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역사, 함부로 기록하지 말라!

2015.10.21 14:11:07 호수 0호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1457년) 6월22일 기록이다.

『노산군(단종)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다음은 세조 3년(1457년) 10월21일 기록이다.

『명하여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지냈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면서 일개 환관에게 자신의 죄를 토로했다는 부분도 그렇지만 장인인 송현수 등이 죽임을 당하자 슬픔에 겨워 자살했고 이어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는 부분을 살피면 그저 쓴 웃음만 나온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상기의 기록은 물론 정설로 알려진 내용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점이다. 먼저 실록 기록과 관련하여 귀양 가는 시점을 살펴본다.

실록에 따르면 단종이 한여름인 음력 6월22일(양력으로 치면 7월 말경)에 한양을 떠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종이 귀양지인 영월에서 남긴 작품을 살피면 커다란 차이를 드러낸다. 유배지인 영월의 자규루에 올라 지은 글 중 일부다.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말하노니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단종이 분명하게 춘삼월을 언급했다. 즉 봄 3월에 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회한을 글로 풀어냈다. 이뿐만 아니다. 역시 자규루에 올라 지은 시 중 일부를 살펴보자.

소리 끊기고 새벽 봉우리에 남은 달 희어지니
봄 골짜기에 피 흐르듯 떨어지는 꽃 붉네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이 시에서도 春, 봄을 언급했다. 아울러 상기의 두 글을 살피면 단종은 1457년 봄에 영월에 있었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6월 말에 영월로 귀양 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불어 영월에서의 단종의 행적에 대해서도 모순이 드러난다. 정설로 굳어진 기록에 의하면 단종은 애초에 청령포로 적소가 정해지고, 홍수로 그곳이 물에 잠겨 동헌인 관풍헌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사사되어 시체를 청령포에 버렸다고 한다.

너무나 어설프다. 비록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지만 그 당시는 노산군, 즉 왕자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를 절해고도로 표현되는 청령포에 수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 애초에는 그의 직급에 걸맞게 영월의 관풍헌으로 적소가 정해진다.

그러나 여름, 6월 말에 다시 숙부인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서인으로 전락한다. 서인이 관풍헌에 머무를 수 없는 노릇으로 이 시기에 청령포로 이배된다. 그리고 10월에 청령포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그곳에서 시체가 방치된다.

여기서도 주의를 요해야 할 사항이 있다. 관풍헌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면 굳이 시체를 청령포에 버리지 않았다. 역적의 시신은 최후를 맞이한 지점에 방치했다는 당시의 사실을 적시하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단종의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역사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아울러 훗날 그 진실은 백일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함부로 기록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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