

1974년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1976년 명동성당 3·1구국선언 사건으로 징역 8년, 1979년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는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사법처리됐다. 검찰의 직접 조사를 받지 않았으며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겨져 법원 선고 후 형집행면제 처분을 받았으나 최초로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5~9대 대통령직을 지내면서 경제개발과 남북관계 발전에 물꼬를 트는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비극이 되어 돌아왔다.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유신’으로 종신집권체제를 획책하다 1979년 10월26일에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 ‘박통’이라 불렸던 박 전 대통령은 ‘시해’로 18년의 장기집권을 마무리했다.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 갑작스레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 전 대통령은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우유부단한 성품에 무책임한 행동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의 성립을 가능케 했다는 이유에서다.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 권한을 한 번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최 주사로 불렸으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민주주의 잔혹사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한 헌정사상 최단명 대통령이었다.

1989년 12월 국회광주특위의 네 차례에 걸친 출석 요구와 임의동행명령을 모두 거부, 국회모욕죄 등으로 형사고발됐지만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12·12 군사쿠데타와 1980년 5·18 광주사태를 통해 차례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시절 12·12 쿠데타를 주도한 혐의와 6공화국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면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년가량 복역하다 사면조치로 풀려났다.

노 전 대통령은 첫 검찰 소환과 첫 구속이라는 불명예를 동시에 안게 된 전직 대통령이며, 전 전 대통령은 친구였던 노 전 대통령에 의해 1986년부터 1991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백담사에 유배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열어 본격적인 민주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임기 말 IMF 위기를 초래, 1998년 검찰에서 참고인 신분으로 서면조사를 받았다.


또한 차남 현철씨가 그의 재임 시절인 1997년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현철씨는 김 전 대통령의 퇴임 후인 2004년에도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교체를 이루며 집권에 성공했다. 남북관계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IMF 위기를 극복했으나 ‘게이트 공화국’ ‘3홍 게이트’로 불린 친인척 권력형 비리에 휩싸였다. 임기 말 차남 홍업씨와 3남 홍걸씨가 기업체로부터 청탁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것.

두 아들이 한 달여 사이에 차례로 구속되자 김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사과를 했다. 본인은 퇴임 직후인 2003년 대북송금 특검에서 수사 선상에 올랐으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 수사기간 연장 요청을 거부하면서 직접 조사는 받지 않았다.

퇴임 후 검찰 신세 ‘톡톡’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전임 대통령들이 겪은 비운을 피해가지 못했다. 높은 도덕성을 세우며 참여정부를 이끌었지만 퇴임 직후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에 연루되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로 검찰 소환조사를 받는 불명예를 안은 것.

참여정부 측근들과 친형 건평씨와 부인, 아들 등 가족까지 수사를 받자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면서 홈페이지를 닫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수사 도중 봉하마을 사저 뒷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전직 대통령 수난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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