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조계사를 보며 자비를 되새긴다

2015.11.30 18:17:01 호수 0호

기독교를 믿는 딸 아이가 은근하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빠는 왜 기독교, 아니 종교를 믿지 않는 거야?”

왜 믿어야 하는데?”

교회 다니면 천당도 가고 영생도 얻을 수 있잖아.

그래서 아빠는 종교, 특히 기독교를 믿지 않는 거야.

아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일이 축복이겠니 아니면 저주겠니?”

아이가 역시 이해하기 힘든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빠는 그냥 한바탕 재미나게 살다가 때가 되면 미소 지으며 죽을 거야. 아니 죽음이 아니지. 영원한 자유지.

아이의 눈에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비춰질 지 모르지만, 나는 아내와 아이가 종교, 특히 정통 불교나 기독교를 신앙으로 가지는 일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더해서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왜냐, 종교가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내가 인지하고 있는 불교나 기독교는 공히 지고지순한 무조건적인 사랑,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그를 아가페라 칭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최근 불교가 표방하는 자비에 대한 나의 인식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부처님의 자비를 새롭게 인식하여야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 불거진 조계사 승려들과 한 국회의원 간의 일이다.

한 국회의원을 상대로 승려 여러 명이 핏대를 세우며 몰아세우는 TV 보도내용은 나로서는 차마 이해할 수 없었고 아울러 불교에서 지향하는 자비에 대해 새삼 의문을 품게 되었다.

먼저 자비의 본질에 대해서다. 내가 알고 있는 자비는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물론 무조건은 조건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자식이 옳지 않은 길을 가는데 그를 용인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고 심각한 죄다.

그를 바탕으로 현실을 살펴보자. 사건의 발단은 서울에서 개최된 민중총궐기대회에서 폭력 시위를 주도했던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로 숨어들면서 시작되었다. 그에 대해 한 의원이 언론을 통해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민노노총 위원장을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살필 때 그야말로 말발도 먹히지 않는, 그저 객기에 준하는 발언에 불과한데 조계사는 그를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심지어 대표단을 구성하여 국회까지 방문하여 기어코 사과를 받아내려 시도했다.


조계사 승려들이 굳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국회를 방문하여 매스컴을 타게 된 이면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그 전에, 그 국회의원이 객기를 부리기 전에 이미 조계사에서 조처를, 범죄자를 내보냈어야 했다. 부처님의 자비는 결코 범죄자를 비호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힘없고 병들고 나약한 중생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라는 의미일 터다. 결코 범죄자, 그것도 질이 좋지 않은 폭력교사자를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다음은 부처님의 자비가 보편적이 아니고 극히 편파적인 것이냐의 문제다. 조계사의 입장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불교에서 언급하는 중생은 결코 편파적이지 않다고 확신한다. 각 개인의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이 중생이고 또 모든 사람이 자비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범죄자에 불과하고 한 걸음 나아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겠다고 공언한 그 사람만 중생이고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는, 결국 우리의 자식이요 이웃인 경찰들은 중생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네 생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정통 불교와 기독교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에서 보듯 종교가 약자가 아닌 범죄자를 옹호한다면 희망이 아닌 절망의 메신저로 전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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