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 대모’ 이선애, 파란만장 인생사

2015.05.11 11:27:57 호수 0호

평생 고생하다…서러운 말년

[일요시사 경제2팀] 박호민 기자 = 태광그룹의 공동창업주인 이선애 여사가 지난 7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맨손으로 태광그룹을 일궜지만 말년을 교도소와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일각에서는 그녀를 두고 ‘기구한 운명’이라고 한다. 대기업의 창업주에서 순탄치 못한 삶을 산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여사는 태광그룹의 창업주 고 이임용 선대 회장의 부인이자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어머니다. 그는 1927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1943년 이 선대회장과 중매로 결혼했다. 이 선대회장과의 사이에 식진(사망), 영진(사망), 호진 3형제와 경훈, 재훈, 봉훈 3자매를 뒀다. 그의 동생은 전 태광그룹 회장을 지낸 이기화씨와 민주당 총재를 지낸 이기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다. 

태광그룹 산파
 


이 여사는 부산진시장에서 포목사업을 시작해 태광그룹의 모체가 되는 태광산업의 창업 종잣돈을 마련했다. 그녀는 의류사업이 커진 후 공직생활(면사무소)을 하던 이 선대회장과 함께 1950년 부산 문현동에 태광산업을 창업했다. 태광그룹의 모체가 이 여사의 손끝에서 나온 셈이다.
 
섬유를 기반으로 한 태광산업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태광산업의 주력 상품인 아크릴이 양모 대체품으로 인기가 많았고 경쟁업체가 적은 덕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이 경제 개발과 수출에 힘을 실어주면서 태광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은 거듭됐다. 1970년대 섬유 호황기의 수혜를 받은 태광은 동양합섬, 고려상호신용금고, 흥국생명, 대한화섬, 천일사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나가던 태광그룹은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치적 외압에 시달려야 했다. 이 여사의 동생이자 야당 거물인 이기택 민주당 총재가 전두환 정권의 심한 감시를 받으면서 태광그룹도 혹독한 세무조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태광그룹이 언론 등과 멀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후로 이 여사는 회사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언론의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그런 그녀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2010년 10월 태광그룹의 내부비리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면서부터다.
 
당시 태광그룹은 1996년 이 선대회장이 작고한 뒤 이기화 회장 시대를 거쳐 이 여사의 삼남인 이호진 회장이 2004년부터 회사를 이끌고 있었다. 이 여사의 첫째와 둘째가 각각 지병과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셋째인 이호진 회장이 자연스럽게 회장직에 오른 것이다.
 

회장직에 오른 이 회장은 한빛방송을 인수하고 케이블 방송인 티브로드 방송을 출범시키며 미디어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2006년 흥국화재, 흥국증권, 예가람저축은행 등을 인수하며 금융사업 확장하며 태광그룹을 재계 30위권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남편과 그룹 일궈…한때 그룹 재무총괄
비리 드러나 곤욕…형집행정지 중 별세
 
그러나 이 회장은 태광그룹 소액주주 대표인 박윤배씨로부터 ‘이 회장이 그룹 계열사인 고려상호저축은행 계좌에서 4000억원 규모 비자금을 관리했다’며 2010년 고소를 당하면서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결국 이 사건은 이 여사를 압박했다. 
 
 
실제 이 여사는 1962년부터는 태광그룹 이사직을 맡아 재무업무를 관리하면서 회사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팔순을 넘긴 고령에도 상무직을 맡았다.
 
결국 그는 2012년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과 벌금 20억원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을 당했다. 이 회장도 회장직을 내려놔야 했고,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6월과 20억을 받아야 했다.
 
쓸쓸한 죽음
 
이후 그는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결국 이 여사는 형기 3년6개월 가량을 남겨두고 관상동맥 협착증 등 숙환으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은 뒤 병원생활을 이어가다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세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친 아들인 이 전 회장의 건강이 악화돼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그의 마지막은 쓸쓸했다.
 
<donky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선애 여사의 육영사업은?
 

이선애 여사는 평소 육영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7년 6월 일주학원을 설립했다. 1978년 3월 서울 서초구에 세화여중·고를 개교하면서 그 당시 최초로 중앙난방 방식과 교실 에어컨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나라가 잘 되려면 교육이 잘 돼야 하고, 교육이 잘 이뤄지려면 어머니가 될 여자가 먼저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선대 회장과 함께 1990년 일주학술문화재단을 만들어 국내·외 학·석·박사 장학생 지원 등 각종 장학·학술 사업을 진행했고, 2010년에는 선화예술문화재단을 설립해 신진 작가를 지원하거나 문화예술 공간 나눔 활동 등을 펼치기도 했다.
 
그의 장례도 학교법인 일주학원·일주학술문화재단·선화예술문화재단장으로 치러졌다. 재단은 근검절약을 실천한 고인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렀다.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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