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마라토너’ 금메달 어둠속에 묻혔다!
“손기정 선수의 정신이 이제는 육영재단의 울타리를 벗어나 국민들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
손기정 기념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이준승(41) 사무총장은 할아버지의 방치된 금메달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며 이 같이 말했다.
이 사무총장의 말대로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은 현재 육영재단에 보관되어 있다. 한때 이 금메달은 국민들이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도록 전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은 한국선수가 딴 최초의 금메달이자 일제 강점기,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많은 것이 담겨져 있는 메달이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1979년 육영재단에 기증
손기정 금메달이 육영재단으로 간 것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손기정 선수는 육영재단에 금메달과 월계관 등 1천여 점이 넘는 물품을 기증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금메달 등을 보며 꿈과 희망을 가지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이로써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아 온 뒤 줄곧 손기정 선수의 집에 있던 금메달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당시 육영재단은 ‘손기정 기념관’을 만들어 금메달과 월계관 등의 물품들을 전시하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육영재단이 각종 소송에 연루되고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등의 문제로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일반전시를 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손기정 금메달이 있었던 전시관은 문을 닫았다. 이 후 금메달을 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금메달의 주인인 손기정 선수도 죽기 전까지 금메달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무총장은 “할아버지와 함께 2~3차례 육영재단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문이 닫혀있어 금메달을 볼 수 없었다”며 “마지막으로 육영재단에 갔을 때는 할아버지의 몸이 많이 쇠약해지셔서 휠체어를 타고 갔는데 메달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고 당시의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육영재단 내분 일어난 뒤 금메달 일반에 공개 안 해
유족들 “국가에 기증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손기정 선수는 끝내 금메달을 보지 못하고 지난 2002년 타계했다. 영정 앞에라도 금메달을 모시고 싶었던 아들의 바람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손기정 선수의 아들 손정인씨는 “아버지가 작고했을 때 월계관과 금메달을 영정 앞에 모시고 싶었지만 재단 측이 분실 우려로 거절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손기정 금메달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육영재단 안에 갇혀있게 되자 의혹의 시선이 모아지기도 했다. 금메달을 분실한 것이 아니냐는 것. 이와 관련한 의혹이 끊이지 않자 육영재단이 언론에 금메달을 공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기정 금메달을 둘러 싼 각종 잡음들은 결국 네티즌들을 자극시키기도 했다. 지난 2005년 한 포털사이트에서 ‘손기정 금메달 반환운동’이 벌어져 3천여 명의 네티즌들이 동참한 것. 이처럼 국민들의 뜻이 모아지자 같은 해, 손기정 금메달을 국가문화제로 지정하자는 정치권의 움직임까지 생겼지만 이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손기정 금메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차츰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많은 이들의 입에서 회자되던 금메달은 또 다시 육영재단의 건물 어딘가에 묻혀졌다.
이 사무총장은 “손기정 선수는 금메달을 ‘국민의 것’으로 기증한 것인데 국민들의 관심이 사라지는 사이에 사유물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전했다.
이 사무총장은 자신과 재단이 바라는 것은 금메달이 재단 측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국가에 기증되든, 보물로 지정되든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국민들이 언제든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는 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라고.
그는 “50년 만에 되찾은 손기정선수의 투구는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전시됐다”며 “금메달도 투구처럼 좋은 환경에서 관리되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겨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못 박았다.
이 사무총장이 이처럼 금메달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길 바라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손기정 선수의 유언에 있다. 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를 기억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하셨는데 금메달만큼 손기정 선수를 기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겠는가”라고 설명했다.
또 한 가지는 손기정 선수의 정신이 틀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는 “1979년과 지금은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틀린데 지금까지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금메달이 육영재단에 있는 것은 손기정 선수의 정신마저 국민들과 소통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의 지속적 관심 필요
이 사무총장은 손기정 선수에 대한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금메달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금메달을 왜 못 보게 하느냐’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전해진다면 금메달과 손기정 정신은 육영재단의 틀을 벗어나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국민들이 손기정 선수에 대해 더 많이 알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이 사무총장은 “손기정 선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시상식에서 고개를 떨궜다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라며 “심지어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이들도 있다”며 손기정 선수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고 전했다.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손기정 금메달. 국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