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성폭력 휴유증에 시달리는 여성 <격정토로>

2011.11.25 17:30:00 호수 0호

“나는 결코 성추행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최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고통 속에 사는 피해자들이 늘고 있다. 신고율이 저조한 성범죄의 특성상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는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힘없고 여린 아이들에게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주는 파렴치한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나’라고 한탄만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엔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감당할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 특히 성범죄 피해자가 아동이나 청소년일 때 그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전문가들은 피해 정도를 떠나 심리적 충격 여부에 따라 치유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 쉽게 치유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성범죄 피해자들의 공통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떨까. 10여년전 고등학교 동급생에게 성범죄 피해를 입은 김아름(가명·29·여)씨의 삶을 통해 피해자들이 겪는 육체적, 심리적 후유증과 성범죄피해에 대응하는 우리사회의 현 주소를 들여다봤다.

18살의 기억과 10여 년의 침묵은 성폭력 상처 더욱 깊게 만들어
지울 수 없는 ‘그날의 악몽’…별다른 대책 없이 망가져가는 심신


“나는 더 이상 성범죄를 겪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던 김아름씨. 그러던 김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악몽 같은 기억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아이러브스쿨’, ‘다모임’ 등과 같은 동창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열풍이 불던 해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김씨는 사이트에서 만나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믿고 나갔다가 계획적인 강제성폭행을 당했다. 그날 이후 자책과 불안이 반복되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의도적인 범죄 ‘희생양’

“당시에는 그 친구가 분명 강제적으로 제 몸 이곳저곳을 만졌는데 그런 피해를 뭐라고 부르는지도 몰랐어요. 경찰에 신고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만 신고를 할 수 있는지 알았고요. 부모님께도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말해봤자 부모님도 마음 아플테니 그냥 차라리 나 혼자 고통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별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의 후유증으로 원만한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없어 1학기만 다닌 후 자퇴했다. 그리곤 집에서만 생활했다.

“그날 이후로 대인관계기피와 경계가 심해져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하루 종일 그렇게 몇 년을 집에만 있는 게 그나마 불안하지 않더라고요. 사람을 믿고 나갔는데 그런 피해를 당하고 나니 집만이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집 밖에 나가는 게 두렵고…. 남자친구를 한 번 만나봤지만, 그가 스킨십을 시도하려고 하자 옛 기억이 떠올라 연락을 끊었어요. 남자고, 여자고 사람만나는 게 저에겐 너무 두려운 일이에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김씨가 27살이 되던 해. 딸이 집에만 있는 것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권유로 두 번째 대학에 들어갔다. 2년 동안 학교생활을 했지만, 그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고 과거를 벗어나 살 수도 없었다. 대인기피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두 번째 학교도 그만두고 만다.

“과거를 떠올리고 생각하는 게 저도 너무 싫은데 언제쯤이면 잊혀 질 수 있을까요. 매일 밤마다 울고 잠도 잘 못자고…. 집에서 계속 누워만 있다 보면 속에서 울분이 끓어올라요. 그러다 소리 지르게 되고 울고 집에 있는 물건을 다 집어던지기도 하죠.”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던 김씨는 얼마 전 동창생이었던 가해자의 근황을 접하게 된다. 지난 10년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 채 힘든 생활을 이어온 자신과 달리 너무 잘 지내는 듯한 가해자의 모습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가해자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사는데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웃고,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고 그런 모습을 보니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분명 성범죄자 기록을 갖고 살아야하는 가해자는 어떤 죄책감도 없이 멀쩡히 살아가고 피해자만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게 너무도 불합리 하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김씨는 10여년이 지난 후 가해자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공소시효 7년이 지났지만 성폭력 상담소에서 상담치료를 병행하며, 상담사와 함께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하지만 막상 고소를 앞두고 김씨는 더 막막하기만 하다.

“고소를 하기 위해 저와 비슷한 피해사례를 알아보다 성범죄 처벌이 공소시효 폐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많음을 알고 씁쓸해 지더라고요. 어렸을 때 당한 일이라 증거가 없어 검찰 측에서 공소제기도 안 하고 수사가 종결되거나 공소가 되도 유죄처리가 쉽지 않다는…. 이런 사례들을 접하면서 정말 대한민국 성범죄 처벌에 회의를 느끼고 피해자는 난데 내가 이렇게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힘들어야 하다니…. 이것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 아닌가요?” 

성추행 규명 ‘가시밭길’

김씨는 피해자들이 두 번 상처받지 않도록 성범죄에 대한 법적인 조치와 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 역시 김씨 의견에 동의한다.

한 심리치료센터 관계자는 “김씨와 같이 드러나지 않았던 성범죄 피해자들이 장기간 방치되면 우울증이 심해지거나 사회에 대한 반감이 커져 자살이나 제2의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면서 “미성년자 성범죄 공소시효를 연장하고,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그들이 원하는 철저한 수사 등 성범죄 근절을 위한 사회적 성범죄 안전망 구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대다수의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들은 김씨와 같이 우울증과 성격장애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비록 어렸을 때 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증상은 성인이 된 뒤까지 지속된다. 일

평생 지속되는 이런 후유증이 아동·청소년 성폭력의 잔인한 점이다. 그 상처가 남지 않도록, 남더라도 최소한이 되도록 과연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악몽의 그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성범죄 피해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지 사회적 시스템마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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