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APEC 정상회의가 마무리됐다. 의장국을 맡은 한국은 대형 외교 이벤트를 무난하게 치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요시사>는 윤석헌 아시아경제개발위원회 회장과 만나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세계 강대국의 외교 전쟁 무대가 된 경주 APEC 정상회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1일까지 양일간 경북 경주 등에서 열린 아시아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끝났다. APEC은 무역과 투자 등에 대해 정부 간 논의하는 지역경제협력체로 1989년에 설립됐다. 우리나라는 20년 만에 의장국을 맡아 외교무대를 진두지휘했다.
경주에 쏠린
세계인의 눈
이번 APEC 정상회의의 관심사는 단연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패권국인 미국과 그 뒤를 바짝 쫓는 중국 정상 간의 만남이 성사될지를 두고 전 세계의 이목이 모였다. 실제 미국과 중국은 APEC 참석과 정상회의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시작된 무역 전쟁의 연장선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만남이 결정되면서 관세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과 중국은 한쪽이 관세를 부과하면 그에 더해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이 서로에게 부과한 관세가 수백~수천%에 이르기도 했다.
중국은 전 세계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희토류를 무기로 미국을 압박했다. 희토류는 희귀 광물로 반도체 제작 등에 사용된다. 지난 9월9일 중국 상무부가 역외로 나가는 희토류의 수출을 통제하면서 미국과의 긴장 수위가 높아졌다.
AI를 앞세운 정보 전쟁의 시대인 만큼 희토류 확보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당장 미국은 관세 부과로 응수했다.
이번 APEC에서 진행된 미·중 정상회담은 이 같은 배경에서 이뤄졌다. 지난달 30일 김해공항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진행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만난 건 6년 만이다. 이날 회담에는 양안(대만-중국) 문제 등 민감한 이슈 대신 무역과 경제 관련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은 이날 공군기지 의전실인 나래마루에서 만나 약 100분간 회담 후 ‘휴전, 확전 자제’ 수준의 합의를 이뤄냈다.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시행 중인 합성 마약 펜타닐 관련 징벌적 세를 기존 20%에서 10%로 낮추고,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를 1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던 부분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나온 것이다.
6년 만에 트럼프-시진핑 만나
희토류·관세 한발 물러섰나
지난달 30일 서울 금천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윤석헌 아시아경제개발위원회 회장은 “미국과 중국 모두 APEC 정상회의를 무대로 부담이 덜한 선택을 했다”고 분석했다. 양국이 따로 정상회담을 진행하려 했다면 의전이나 장소, 의제 등을 두고 오래도록 논의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큰데 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그런 부분이 단숨에 정리됐다는 설명이다.
윤 회장은 “관세 협상을 하는 방식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다자주의보다는 양자주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국 정상과 1대 1로 만나 이른바 ‘거래의 기술’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식이다. 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중요 이유는 시 주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역시 APEC 다음 의장국으로서 한국방문이 예정돼있는 상황에서 북한과의 관계 등 다양한 사항을 고려했을 때 나름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고 언급했다.
이어 “각국 정상이 공항 의전실에서 만나 회담을 진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미·중 정상회담은 김해공항 의전실에서 열렸다. 한국을 떠나는 트럼프 대통령과 한국으로 들어오는 시 주석이 상호 가장 효율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였기에 그곳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중 정상회담에 많은 관심이 집중된 이유는 두 나라가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윤 회장은 “우리 근대사를 보면 패권국이 독주 체제로 갈 때보다 경쟁국이 존재할 때 더 발전했다. 일례로 미국과 러시아가 패권국을 놓고 경쟁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다 러시아가 몰락한 뒤 미국이 패권국으로 전 세계를 좌지우지했으나 9·11 테러가 일어나는 등 반작용이 나타난 것도 그 시기”라고 말했다.
고래 싸움
새우 등은?
이어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만큼 성장하면서 세계는 G1과 G2라는 경쟁 체제를 보게 됐다. 패권국의 지위를 지키려는 나라(미국)와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나라(중국) 간의 건전한 경쟁은 결국 세계질서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쟁은 작게는 국가 발전에, 크게는 인류 발전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해석했다.
우리나라 역시 미·중 정상회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국은 ‘영원한 우방’인 미국과 ‘결코 멀어져서는 안 될’ 중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특히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교 스탠스가 명확한 미국에 비해 중국과의 관계는 정권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점이 문제로 지적돼왔다.
윤 회장은 시 주석의 방한 시기에 주목했다. 시 주석은 2014년 박근혜정부 때 한국을 찾은 이후 11년 동안 걸음을 하지 않았다. 윤 회장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때는 박근혜정부 시기다. 시 주석의 방문으로 전략적 협력 동반 관계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한중 사이가 격상됐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시 주석이 서울대에서 강연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시 주석은 ‘금 100냥으로 집을 사고 금 1000냥으로 이웃을 산다’는 중국 속담을 인용해 정말 좋은 이웃은 금으로도 바꾸지 않는다며 중국인들이 신라 왕자 김교각을 존경한다고 하는 등 한국 친화적인 연설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문재인정부, 윤석열정부를 거치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에 시 주석이 한국을 방문할 만한 분위기가 성숙하지 않았다고 봤다. 정상회담을 진행한다는 건 양측 모두 굵직한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부담을 안은 상태인데, 그 논의가 이뤄지기엔 (그 당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미 회담
진전 있어
윤 회장은 한국 정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명확한 외교 스탠스를 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진보 정권일 때와 보수 정권일 때 중국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부분을 정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1992년 수교 이후 한국과는 경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도 맞지만 정치, 외교 부분에서는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인 만큼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번 시 주석의 방한 의미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 짚었다.
윤 회장은 “시 주석의 방한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빨간불이 켜져 있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앞에서 양국의 경제협력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특히 내수시장을 확대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방침과 한국 기업의 중국 내수시장 진출 전략이 맞아떨어지면 양국 간 ‘윈-윈’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윤 회장은 ‘미국은 옛 친구, 중국은 새 친구’라는 개념을 꺼냈다.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 시기에는 중국 입장에서 미국에 기울어진 외교를 펼치면서 중국 대사들이 곤란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걸맞은 21세기형 선진 한국에 맞는 외교 스탠스로 대중 관계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는 1945년 해방 이후 정치, 사회, 군사,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호 밀접한 관계다. 중국은 1992년에야 수교를 맺은 한국의 새 친구다. 새 친구가 생긴다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고, 옛 친구가 있다고 새 친구를 사귀지 않는 게 아니지 않나. 옛 친구(미국)에 대한 예의, 새 친구(중국)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20년 만에 의장국으로
“전체적으로 무난했다”
윤 회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난 일을 거론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외교 루트를 통해 언론에 보도된 정도의 내용만 중국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윤 회장은 “한국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는데 중국에는 기사에 나온 내용 정도만을 알린 점 등은 대중 외교의 패착이라고 생각한다.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어떤 식으로든 미리 언질을 줬어야 한다”며 “그것이 외교의 본질”이라고 했다.
윤 회장은 “옛 친구인 미국에 대한 예의와 함께 새 친구인 중국에 대한 배려를 갖춘다면 피할 수 없는 미중 양국의 패권 경쟁에서도 중국과의 관계 증진은 물론, 불확실성의 시대에 시시때때로 바뀌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양국의 우의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경제, 외교, 문화 속에서도 협력의 길을 찾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요시사>는 서면을 통해 APEC 정상회의에 대한 총평을 부탁했다.
윤 회장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한국에서 진행된 첫 대형 외교 이벤트를 무난하게 치렀다는 설명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의전,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성과 등을 높게 봤다.
윤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게 굉장한 관심사였고, 한국 정부로서는 사활을 걸어야 할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2박3일을 보냈는데 한국에서는 숙박도 하지 않고 잠깐 들렀다 가는 수준으로 방한했다면 외교적으로 실패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이 잘 정리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관세 협상이 일정 수준 정도로 타결됐고 무엇보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미국과 논의가 이뤄진 점은 아주 높은 현실적 성과라고 볼 만하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방폐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군비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등 여러 가지로 한국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는 한국군의 ‘숙원’이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 추진한 이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한미 군사동맹은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며 “그것에 기반해 나는 한국이 보유한 구식이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디젤 잠수함 대신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윤 회장은 “APEC 정상회의는 정상이 모여서 무언가를 결정하기보다 정상끼리 얼굴을 맞대고 관계의 물꼬를 트거나 돈독하게 만드는 자리다. 한국은 이번 APEC을 통해 미국, 중국, 일본 등 세계 강대국과 연달아 회담을 진행했다. 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미·중 정상회담의 무대도 제공했다. 이제 이 관계를 건전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jsjang@ilyosis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