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대통령의 뒷모습 ⑮세상만사 어차피 한통속

  • 김영권 작가
2023.01.04 11:08:47 호수 1408호

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행인들이 쳐다보며 웃어댔으나 본인은 그닥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그런 무언적 발상이 한 차원 높다고 여기는 듯한 기색이었다. 

얼마 후 그가 작은 투명 플라스틱 통을 꺼내 그 속의 불그무레한 액체를 마시곤 한숨 돌리자 난 슬쩍 물어보았다. 

외계인

“스스로 하시는, 일종의 행위예술 같은 것인가요?” 

“뭐든 스스로 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간혹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창작하고 생활한다고 하지만…. 일부 독창적인 천재를 빼고 나면 대개 다 일상인들과 별다를 게 없다고 봐.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약삭빠르게 모방하는 자들이 그런 평범한 예술가 군상이 아닐까 싶어. 모든 예술은 진실을 찾기 위하여 당시대마다 고군분투한 흔적이 아닐까?”


“네, 그렇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런 방법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방식인지 궁금합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장담하긴 힘들어. 하지만 뭘 그리 꼬치꼬치 따질 필요가 있겠나. 어차피 한통속에서 살아가는 신세인걸. 대한민국이든 지구든 우주든. 하핫….” 

“어쨌든 지금 현재 이 공간에서 선생님의 존재는 좀 이상스럽긴 합니다만…. 좀 실례인지 모르지만, 어딘지 외계인 같기도 하고….” 

“하핫!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가?”

“글쎄요.”

“흠, 이 지구를 넘어 광활한 대우주 속에 인간만 유일하게 자치한다면 우습지 않은가. 만일 인간이 없다면 개나 돼지 그리구 사슴들도 자치할 수 있을 테지. 나아가 광대무변한 은하계에 지구 인간만 유독 영성을 지닌 존재라고 한정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지나친 공간의 낭비가 아닐쏘며 허무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과연 조물주 신께서 그런 우스꽝스럽고 어이없는 짓을 했으리요, 응?” 

“외계인이 있다면 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요.” 

“인간이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떠벌이면서도 사실은 참 우둔한 짐승 같아. 아마 지렁이는 내장 속으로 웃을 테고, 염소는 대놓고 인간을 비웃잖아.”

“하하….” 

“인간의 무지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벼룩균도 깔깔 앙천대소할지 몰라. 무지 곧 죄악이야…. 흠, 신과 외계인과 악마 따위가 있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꼴은 모두 인간 자신을 닮아 있잖아. 신도 웃고 악마도 웃고 외계인들도 앙천대소하겠지. 인간들의 아집과 고정관념으로 만들어 놓은 허상…. 그걸 진실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일반적인 관측뿐만 아니라 수학적인 엄밀성으로 봐도 지구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데 인간들은 마냥 희희낙락거리며 쾌락의 풍선을 마구 훅훅 불어대니 언젠가 빵 터지면 볼만할 거야.” 


노인은 패트병 속의 붉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신과 악마는 우선 좀 놔두고 생각해 보자구. 외계인은 아마 우리 인간이(설령 천재일지언정) 상상할 수 없는 형상과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을 테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같잖은 사고방식만 버린다면 얼마나 좋으리오! 아, 인간 위주의 고정관념엔 가래침을 뱉어 주고 싶어. 칵, 퉤퉤…. 외계인이 있다고 해서 뭐 별 크게 문제될 게 없는데 호들갑을 떨거든. 이 지구상에도 외계인보다 훨씬 더 흉측스러운 년놈들이 많은데 말씀이야.” 

인간 아집·고정관념으로 만든 허상
“자유의 꽃은 동서고금 늘 피고 진다”

“선악을 떠나 궁금하니까 그렇겠죠.”

“궁금증 자체가 괴물로 변질되기도 하니까 조심해야지.” 

“선생님 자신도 호기심을 끌기 위해 스스로 먹이나 미끼 흉낼 내는 건 아닌가요?”

노인은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흐흣, 솔직히 말해 보자구. 한국 사람 중에 미국 일본 프랑스 따위 흉내와, 잘 길든 개와, 방부제를 심장 속 깊이 찔러넣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서울역의 새 역사와 옛 역사를 비교하다 보면 왠지 만감이 교차해서 깜박….” 


“싹 허물어 버리든지 딴 데 갖다 놓으면 될 텐데 굳이 역사 문화 박물관이니 뭐니 전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걸.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기도 어려운 시절에….” 

“아마 시대적 방부제겠죠.” 

“흐흣, 이거나 한 모금 마시고 정신차리게.” 

노인은 투명한 물이 담긴 작은 패트병을 내밀었다. 입으로 가져가던 난 곧 돌려주었다. 알코올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꿀꺽 한 모금 마셨다. 

“음, 이거야말로 최고의 순수야.”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죠.” 

“아냐, 난 이 자리에서 임무를 순수히 완수해야만 해.” 

“그게 뭔데요?”

“음, 행인들이 보면 약간 우습겠지. 하지만 그건 이미 계산에 넣어둔 거야. 웃음은 만고의 사람 꽃을 피우니까. 특히나 이 서울역 앞이나 저 강남 거리에서 웃음 짓는다는 건 이 자본주의 만개 시대를 맘속으로 인정한다는 표시란 얘기야. 흠, 미소든 냉소든 괴소든 일단 웃는다는 게 중요해. 흐흐흣….”

“….” 

난 말 없이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웃는 듯싶구먼.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아마 삶과 미소의 의미도 변할 테지. 흐흥, 지금이 좋을 때야. 미남 청년인 자네에게만 해당되는 소리가 아니고 남녀노소 고금동서 모든 존재들에게도 지금이 최고의 시절일걸. 하지만 우린 대개 그 사실을 모르지. 회피하거나….” 

“선생께서도 자꾸 회피하지 마시고 이제 그만 본론을 말씀해 주시면….” 

“본론이란 게 특별히 있겠나. 모든 게 다 본론인걸. 서론이니 결론이니 하는 건 사람이 억지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야. 그래도 원한다면야 말 못할 게 없지. 흠, 생존을 위한 생활과 생활을 위한 생존…. 즉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따위 정도는 초월해야만 할 수 있는 짓이겠지.” 

“네?” 

“흐흣, 난 이래 봬도 국내외 대소 기업체의 후원을 받는 광고맨이야.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잖아. 물론 거짓 꽃도 많지만.” 

“악의 꽃도 있죠.” 

광고맨

“어리석음이여, 잠깐! 광고 속에 인간이 있고 또 인간 속에 광고가 존재하는 마당에 어설프게 탓할 건 없지 뭐. 사실 기업체의 후원을 쫌 받긴 하지만 자본주의 하수인이 될 생각은 별로 없어. 그냥 이 신구(新舊) 서울역 앞에서 이렇게 팔을 쫙 벌린 채 소리쳐 보는 거지. 자유의 꽃은 동서고금 늘 피고진다! 하하핫….”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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