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세상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의 어머니는 무엇일까? 만약 그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인간 존재의 본성적 욕망이라 답했을지도 모른다. 변화와 투쟁을 세계의 근본 원리로 본 그에게 전쟁은 혼돈과 창조를 동시에 품은 필연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끊임없이 재현되는 세계 속에서 어머니로서의 새로운 원리는 무엇이어야 할까?
눈부신 문명 발전의 뒤편엔 늘 전쟁이 있었다. 대량 파괴의 폐허 위에선 베이비붐이 일었고, 복구 수요는 실업의 늪에서 사람들을 구출했다. 전쟁은 자본주의 구조가 마주한 모순을 임시로 봉합했고, 과학과 기술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감각까지 자극했다.
그러나 이 모든 ‘생산적’ 파괴는 핵무기가 등장하면서부터 본질이 바뀌었다.
핵무기는 전쟁의 귀결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과 이란, 두 나라 사이에 감도는 긴장은 그 상징적 무대를 제공한다. 핵을 가진 이스라엘은 국제 사찰의 바깥에 있고, 핵을 추구하는 이란은 규범 안에 있다.
어느 쪽이 더 정당한가? 누구의 폭력이 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명백한 사실조차 국제정치의 계산 속에 묻히는 현실에서 미국의 개입은 또 다른 결과를 결정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공정한 관찰자 혹은 정당한 중재자가 될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전쟁은 원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명분으로 전투가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전쟁은 돈이 없어서 일어나며 돈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다. 핵이라는 무기는 터지면 모두가 죽는다는 전제 아래서도 여전히 ‘가져야 할 힘’으로 추앙받는다.
이 아이러니는 지금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역설적 현실로 증명되고 있다.
결국 전쟁은 상상력의 실패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파괴를 선택하는 순간, 정치적 상상력은 기능을 멈춘다. 싸움을 거는 쪽도, 방어하는 쪽도 패배를 상정하지 않으며 누구도 전쟁의 끝을 진심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가장 어두운 전쟁터에서도 상생의 길을 모색해온 존재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괴를 상상하는 능력이 아닌 공존을 상상할 수 있는 용기다.
지금 세계는 패권을 향한 경쟁에 빠져 있고, 자국 이기주의는 국제 질서를 빠르게 침식시키고 있다. 자유무역은 후퇴하고, 연결고리가 약한 국가들부터 무너져내린다. 우리 경제도 예외는 아니다. 사라져가는 푸른 산호초처럼, 이 세계는 정교한 균형 위에 존재하지만 무분별한 정복과 확장은 그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전쟁이란 아버지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의 어머니가 필요하다. 상상력, 공감, 돌봄, 생명의 질서를 회복하는 힘. 국제정치는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믿음과 상상의 세계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듯 국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다고 ‘믿는’ 공동체다.
그 믿음이 바뀌어야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지 않게 되고, 새로운 질서 확립이 가능해진다.
이 변화의 중심에 문학적 상상력이 있다. 정치는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이며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 없는 국제정치도, 지도자도 존재할 수 없다. 경쟁과 정복의 논리만으로는 지속 가능할 수 없다.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은 연대와 상상력이다. 법전을 통째로 외우는 정치인은 많지만, 사람과 세상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없는 이가 지도자가 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문학이다.
특히 우리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느 해보다 뜨거울 여름, 대통령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황석영 작가의 <불타는 파리의 우체국>이면 더없이 좋겠다. 그 책 한 권이, 이 세상을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바꿔낼지도 모른다.
[조용래는?]
▲전 홍콩 CFSG 파생상품 운용역
▲<또 하나의 가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