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나는 목사다”

2015.01.26 10:00:49 호수 0호

논현동 개척교회서 목회활동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김 동지, 이 나라를 한번 살려주십시오. 대한민국 구할 사람은 김 동지밖에 없습니다.” 정치인들의 이 한마디로 1987년 한 젊은 청년은 백주대낮 조직원 100여 명을 이끌고 통일민주당 창당 대회가 열리고 있는 관악지구대를 습격한다. 그 청년은 ‘용팔이 사건’의 주범이 돼 정치깡패로 이름을 떨쳤다. 바로 김용남(65) 목사가 젊었을 때 걸어온 길이다. 




김용남 목사는 195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씨름꾼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인한 체력 덕분에 전국체전 3년 연속 금메달을 따며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조직 폭력계에 발을 들이고, 정치에 개입하며 ‘용팔이 사건’으로 2년6개월 교도소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교회 생활과 전도 사업으로 목자의 길에 이르게 됐다.
 
2002년 조직 정리
 
용팔이의 상징과 같은 콧수염. ‘이게 과연 60세의 손인가’싶을 정도로 거대한 손과 악수를 하며 그 악력에 기자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젊었을 때 사진에 비친 매서운 눈이 아닌 푸근한 눈, 깊은 쌍꺼풀, 넓적한 코는 새롭게 태어난 ‘목사 김용남’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김 목사는 2002년 조직을 정리하고 신앙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처음 교회를 다닐 때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습니다. 유혹도 많았죠. 하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분들이 나를 다 잡아주시더군요. 어렸을 때 누가 날 그렇게 다 잡아줬다면 깡패 생활을 했을까 싶습니다.”
 
김 목사는 몇 년간 조직과 모든 연락을 끊고 교회에만 전념했다. 그 시간 동안 봉사활동과 신앙생활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처음에는 믿음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일했던 조직원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죠.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을 흔들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옛 조직원들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아요. 오히려 전도합니다.”

 
인터뷰 중간중간 기자는 김 목사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주님을 믿은 순간부터 내 삶이 완벽하게 변했다. 이야기하면서 지금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며 눈을 닦기도 했다.
 
김 목사는 지난해 5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소속 서울 강동구 천호동 성도순복음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다녔던 서초동 사랑의교회 내부 문제에 불만을 품고 교회에 불을 지르려 한 혐의로 사흘 뒤 법정 구속돼 징역 5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소수의 사람이 교회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내려놓지 못해 생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1월에야 교회를 열고 첫 예배를 올렸다.
 
논현동 개척교회서 목회활동
유흥가 음지 선교에 자신감
 
강남사랑의교회는 아직 두 달밖에 되지 않은 개척교회지만 신도 수는 벌써 40명에 이른다.
 
“매주 한 두 분씩 새로운 사람들이 제 집회를 들으러 옵니다. 나를 응원해주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아직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나온 내 과거니깐 잘 이겨낼 것입니다.”
 
김 목사는 파란만장했던 젊은 시절을 겪었다. 그래서일까. 교도소 수감자나 청소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청소년 시절 그 누구보다 불우하게 보냈습니다. 교도소도 많이 다니며 출소하면 기쁘기보다 얼마나 막막한지도 잘 알죠. 그들에게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교회를 세웠죠.”
 
청소년 문제에 관심

‘양지로’ 바른길 인도
 
김 목사가 세운 강남사랑의교회는 논현동에 있다. 흔히 노른자 땅이라 불리며, 교회가 많아 신도 경쟁도 심한 그 일대에 교회를 세우기란 쉽지 않다. 왜 하필 강남에 교회를 세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강남에 청소년들이 많이 모입니다. 사건 사고도 많고, 유흥업소도 많죠. 이들을 상대로 목회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음지에서 누구보다 목회 활동을 잘할 수 있겠다 싶어 교회를 열었죠.”

 
김 목사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앞으로 방향도 뚜렷하게 제시했다. 그래도 세상의 평가는 아직 냉혹하다. 목사가 됐어도 여전히 깡패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김태촌, 조양은이 한몫했다. 신앙을 통해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다고 고백했지만 검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제2의 인생 시작
 
“처음 교회에 갔을 때 신자들이 내 손을 잡으며 ‘잘 왔다’, ‘복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뒤돌아 손가락질하더군요. 진정한 목회자가 될 겁니다. 지켜봐주세요. 누가 뭐래도 나는 목사입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1987년 용팔이 사건은?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은 통일민주당의 창당대회를 폭력배들이 방해한 사건이다. 당시 사건 주동자 김용남의 별명 용팔이를 따서 ‘용팔이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지시로 안기부가 개입한 대표적인 정치공작의 하나이다.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 이철승 등은 당시 정부의 내각제 개헌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발한 김영삼, 김대중 등은 7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했다.

1987년 4월20∼24일 통일민주당의 20여개 지구당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렸으며, 이로 인해서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통일민주당측은 처음부터 이것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 규탄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1988년 9월이 되어서야 김용남(일명 용팔이)와 이선준 당시 신민당 청년부장이 검거됐다. 검찰은 신민당의 이택희, 이택돈 의원이 청부폭력을 지시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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