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비전 선포 <허와 실>

2010.04.27 10:37:15 호수 0호

‘콧대 높은 비전’ 몇 년 뒤 받아든 성적표는 ‘울상’

오너들은 때마다 그룹의 새로운 비전을 발표한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혁신과 창조를 강조하며 직원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제시한다. 오너들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매출 목표와 재계 순위 상승 등 구체적인 그림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 큰 포부를 담고 내뱉은 오너들의 비전이 실제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두고 있을까. <일요시사>가 야심찼던 오너들의 비전을 되짚어봤다.

코오롱 재계 10위 ‘꿈’ 어디가고 36위로 ‘뒷걸음질’
애경 재계 20위 ‘호언장담’…현실은 재무개선 ‘진땀’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2년 ‘2010 비전’을 선포했다. 그룹의 장밋빛 비전은 고 박정구 회장의 뒤를 이어 4대 회장으로 취임한 박삼구 회장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박 회장은 취임식에서 “2010년까지 재계 5위에 올라서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일장춘몽일 뿐”



당시 금호의 재계 순위는 11위(공기업 제외). 박 회장은 8년 안에 재계 순위를 6칸이나 뛰어넘어 ‘탑 5’에 진입하겠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당찬 포부와 걸맞게 금호는 이후 적극적인 M&A로 덩치를 키워나갔다. 2006년 11월 ‘M&A 시장의 대어’로 불린 대우건설을 인수하는데 성공했고, 2008년 1월엔 대한통운을 낚았다. 특히 시공능력 1위인 대우건설을 삼킨 금호는 단숨에 재계 판도를 바꿔 놨다. 자산기준 재계 순위가 2007년 8위로 껑충 뛰어오른 것.

하지만 금호의 고속 성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잇따른 대어를 낚느라 무리하게 체력을 소모한 탓에 ‘자금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대우건설 인수 당시 금호는 무려 6조4000억원이라는 자금을 적어냈다. M&A 사상 최대의 자금이 투입된 사례다.
금호는 부족한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산업은행을 비롯한 18개 금융기관에서 3조원을 빌렸다. 이 과정에서 금호는 재무적 투자자에게 ‘풋백옵션’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발목을 붙잡는 독이 됐다.

결국 자금유동성에 위기를 맞은 금호는 그룹 주요 계열사가 잇따라 ‘워크아웃’을 진행하는 사태에 이르게 됐다. 재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들겠다던 금호의 야심찬 포부는 이제 하루 빨리 경영정상화를 이끌겠다는 절실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애경·코오롱그룹
“이상만 높았다”

애경그룹의 2010년을 향한 비전은 지난 2007년 말에 발표됐다. 애경은 그해 12월 ‘2008 경영전략 설명회’를 열고 “2010년까지 자산 10조원으로 재계 20위권에 진입하겠다”는 중장기 비전을 발표했다.

그룹 내부에서 실질적인 회장 역할을 하고 있는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은 이 같은 비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제주항공의 재무개선에 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애경의 신성장동력으로 내세운 부동산 개발 사업에 힘썼다. 그러나 애경의 의욕적인 움직임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그룹의 유동성이 크게 악화됐다. 지난해 말 부채가 자산을 초과해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제주항공은 애경의 발목을 잡는 골치사업이 됐다. 거듭된 적자누적으로 고전하고 있는 제주항공을 애경은 수년째 유상증자를 통해 긴급 수혈했다.

실제 2008년 230억원, 2009년 110억원의 자금이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으로 지급됐다. 부동산개발업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애경은 지난해 5월 군인공제회와 모건스탠리부동산 등과 함께 1000억원의 자본금을 출자해 국내 최대 규모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AMM자산개발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최근 모건스탠리는 자본금 300억원을 전액 회수했다. 출범 이후 뚜렷한 사업성과가 없었던 탓이다.

애경은 지난해 재무개선 안정을 위한 자산 매각에 들어갔다. 지난해 10월 AK플라자 구로본점 건물을 세일 앤 리스백 방식으로 1500억원대에 매각한데 이어 AK면세점 지분 81%도 롯데그룹에 2800억원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제주항공의 항공기 Q400 4대도 현재 유럽 항공사들과 매각을 협상 중이다.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의욕적으로 도전한 사업들이 잇따라 고전하면서 재계 20위권 진입이라는 애경의 비전은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애경은 현재 재계 순위 50위권에 머물고 있다.

재계 순위 상승이라는 기업 목표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코오롱그룹도 마찬가지다. 이웅열 코오롱 회장은 지난 2006년 1월 그룹 사옥 강당에서 새로운 그룹 경영목표인 ‘빅스텝(Big Step) 2010’을 선포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2010년엔 매출 20조원, 당기순이익 1조5000억원을 달성해 재계 10위권에 진입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코오롱그룹의 재계 순위는 24위. 5년 만에 무려 14계단을 뛰어넘겠다는 야심찬 포부였다.

하지만 2010년 현재 이 회장의 비전은 공염불로 끝날 것으로 보인다. 주력상품으로 키우겠다던 사업들이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최근 차세대 주력 브랜드로 육성했던 아웃도어 브랜드 네이처시티를 정리하고 있다. 매출 부진이 원인이다. 게다가 물사업, 태양광사업 등 이 회장이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는 사업들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업계는 M&A만이 신성장동력 사업의 효과적인 성공을 위한 대책이라고 조언하지만 코오롱은 이마저도 소극적이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200%가 넘는 부채비율을 기록하는 등 부실한 재무구조도 코오롱의 비전 달성을 방해하는 요소다.

최근 공정위가 발표한 기업집단 순위에 따르면 코오롱은 4월 현재 재계 순위 36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준 32위였던 재계 순위와 비교한다면 4계단 하락한 것이다. 또한 매출은 6조6750억원, 당기순이익은 5140억원을 기록해 2010년 목표치에 비해 1/3 수준에 불과하다.

현대·현대산업개발
“비전 때마다 바뀌어”

현대그룹의 비전 선포는 그룹의 위기 상황마다 들려왔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경영에 나선지 7년, 그동안 그룹은 세 번의 비전을 선포했다. 매출은 늘리고, 재계 서열의 꿈은 소폭 낮추는 등 비전의 목표는 때마다 바뀌었다.

2004년 8월 현 회장은 ‘새로운 비상, 현대 2010비전 선포식’에서 “2010년 매출 20조원 달성을 통한 재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하는 중장기 경영비전을 선포했다. 2003년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룹 경영에 뛰어든 지 1년만이었다.

현 회장의 두 번째 비전 선포는 2009년에 들려왔다. 2008년 대북사업 중단으로 인한 현대상선의 적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그룹 경영에도 악영향을 미칠 시기에 새로운 비전을 선포한 것이다. 당시 현 회장은 “2012년까지 매출 34조원, 자산 규모 49조원, 재계 13위의 인프라·물류·금융그룹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런 가운데 현대그룹은 최근 또 다시 중장기 그룹 비전을 발표했다. 지난달 12일 연지동 사옥에서 비공개 행사로 진행된 이날 선포식에서 현 회장은 ‘2020년 매출 70조원, 영업이익 5조8000억원 달성’이라는 경영목표를 제시했다. 대북사업 중단으로 장기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그룹은 이번 비전 선포를 계기로 ‘제 2의 도약’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현대그룹 7년간 세 번의 비전 ‘때마다 바뀐 그룹 목표’
현대산업개발 1등 원했지만 시장침체로 순익 80% 하락


이들 비전 중 현 회장의 첫 번째 목표였던 ‘2010 비전’은 만족스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공정위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10년 4월 현재 현대그룹의 재계 순위는 21위에 그친다. 자산규모는 12조4720억원이며 매출액은 10조727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6년 전 매출 20조원 달성으로 재계 10위권 진입을 다짐했던 현 회장의 목표치 중 절반에 불과한 기록이다.

재계 13위를 목표로 한 ‘2012 비전’ 또한 갈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3년이란 시간동안 매출을 세 배로 늘릴 획기적인 성장 발판을 마련, 재계 순위 8칸을 수직상승하는데 성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콧대 높은 비전과 달리 어려운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은 현대산업개발도 마찬가지다. 현대산업개발은 2년 전 국내 최고의 종합건설 부동산 개발회사로 발돋움한다는 비전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같은 다짐은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2008년 초 기자간담회를 통해 흘러나왔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2010년까지 국내 최고의 종합건설ㆍ부동산개발회사로 발돋움할 것”이라며 “앞으로 그룹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위해 유통 등 비건설부문의 매출 비중을 전체의 40%까지 늘리겠다”고 밝혔다. 아이파크몰과 영창악기 등 비건설부문을 성장시켜 경기를 많이 타는 주택건설 사업에 대비,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정 회장은 그 방법으로 M&A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민영화되는 공기업 인수에 관심을 표명했다.

하지만 국내 최고를 향한 정 회장의 포부는 곧이어 불어 닥친 부동산 시장의 침체로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는 평가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수주 물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전국의 분양사업마저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결과 현대산업개발은 지난해 순익이 80% 가량 대폭 줄어들었다. 지난 1월 현대산업개발의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486억원으로 직전년도보다 78.7% 감소했다. 영업이익도 1501억원으로 47.2% 감소했고, 매출액도 2조1633억원으로 18.9% 감소했다. 업계는 타사에 비해 주택건설사업 비중이 높은 현대산업개발이 부동산 시장 위축으로 인한 영향을 크게 받은 탓이라고 해석했다. 지난 한 해 고전을 한 현대산업개발은 재계 순위도 2단계 하락한 37위를 기록했다.

현대산업개발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최동규 현대산업개발 신임 사장은 지난달 14일 ‘비전 2016’을 선포, “2016년엔 매출 10조원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3조원의 매출규모를 6년 뒤 3배로 키우겠다는 당찬 포부다.

현대산업개발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원자력발전, 플랜트 등 해외사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1999년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 후 처음으로 해외진출의 포문을 연 것이다. 현대산업개발은 이와 함께 “건설과 비건설 부문의 비율을 5대 5로 구성하겠다”고 밝혀 2년 전보다 좀 더 안정된 재무 포트폴리오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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