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모르는’ 주민참여예산제 속사정

2017.09.11 10:41:08 호수 1131호

“인증번호 올려” 모로 가도 투표만?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일의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힘이 빠진다. 반대로 결과가 좋다 해도 의도가 잘못됐다면 그것도 올바른 방향은 아니다. 어떤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의도와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과정에 대한 고민은 쉽게 잊히기 일쑤다. 망가진 과정 끝에 얻어낸 결과는 반쪽일 수밖에 없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A씨는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던 중 안내문을 한 장 받았다. ‘동작구 전자투표에 참여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종이에는 주민참여예산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달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투표 강요?

주민참여예산제는 지방자치단체 예산 편성에 주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시민참여를 확대해 재정 운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고 예산에 대한 시민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됐다. 지방재정법 개정으로 2011년 9월부터 의무화됐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달 21일부터 2018년 시민참여예산사업 시민 엠보팅(mVoting)을 시작했다. 시민들은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우리 동네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업을 선택할 수 있다. 

이번 사업 규모는 555억원으로 결정됐다. 서울시는 시민 엠보팅 결과 50%, 시민참여예산위원 40%, 예산학교 회원 10% 등 투표를 합산해 시민참여예산 한마당 총회서 최종 결정했다.


시민 엠보팅 홈페이지에는 다양한 투표가 게재돼있다. ‘2017 동작구 주민참여예산제 투표’ 역시 그중 하나다. 객관식으로 진행되는 이 투표는 구 단위 일반사업 1개, 동 특성화사업 3개, 동 단위 일반사업 2개를 선정하기 위해 동작구청이 게재했다.

A씨가 어린이집을 통해 받은 안내문은 해당 투표를 위한 것이다. 안내문에는 상도1동장 명의로 “동작구에서는 각 동별로 신청한 2018년 사업비를 주민 투표수에 따라 차등 배분해주고 있다”며 “주민 여러분이 투표하는 만큼 상도1동이 많은 사업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적혀있다.

주민참여예산 투표하는데
어린이집서 인증번호 요구

또 투표일과 투표 방법, 투표 순서 등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동작구 전자 투표는 휴대폰과 컴퓨터로 접근이 가능하다. 시민 엠보팅 홈페이지에 접속해 총 6개의 사업을 선택한 후 약관과 개인정보 활용 방침에 동의한다고 체크하면 된다. 
 

이후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면 인증번호를 받을 수 있다. 인증번호를 입력하면 투표는 완료된다.

문제는 해당 안내문을 나눠준 어린이집서 이 인증번호를 어린이집 휴대폰 웹사이트 게시판에 댓글로 적도록 학부모들에게 요청했다는 점이다. 

A씨는 “투표 독려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인증번호를 적으라는 건 투표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것 아니냐”며 “인증번호를 통해 투표 내역을 보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학부모 입장서 내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으니 인증번호를 안 달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다른 엄마들은 다 했는데 나만(댓글을) 안 쓰면 내 아이에게 불이익이 갈 수 있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해당 어린이집 원장은 “투표 강요는 절대 아니다”라며 “독려 차원서 참여 가능한 학부모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부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인증번호 요구에 대해서는 “학부모들이 투표를 얼마나 했는지 어린이집 차원서 확인하려 했다”고 말했다.

A씨가 제기한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안내문에는 구 단위 일반사업과 동 특성화사업, 동 단위 일반사업 등 투표대상 사업이 게재돼있다. 동작구청서 올린 투표를 보면 구 단위로 진행하는 일반사업은 총 9개, 동 특성화 사업은 각 동서 1개씩 총 15개다.


그렇지만 안내문에는 9개 사업 중 ‘냄새야 없어져라’만 적어놓았다. 동 특성화사업의 경우도 최대 투표 개수인 3개를 미리 뽑아놨다. ‘동작구 상징의 전통시장과 만나다’ ‘용마무지개길 조성사업’ ‘신대방 어울림 벚꽃 축제’ 등이다. 동 단위 일반 사업의 경우만 총 3개 중 2개에 투표하면 된다고 안내했다.

A씨는 “그것도 모범답안처럼 다 체크를 해놓은 것”이라며 “예를 든 게 아니라 투표대상을 정해줬다. 이게 투표 취지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이집 관계자는 “우리 동(상도1동)과 관계있는 사업이라 뽑은 것”이라며 “투표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거듭 해명했다.

상도1동 주민센터 관계자 역시 “안내문은 주민들의 투표 참여를 늘리기 위해 우리 주민센터서 만들었다”며 “해당 어린이집에는 협조를 구하는 차원서 안내문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안내문에 투표대상 사업을 뽑아둔 것은 우리 동과 관련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인증번호 요구는 어린이집서 조금 과했던 것 같다. 어린이집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투표대상 사업 미리 골라?
“동에 관한 사업이라” 해명

문제가 불거진 것은 상도1동 만이 아니다. 동작구 투표 관련 게시물에 달린 댓글 중 자신을 ‘깨어있는 시민'이라고 지칭한 주민의 글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주민은 “동작구 노량진1동 주민센터 현장민원실은 투표를 조작하는 건가요? 사이트에 들어가기 불편하니 휴대폰 번호를 인증하면 동사무소서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줄 알았는데 제 번호로 동사무소서 밀고 있는 것을 투표했네요”라며 “단지 투표 독려 차원서 말한 건 줄만 알았지 제 번호를 인증해서 동사무소가 원하는 항목에 투표하라고는 안했는데 굉장히 불쾌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투표 독려를 명분으로 동이나 구에서 주력하는 사업을 선택하도록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어르신들은 어플리케이션 사용에 서투르신 경우가 많아 주민센터서 도움을 드리고 있다”며 “그 과정서 투표대상을 미리 선택해놓고 인증번호만 적을 때가 있다”고 답했다. 이어 “해당 글의 당사자에게는 설명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주민참여예산제도를 관리하는 동작구청 기획예산과 관계자는 “주민센터나 어린이집 모두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 과한 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며 “다른 의도를 가졌다기보다는 독려가 지나쳐 주민들이 불편함을 느낀 것 같다”고 전했다.

과한 독려?

동작구청 홍보팀 관계자는 “사실 어플리케이션 등 주민참여예산 투표 시스템은 주민들이 참여하기 어렵게 돼있다”며 “그래서 독려를 하지 않으면 참여율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해명했다. 이어 “동작구 주민 40만명 가운데 투표를 할 수 있는 인원은 30만명이 훨씬 넘지만 투표율은 10%에 머무르고 있다”며 “참여를 위해 홍보를 하는 과정서 인증번호를 받아 참여자 수를 파악하기 위한 것 같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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