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문지방 닳는 ‘점집’<풍속도>

2010.01.12 09:29:11 호수 0호

취업·결혼·성공“올해는 될까요?”

새해벽두만 되면 문지방이 닳는 곳 중 하나가 점집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남편과 자식의 앞날을 점치려는 중년부인들은 용하다고 소문난 철학관으로, 백수탈출과 솔로생활 면하기가 꿈인 젊은이들은 사주카페나 타로점집을 찾고 있다. 불황 속에서 좀처럼 열리지 않는 지갑도 복채를 낼 때는 거리낌없이 열리고 있다. 신년을 맞아 문전성시를 이루는 점집에서 각종 사연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봤다.

새해 운세 보려는 사람들로 전국 점집 불야성
어려운 현실 속에서 미래 희망 얻으려고 찾아


신정연휴로 불 꺼진 업소들이 간간이 보였던 지난 1일, 유독 사람들이 몰려있는 포장마차촌이 눈에 띄었다. 이곳은 서울 한 번화가에 위치한 사주포차 골목. 추운 날씨 속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상기된 표정이었다.

점괘 따라 울고 웃고

신년회를 하러 왔다가 우연히 사주포차를 발견했다는 직장인 김모(28·여)씨를 만났다. 김씨는 자신을 ‘점 마니아’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학창시절부터 점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녀는 유명한 사주카페나 타로카페 등을 수소문해 찾아다닐 정도라고 했다.
김씨는 “맹목적으로 점괘를 믿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결정을 앞둘 때면 버릇처럼 점집을 찾는다”며 “오늘은 점을 볼 계획이 없었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느냐”고 웃어 보였다.

기다림 끝에 점을 보고 나온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오늘 본 점은 전반적인 2010년의 운세인데 다행히 점괘가 꽤 잘 나왔다고.
김씨는 “그동안 점을 많이 봐서 점쟁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편은 아니지만 하는 일마다 잘 풀린다는 식의 말을 들을 때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사실이든 거짓이든 희망적인 메시지를 듣고 긍정적인 기운을 얻는 맛에 점을 못 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로 자신의 앞날에 대해 점을 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40~50대의 중년부인들은 자식들의 앞날에 대해 상담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50대 주부인 박모씨 역시 아들의 운세를 보기 위해 포장마차를 찾았다고 말했다. 대학졸업 후 1년 동안 백수신세를 면치 못하는 아들의 취업운을 보는 것이 오늘 점집을 찾은 이유다.
손을 모은 채 초조하게 점괘를 기다리던 박씨는 ‘올해는 아들이 반드시 취업을 할 것’이란 점쟁이의 말을 들었다. 마치 아들의 합격소식을 들은 듯 안색이 환해진 박씨는 “점을 보고 왔다고 하면 아들은 괜한 짓 했다고 타박하겠지만 점쟁이가 해 준 말을 전해주면 기운이 날 것이다”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박씨와는 달리 시큰둥한 표정으로 포장마차를 빠져나오는 이들도 보였다. 이직 문제로 점을 봤다는 정모(30·여)씨도 돈만 날렸다며 쓴 입맛을 다셨다.
지난달 직장을 그만두고 앞날을 고민하던 정씨는 새해 첫날을 맞아 사주포차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점쟁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취업전문가에게나 들을 만한 뻔한 이야기였다고.
정씨는 “뚜렷하게 앞날을 제시해 줄 거라고 믿거나 점쟁이에게 내 운명을 맡기는 건 아니지만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이야기나 들으려고 이곳에 와 돈을 쓴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점술가의 점괘를 요약하면 “지금은 불황이라 어려우니 내년쯤에나 이직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었다고 하니 돈이 아깝다는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친구를 따라 포차에 왔다는 김모(26·여)씨는 얼마 전 점을 보다 불쾌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한 번도 연애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서울의 한 사주카페에서 연애운을 봤다고 한다.

그런데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 점술가의 행동이 이상했다고 한다. 시종일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점을 봐줬다는 것. 김씨는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더니 급기야는 ‘내가 남자친구가 되면 어떻겠냐’는 농담까지 하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점술가의 불쾌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의 몸매를 훑어보더니 “몸매가 글래머인데 왜 남자친구가 안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시선을 그녀의 가슴 쪽에 꽂아둔 채 말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김씨는 “그 점쟁이 때문에 너무 불쾌해 이후로는 절대 점을 안 보기로 결심했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인근의 다른 사주포차에서 취업운을 보고 나온 유모(30)씨는 “언제 대학을 졸업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등 맞추는 게 하나도 없더라”며 “족집게처럼 딱딱 맞추는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저 정도면 나도 장사할 수 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점쟁이가 본 운세라 그런지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며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인기 따라 복채도 쑥쑥

이처럼 점을 본 뒤 느끼는 기분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어 설렘을 안고 돌아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실망감과 본전 생각에 찜찜한 기분으로 점집을 나서기도 했다. 특히 불황 속에서 점에 기대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노린 일부 역술가들이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엉터리 점을 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해 두 번 상처를 입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점 열풍이 가져온 또 다른 폐해는 점 값이 날로 치솟고 있다는 것. 임모(32)씨는 점 열풍을 등에 업고 지나친 장삿속을 펼치는 얌체 점집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임씨는 “연예인 등 유명인이 많이 간다고 해서 강남에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점집이 있는데 몇 개월 사이 값을 두 배로 올려 받고 있다고 들었다”며 “밑천도 안 들어가는 점집들이 찾아온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지나치게 돈을 벌어들이는 것 같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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