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59)무너진 시간의 나이테

  • 김영권 작가
2025.07.07 04:46:13 호수 1539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버지가 노름으로 많은 재산을 잃어버렸긴 해도 그때까진 아직 밥걱정은 없는 집안 살림이었는데 엄마가 회당에 나간 뒤로 살림살이가 점점 궁색해져 갔다.

아마도 지극정성뿐만 아니라 돈이나 금반지, 옥비녀, 시계 같은 것도 회당에 갖다 바쳐야 하는 모양이었다.

엄마의 손과 머리에서 그런 물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궁색한 살림

차츰 용운의 학용품을 준비하는 것도 어려워지더니 밥상에도 궁기가 끼었다. 그래도 엄마는 아무런 걱정도 안 되는지 핼쑥한 얼굴에 눈만 무섭게 야릇한 빛을 내면서 교당엘 나다녔다.


그렇게 신앙과 생계문제로 동분서주해야 하는 엄마로서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용운을 지키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용운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도 편안히 몸 둘 곳이 없었다.

그저 살금살금 부엌으로 들어가 밥 한술 떠 먹고는 이리저리 마을을 배회하는 것만이 유일한 일과처럼 돼 버렸다.

그러다가 엄마가 돌아와야만 비로소 따라 들어가 병아리처럼 품속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어느 날 새벽, 곤히 자고 있던 어린 용운은 갑자기 숨통이 조여드는 고통에 퍼뜩 눈을 떴다.

“헉!”

그건 아버지였다. 쇠진한 기력을 다 모아 일어난 아버지가 굵은 새끼줄을 용운의 목에 걸고 사력을 다해 잡아당기는 순간이었다.

정신이 아득했지만 꿈이 아니라 실제상황이었다.

아! 아버지의 무서운 표정에서 어떤 희망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느낀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해 줄 어머니가 옆에 없다고 느낀 순간 용운은 온힘을 다해 아버지를 밀쳤다.

“쌍노무 새낏!”


아버지는 으드득 이를 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렸다. 무위로 끝난 결행이 못내 원통한 모양이었다.

“허이!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도 안 통한다더니 이게 뭐여…….”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용운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뭐라구? 이놈!”

아버지는 벽 한구석에서 웅얼거렸다. 잠시 후 아버지가 야릇한 소리를 뇌까렸다.

“아, 아니 저, 저건…….”

아버지는 갑자기 벽 한쪽을 가리키며 이해 못할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에구에구, 저 저기 커다란 독거미가 슬슬 벽을 타구 기어오르네, 에구…….”


“어이, 왜 그래? 이봐, 정신 차려, 정신!”

마을의 어떤 아저씨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아버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댔다.

“너, 너는 저게 안 뵌단 말이여? 저 독거미가 나를 할꼼할꼼 보면서 스르륵 기어오를라 하네. 에구에구…….”

“이거 큰일났군. 용운이 너 밖에 나가 후딱 냉수 한 그릇 떠오너라.”

숨통이 조여오는 고통
지하 감방에서의 사흘

용운이 황급히 튀어나가자 언제 모여들었는지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쯧쯧! 죽을 때가 되니 눈에 헛것까장 씌었구먼 그랴.”

“사내고 지집이고 사이비 종교에 미쳐서 저 꼴이지 뭐.”

“그놈의 새하늘굔지 뭔지 들어와서 수많은 사람이 재산 잃고 가정까지 깨진다잖아.”

“누가 아니래요? 미련하게 천국 찾다가 지옥 길 찾아가도 유분수죠.”

그날부터 용운은 이웃집을 돌며 동냥 잠을 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정을 잘 아는 이웃들이기에 잠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공포감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용운은 극심한 공포증에 걸려 사립문이 살짝 흔들리는 소리만 나도 아버지의 사주를 받은 누가 죽이러 온 게 아닌가 싶어 심장이 얼어붙었다.

시시각각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밤마다 아버지에게 쫓겨 다니다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꿈을 꾸었지만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기도 했다.

그런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용운은 엄마 손에 끌려 서울역으로 갔던 것이었다. 거지가 되어 차가운 객지의 밤거리를 방황할 때나 몸이 아파 앞길이 막막할 때, 용운은 고향의 푸른 산과 진달래꽃 그리고 엄마를 생각해 보곤 했다.

엄마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처럼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있을까?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도 마을의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릴 뿐 그곳으로 가는 길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런 엉터리 사이비 종교의 꾐만 아니었더라면 지금 이런 꼴로 고생하진 않겠지.

다리 밑이나 남의 집 처마 밑에 웅크려 그런 씁쓸한 공상에 빠져들다 보면 그 능글맞은 노신사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칼로 푹 쑤셔 그의 붉은 피를 머리에 뒤집어쓰면 괴로운 갈증이 좀 가실 것만 같았다.

그런 늙은 여우의 꾐에 빠져 어린 자식을 내다 버린 엄마마저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의 삶도 엄마의 인생도 불쌍하고 안타까워져서 용운은 눈물을 글썽거리고 마는 것이었다.

꼬박 사흘이 지난 후에야 용운은 지하감방에서 풀려 나올 수 있었다. 그 사흘은 용운의 의식 속에서는 몇 달이나 혹은 몇 년이 훌쩍 흐른 듯이 여겨졌다.

의식의 어느 구석에 구겨박혀 정지돼 있던 시간의 나이테가 풀려 그런 혼란을 일으키는가 보았다.

암담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선감원에 수용된 지도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그 순간 순간엔 괴롭고 지루하던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어느덧 1년, 2년, 3년……이란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용운은 늙은이처럼 한숨을 쉬며 눈을 지그시 감더니 뭔지 속삭이듯 읊조렸다.

하나의 어른

“만일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거짓에 속더라도 되갚지 않고
미움을 받더라도 갚지 않는다면
꿈을 꾸되 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고 채울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하나의 어른이 되리라….”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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