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조폭 돈줄 변천사

2010.06.15 10:07:23 호수 0호

주먹은 옛말… 이젠 머리로 퍽퍽


최근 유흥업소 일색이던 조직폭력배들의 사업 방식이 다양화되고 있다. 연예 등 각종 기획사와 건설업, 대부업, 게임업은 물론 심지어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갈취 등 불법 이권 개입 대신 합법적인 ‘먹을거리’ 물색에 나서고 있는 것. 이처럼 수입원이 다양화 되면서 조폭들은 활개를 치고 있지만 이를 쫓는 검찰들은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고전적인 영업행태에서 벗어나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조폭. 그들의 ‘돈줄’ 변천사를 살펴봤다.


건설, 대부, 연예기획에 이어 M&A까지
자금원 다양화·수사환경 악화에 조폭 활개


지난 6일 서울중앙지검은 무자본으로 코스닥 상장업체를 인수한 뒤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폭력조직 범서방파 중간간부 김모(38)씨 등 2명을 구속 기소하고 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사채업자와 제2금융권 등에서 자금을 조달해 코스닥에 등록된 의류제조업체 A사를 인수하고서 회삿돈 43억8000여만원을 빼돌려 주가조작 자금으로 쓴 혐의를 받고 있다.

재개발엔 ‘주먹’이 약

김씨는 A사가 자기자본 잠식으로 관리종목에 지정되자 코스닥 등록을 유지하기 위해 223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시행하면서 대금을 사채로 납입했다 다시 돈을 인출해 빚을 갚는 ‘가장납입’ 수법까지 활용할 정도로 불법적인 기업 운영의 노하우를 꿰뚫고 있었다. 이처럼 재계로 진출한 조폭들의 범죄는 지능화 돼 가고 있지만 결국 제 버릇은 남 못 줬다.

주가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사채업자에게 담보로 제공한 인수기업 주식을 되팔지 못하도록 압박하는가 하면, 회사 운영자금 명목으로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회사의 예금계좌가 가압류되자 이를 강제로 취소하는 등 ‘조폭 본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외에도 과거 유흥업소에 한정됐던 고전적 업태에서 벗어나 조폭들은 건설·사채·연예업계를 무대로 활발한 영업을 벌이고 있다.

조폭들이 건설업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부터다. 주택 200만호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유흥업체에서 건설업으로 진출하는 조폭이 급격히 늘어난 것.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건설업계는 마진율이 높기 때문에 조폭들에게 매력적인 ‘꿀단지’로 통한다”며 “실제로 새시 시공업체의 마진율은 최소 40%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조폭들이 건설업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조폭들의 의지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또 이 관계자는 “일반 사업자라면 토지를 매입하거나 철거민을 내보내는 데 많은 세월이 걸린다”며 “하지만 ‘주먹’을 앞세우면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재개발이 유난히 많은 한국의 건설업계가 조폭들에게 자리를 내줬다는 얘기다. 조폭들의 또 다른 돈줄은 대부업이다. 조폭들이 사채놀이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지금과 같은 불황기였다. 12년 전 현금유동성이 부족했던 IMF 위기는 조폭에게 자본축적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이 사채시장에 뛰어든 이유는 하나다. 수많은 현금이 오고간다는 점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폭은 훌륭한(?) 사채업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췄다. ‘폭력과 협박’이 바로 그것. 성공한 조폭으로 폼 나게 살기 위해 갈고 닦았던 이 무기는 사채시장에서 유독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미수금 받아드립니다’란 플래카드를 내걸고 사채업자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데 비해 현재 조폭들은 더 큰 수익을 내기 위해 대부업체를 직접 꾸려가기도 한다.

실제로 신촌 일대 유흥가를 장악한 뒤 사채업에 손을 뻗쳐 100억원대 자금을 운영한 기업형 조폭이 적발된 사례도 있다. 이들은 유흥업소 갈취, 보험사기 등으로 벌어들인 30억원을 종잣돈 삼아 명동 사채시장에 진출, 100억원의 자금을 주무르는 기업형 조직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 불법 대부업체를 차려 500%가 넘는 고리이자를 받아 챙긴 폭력 조직이 적발되기도 했다.

광주지방 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광주 모 조직폭력배 행동대장 김모(47)씨와 조폭 두목 전모(51)씨 등 3명을 대부업법 위반혐의로 붙잡았다. 2006년 6월 대부업체를 차린 이들은 약 3년 동안 100여 명에게 돈을 빌려주고 최고 542%의 고리이자를 받아 수익을 챙겼다. 또 이들은 단속에 걸릴 것을 대비해 친구의 명의를 빌려 XX개발이란 상호로 등록을 한 뒤 사채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예계와 조직폭력의 유착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현상이다. 지난 197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조폭들은 일부 인기가수들의 유흥업소 출연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연예계에 기생해 왔다. 폭력 조직원 출신들이 1인 매니저 겸 보디가드로 일하며 밤무대 출연 및 지방 행사를 주선해주고 출연료와 사례비를 소속 가수들과 나눠 갖거나 활동비를 명목삼아 모두 착복하는 게 당시 연예계의 뒷모습이었다.

특히 1990년대 말 불어 닥치기 시작한 ‘한류 열풍’으로 파이가 커지면서 연예계는 조폭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부를 축적한 일부 조폭 출신 매니저들은 거대 유흥업소를 운영하며 연예 관련 기획사를 차려 연예계의 ‘큰손’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조직폭력의 개입이 가장 자주 물의를 빚은 부분은 공연 관련 사업. 특히 지방공연 관련 이권에는 여전히 조폭들이 관련된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대부, 건설업 등 합법적인 사업을 가장해 세력을 확장하는 까닭에 조폭은 그 어느 때보다 활개를 치고 있다. 과거엔 살인, 폭행, 범죄단체 구성 등의 혐의를 쉽게 적용할 수 있었으나 최근 경제범죄로 옮겨가 단속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조폭들은 거액의 수임료를 들여 유력 법무법인이나 변호사 도움을 받는다.

최윤수 대검 조직범죄과장은 “과거 폭력조직의 자금원이 유흥업소 운영 등에 국한됐지만 최근에는 대부업, 건설업 등으로 확대됐다”며 “자금원이 다양해지면서 폭력조직의 서식환경이 좋아짐에 따라 조직폭력배가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수사여건은 악화

이런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공판중심주의와 불구속 수사원칙의 강화로 수사여건이 불리해졌다. 이는 가뜩이나 어려워진 폭력조직 수사·단속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조직범죄는 갈수록 치밀하고 교묘해져 법망을 피해다니고 있지만 임의동행·압수수색·구속 등의 요건이 엄격해지면서 수사나 단속은 과거보다 더욱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검·경찰은 조폭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조폭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 서서 국민들의 피를 빨고 있다. 그 피해자는 우리의 부모, 형제 혹은 스스로가 될 수 있다. 조폭을 발본색원하는데 시급한 대책이 마련돼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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