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 본선 진출 쾌거 홍명보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

2012.03.20 10:17:32 호수 0호

한국축구 새로운 전설 써내려가는 ‘영원한 리베로’

[일요시사=정혜경 기자] 지난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진 한국과 카타르의 ‘2012 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최종경기가 0-0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골 장면은 터지지 않았다. 그래도 축구팬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없다. 우리 대표팀은 이미 지난달 22일 열린 런던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A조 5차전에서 오만을 3-0으로 완파하며 조 1위를 확정해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7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아시아 국가로는 사상 최초다. 이처럼 우리 대표팀이 새로운 역사를 만든  배경엔 홍명보 감독이 있다. 한국축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에서 명지도자로 거듭난 홍 감독이 걸어온 길을 재조명해봤다.

어린 시절 작은 체구로 감독 요구 부응 못 해 스트레스
볼 컨트롤로 체격 극복하고 탄탄한 기본기 쌓아 주목



홍명보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여동생만 둘인 집안의 외아들이어서 축구에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로서는 하나 뿐인 아들이 축구보다는 공부를 해 집안을 꾸려 나가길 바랐던 게 너무나 당연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홍 감독은 결국 축구를 선택했다.

부모님 반대에도
결국 축구 선택

그러나 축구가 늘 재미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시절 유난히 작은 키가 문제였다. 늘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을 정도였다. 이런 신체조건 탓에 감독 선생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홍 감독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그럭저럭 지낼만 했다. 경쟁이 덜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키가 여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광희중학교에 입학했다. 감독 선생님이 요구했던 체력과 체격의 수준은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커지고 강해졌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몸집이 큰 선수들과 충돌이라도 하면 튕겨져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부상에 대한 공포감이 언제나 따라다녔다. 홍 감독이 작은 체구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볼 컨트롤’에 있다. 볼 컨트롤이 돼야 그 다음 패스도 할 수 있고 상대 선수들이 접근하기 전에 재빨리 패스를 해 신체 충돌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방법으로, 이를 통해 홍 감독은 탄탄한 기본기를 쌓게 됐다.


중학교 때까지 평범한 선수였지만 기본기가 잘 준비돼 있었기에 그는 향후 무럭무럭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축구명문 동북고에 진학한 뒤 키가 자라면서 덩달아 축구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고교 2년과 3년 연거푸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해 고려대까지 진학했다.

미드필더로서 고교와 대학시절 명성을 날리던 홍 감독에게 중요한 기로가 왔다. 당시 남대식 고려대 감독이 주전 수비수가 졸업해 생긴 빈자리를 맡으라고 했다. 대학교 3학년에 포지션을 바꾸는 것은 사실 대단한 모험일 수도 있었다.

당시에 대해 홍 감독은 “수비수 보직 전환에 불만이 있었지만 팀내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며 “어떻게 하면 수비를 잘 봐야 하는지 그때부터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돌이켰다. 공격 중심의 축구에서 수비로 포지션이 바뀌자 축구 전체를 보는 시각이 더 넓어졌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수비수로 활동하던 대학 4학년, 1990년은 홍 감독이 처음 태극마크를 달던 해였다. 그 해 2월4일 노르웨이 친선경기에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월드컵 축구가 열렸던 2002년 말까지 13년간 그가 뛴 국가대표팀 간 경기(A매치)는 135차례로 아직도 역대 최다기록이다.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강을 이룩한 뒤,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상대 공격의 ‘맥’을 읽고 차단해내는 판단력과 지능적인 플레이가 압권이었고, 무엇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수비라인 및 팀 전체를 통솔하는 리더십이야말로 10년 넘게 홍명보를 ‘한국대표팀 부동의 수비수’로 존재하게 만든 근원이었다.

그라운드 전체를 꿰뚫는 폭넓은 시야와 전방으로 연결하는 날카로운 패스, 노련한 경기운영능력과 적절한 위치선정은 홍 감독에게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라는 호칭을 안겨줬다. 즉, 실상 가장 공격적인 수비수이면서 가장 수비적인 공격수, ‘리베로’의 전형이었다.

홍 감독은 프로선수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보냈다.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던 1992년엔 이회택 감독의 지휘아래 팀 우승에 기여해 신인으로는 K리그 최초로 최우수선수(MVP)에 뽑히며 화려한 출발을 했다.

축구 외에 언어·문화
배우러 일본·미국행

1994~1996년 3년 연속 K리그 베스트11에 뽑힐 정도로 기복 없는 플레이를 펼쳤고, 일본프로축구에서 포항으로 복귀한 2002년에도 역시 베스트11에 선정됐다. 국가대표와 프로축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그의 명성은 국내외에 널리 퍼져나갔다.

국내 프로축구 활동 5년 만인 1997년에는 일본프로축구로 진출하기도 했다. 당시 홍 감독은 모든 것이 권태로워지기 시작한 때였다. 목표의식도 사라졌다. 그 탈출구로 홍 감독은 일본행을 선택했다. 처음엔 J리그의 벨마레 히라츠카로 옮겨 활약하다 1999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그 해 J리그컵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진출 초기엔 생각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일본에 진출했던 1997년 일본프로축구엔 한국 선수가 2명밖에 없었다. 또 국내에서 정상급으로 뛰던 선수가 잘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컸다. 조언을 해줄 사람도 없었고,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기에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그런데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우로 변해갔다. 선진화된 일본축구를 배우고, 나름대로 성숙한 일본사회의 문화적인 영향도 받았다. 당시에 대해 홍 감독은 “한국처럼 녹초가 되도록 뛰지 않아도 되는, 어느 포지션에서든 협력플레이가 잘 되는 일본축구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선수와 지도자 간의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도 깨달았다. 또 은연중에 일본을 무시하는 생각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국가대표는 물론 프로선수,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삶
아시아 국가 최초로 7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 대기록

이후 홍 감독은 2002년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로 잠시 복귀했다가 2003년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로 이적했다. LA갤럭시로 진출한 것은 축구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배움의 욕구가 컸다.

축구선수가 축구만 하지 않는 미국사회에서 홍 감독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운동선수, 기부 등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체험도 했다. 홍 감독은 이런 외국의 경험에 힘입어 역대 한국인 코치로서는 외국인 코칭스태프와 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을 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홍 감독은 2004년 10월8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프로선수로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부터 A대표팀과 올림픽팀 코치를 거쳐 지도자로 변신했다. 이어 2009년부터는 청소년대표팀의 사령탑을 맡아 본격적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하지만 홍 감독의 데뷔를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들도 많았다. 그러나 2009년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작성하며 이런 시선은 불식됐다. 이후 홍 감독은 올림픽팀 감독을 맡아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거머쥐는 등 지도자로서 승승장구했다.

특히 홍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은 지난달 2월22일 새벽 끝난 2012 올림픽 축구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5차전 오만과의 원정 경기에서 3-0 완승을 거두면서 남은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각조 1위에게 주어지는 본선행 티켓을 잡았다.

이에 따라 우리 대표팀은 7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아시아 국가로는 사상 최초다. 지난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진 한국과 카타르의 ‘2012 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최종경기가 0-0 무승부로 막을 내렸음에도 축구팬들의 얼굴에 여유가 가득한 이유다.

홍 감독의 목표는
올림픽 메달 획득

그러나 정작 한국 축구가 올림픽 본선에서 그동안 거둔 성적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1948년, 2004년 대회에서 8강 진출에 성공한 것이 역대 최고성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별리그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박주영, 이근호, 기성용, 이청용 등 최고의 멤버들이 나섰던 4년 전 2008년 베이징대회에서도 조별리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지금 홍 감독의 목표는 명확하다. 올림픽 메달의 숙원이다. 축구팬들과 관계자들의 바람 역시 마찬가지다. 넘지 못했던 올림픽의 벽을 무너뜨려달라는 것이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슬슬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홍명보라는 존재의 힘은 그렇게 크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