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푸틴의 종전 카드, 트럼프 평화안과 재편되는 유럽 질서

2025.12.01 09:20:29 호수 0호

우크라이나 전쟁 3년 차, 상황이 다시 급격히 출렁이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 “우크라이나군이 철수하면 즉시 전투를 멈출 것”이라는 조건부 종전 의사를 밝히면서 전쟁의 향방은 돌연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평화안을 “향후 협정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고 평가하며 협상 모드로 선회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 ‘유화 제스처’ 속에 감춰진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우크라이나군 철수 요구, 젤렌스키 대통령 배제, 점령지 인정, 전략적 안정과 핵실험 카드까지, 푸틴은 외교·군사·국내정치·정보전이 결합된 복합 전략을 동시에 전개하고 있다.

문제는 푸틴의 전략이 유럽 안보지형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미국 내 트럼프식 외교의 방향을 좌우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기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우크라이나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지인과 대화하면서 푸틴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푸틴의 조건부 휴전 전략

푸틴의 발언은 단순한 조건부 휴전을 넘어 전장의 힘을 외교 테이블로 끌어오는 전형적 전쟁과 외교 병행 전략이다. 그는 지난달 27일, CSTO 정상회의 직후 우크라이나군이 현재 위치에서 철수하면 전투를 중단하겠다고 밝혔고, 반대로 철수하지 않으면 군사적 수단으로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경고했다.


휴전 제안과 군사 압박을 동시에 제시한 것이다.

이 발언은 휴전의 진정성이 아니라 먼저 완충지대를 확보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한 뒤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략적 의도로 보인다. 그는 전황 보고에서도 포크로우스크·미르노흐라드·볼찬스크 등 주요 격전지에서 포위가 완성됐다고 강조하며 러시아군의 군사적 우세를 과시했다.

우크라이나군의 병력 손실과 탈영 증가를 부각한 것도 정보전에 가깝다. 이는 우크라이나군의 사기를 흔들고, 미국과 유럽 내부의 전쟁 피로감을 자극해 정치적 압박을 키우려는 계산이며, 결국 ‘조건부 종전 선언’은 휴전 제스처라기보다 향후 군사 공세의 명분을 쌓는 데 더 방점을 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평화안의 진짜 핵심

푸틴은 트럼프 평화안이 향후 종전 협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강조한 핵심은 평화안 자체가 아니라, 영토 문제의 처리 방식이었다. 그는 미국 문서를 정식 합의안이 아닌 ‘쟁점 목록’으로 규정하면서도 논의할 가치는 인정했다. 그러나 협상의 중심은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데 있다고 못 박았다.

푸틴에게 이 두 지역은 이미 헌법에 편입된 ‘국가 영토’이며, 그는 트럼프 평화안을 이용해 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절차로 연결하려 한다. 이는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고 러시아가 설정한 전선을 국제 기준으로 굳히기 위한 설계다. 푸틴에게 실질적 목표는 영토 확정에 있다.

결국 트럼프 평화안은 중립적 해법이 아니라, 러시아가 만든 영토 현실을 제도화하는 도구에 가깝다. 푸틴의 진짜 목표는 크림반도·돈바스의 공식 승인과 우크라이나군 철수를 통한 전선 고정이며, 그는 전투 중단을 조건으로 내세운 완충지대 구상을 활용해 전쟁에서 얻은 이익을 장기적으로 봉인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필자도 이 지점에서 트럼프 평화안이 ‘중립적 제안’이 아니라, 러시아가 형성한 전선을 제도화하려는 장치라고 본다.

젤렌스키 배제 의도 노출

푸틴이 이번에 반복한 핵심 메시지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협상 상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젤렌스키의 임기 만료와 계엄령 하의 선거 미실시를 근거로 현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법적 정당성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이들과의 종전 협정은 국제적 승인도 어렵다고 강조한다.


이 발언은 단순한 공세가 아니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우크라이나 내부 정치 재편을 요구하는 압박이다. 푸틴은 협정 체결 의지를 언급하면서도 현 지도부와는 협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으며, 사실상 “협상 가능한 새로운 파트너를 세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 평화안의 ‘협정 후 100일 내 선거’ 조항이 겹치며, 푸틴의 정당성 부정 논리와 트럼프식 조기 선거 요구는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정치체제의 재구성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된다. 푸틴은 이 조항을 이용해 자신이 원했던 협상 파트너 교체 요구를 국제 협상 명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위트코프 논란과 유럽 반발

미국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와 러시아 우샤코프 보좌관의 통화 녹취 유출은 이번 국면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녹취에는 위트코프가 러시아 요구에 공감하거나 조언하는 듯한 장면이 담겼다는 보도가 나오며, 우크라이나 정치권은 즉각 강하게 반발했다.

우크라이나 의원들은 위트코프를 중립적 중재자가 아니라, 사실상 러시아의 파트너에 가깝다고 비판했고, 일부는 이번 사건이 미·러 간 공모처럼 보인다고까지 지적했다. 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로서는 미국 특사의 기울어진 태도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유럽의회는 트럼프 평화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키며 러시아에 유리한 합의를 거부하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로써 트럼프 행정부가 협상을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불신과 유럽의 반발이라는 ‘정치적 마찰’을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으며, 미·러 협상이 속도를 내더라도 동맹 조율에서 쉽게 흔들릴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대표단 방러의 의미

푸틴이 미국 대표단의 방러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 국면을 미·러 직접 협상 구도로 전환하려는 의지 표명이다. 그는 대표단 구성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이라고 강조하며 미국 내 트럼프의 위상을 부각시켰고, 위트코프 편향 논란에도 미국이 여전히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푸틴에게 미국 대표단 방문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국제무대에서 트럼프의 대러 관계 개선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며,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를 미·러 양자 협상으로 끌어내 유럽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전략적 효과가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큰 틀의 방향을 정하면 유럽은 뒤에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또 그는 전략적 안정성과 핵군축 문제를 함께 묶어 논의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며 협상 범위를 확대했다.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 만료, 핵실험 가능성, 유럽 안보 보장 등을 패키지로 제시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핵·미사일 통제 및 유럽 안보 재편과 연결하려는 계산이며, 유럽 공격 의사가 없다는 발언 역시 실질적 평화 약속이 아니라,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카드에 가깝다.

푸틴의 전장·외교 병행술

푸틴의 발언을 관통하는 핵심은 전장·외교·내부 정치를 동시에 활용하는 ‘3중 레이어 전략’이다. 그는 전장에서 포위·진격·우크라이나군 손실을 과시하며 전쟁 우위를 강조하고, 이를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는 지렛대로 삼고 있다.

병력 손실과 탈영 사례를 반복해 서방 여론에도 ‘러시아 우세’ 이미지를 심어 협상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외교적으로는 트럼프 평화안 논의를 수용하는 듯하면서도 전략적 안정성·핵군축·유럽 안보 보장 같은 대형 의제를 패키지로 묶어 미국을 중심 무대로 끌어오고, 유럽에겐 공격 의사가 없다는 메시지를 활용해 내부 분열을 자극한다.

푸틴은 유럽을 하나의 단일 파트너가 아닌 이해관계가 다른 주체들의 집합으로 만들며, 러시아와의 타협 가능성을 열어두는 세력에게 명분을 주려 한다.

또 그는 젤렌스키 정당성을 부정하며 협상을 우크라이나 내부 정치 재편과 연결시키고 있다. 전쟁 이후 조기 선거를 포함한 트럼프식 해법을 활용해 우크라이나 정치체제 자체를 흔들고, 자신에게 유리한 협상 파트너가 등장할 때까지 전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러시아가 완충지대를 만들고 점령지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하면서 NATO 동진을 역으로 차단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유럽이 미·러 협상의 주변부로 밀릴 수 있다는 점까지 계산에 넣고 있다.

평화 아닌 승리 고착 전략

필자는 푸틴의 조건부 종전 선언이 ‘평화를 향한 문’이 아니라, ‘전쟁 결과를 영구화하려는 문턱’에 가깝다고 본다.

푸틴의 ‘조건부 종전 선언’은 표면상으로는 협상의 문을 연 것처럼 보인다. 우크라이나군 철수, 전투 중단, 미국 평화안 논의, 유럽 공격 포기, 전략적 안정 논의 준비 등 그의 발언은 하나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타협과 평화의 언어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언어들을 모두 모아 보면, 그 방향은 전쟁 종식 자체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얻은 성과를 제도적으로 고착화하려는 전략으로 수렴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이제 동부 전선에서의 군사력 대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식 외교의 성격, 유럽 내부의 정치적 균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의 정치체제 문제, 그리고 핵군축과 유럽 안보 조약 개편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구조 속에서 재단되고 있다.

푸틴은 바로 그 구조의 중심에 서서 전쟁의 종식을 말하면서도, 전쟁의 결과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착화하기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종전의 문은 열린 듯 보이지만, 그 문이 향하는 방향은 단순한 평화가 아니다. 그 문 너머에는 유럽 안보 체제의 새로운 시작점, 그리고 러시아가 설계한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지인은 필자와 헤어지면서 “푸틴은 언제나 ‘종전’이 아니라 ‘전선 고착’을 주장했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고착점이 마련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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