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패당정치의 종식을 바라며

2021.11.30 00:00:00 호수 1351호

1572년 조선조 제16대 임금인 선조 5년의 일이다. 당시 이조좌랑이었던 오건이 김효원에게 자기의 벼슬을 물려주려 시도한다.



그러자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훈구파였던 심의겸이 사림파인 김효원은 젊었을 때 적신(戚臣)인 윤원형의 문인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저지에 나선다.

그 일로 김효원에게 이조좌랑직은 제수되지 못했으나 2년 후인 1574년 이조정랑이었던 조정기의 추천으로 김효원은 이조정랑(吏曹正郞)직을 제수받는다.

그리고 이듬해 1575년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이조정랑으로 추천되자 김효원은 정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심충겸을 제치고 이발을 추천한다. 

이 일로 인해 조선 최초의 붕당정치, 동인과 서인이 출현한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인 건천동(현재의 중구 인현동)에 있다고 해서 동인 그리고 심의겸의 집이 한양 서쪽인 정릉(현재의 정동 부근,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은 현 정동 부근에 있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성북구 정릉으로 이장)에 있다는 이유로 서인으로 지칭됐다.


이 대목에서 붕당정치의 시발이 되었던 이조전랑직에 대해 살펴보자.

당시 이조전랑은 이조의 관직으로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합쳐 부른 말로 비록 직급은 낮았지만 여론기관인 삼사의 관리를 임명하고,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어 권한이 매우 강했다.

이조전랑직에 대한 자리싸움으로 등장한 붕당은 분열을 거듭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이른바 사색(四色)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리고 민생과는 관련 없는 문제들로 붕당 간 대립이 전개되고 이는 조선조 후반 세도정치로 발전돼 망국의 초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붕당정치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그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임진란이 발생하기 2년 전인 1590년에 선조는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왜(일본)로 보낸다. 왜가 조선을 치려는 징후에 대한 확인을 위해서였다.

이듬해 왜에서 돌아온 황윤길은 전쟁의 징후가 뚜렷하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김성일은 전쟁의 징후가 전혀 없다는 보고를 올린다. 물론 김성일 역시 전쟁의 징후를 살피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인인 그는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기에 반대의 보고를 올리고, 무사안일에 빠져있던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철석같이 믿고 임진란이란 비극을 겪는다. 

이제 시선을 현실로 돌려보자.


최근 며칠 사이 차기 대선을 위한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선택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 그리고 패거리에 속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에게 이재명과 윤석열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거짓말처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 대한 실망감을 넘어 이 나라의 앞날에 대한 상실감까지 비쳤다.

아울러 차기 대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물론 현 상태로 진행된다면 필자를 포함 필자의 가족 모두도 투표에 참여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언급하면 두 거대 정당의 선택은 민심과 철저하게 동떨어져 있어 차기 대선은 오로지 그 두 패거리만의 리그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정말 우려스러운 대목은 그 후에 일이다.

두 사람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이 나라는 분열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돼있다. 추악한 욕심으로 비롯된 충돌은 그 결과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이런 패당 정치 퇴출돼야 마땅하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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