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아군, 오늘은 적”… 경제정글에선 ‘영원’ 없다

2009.11.10 09:25:19 호수 0호

‘한솥밥 먹던’ 옛동지, 친정에 비수 비일비재
‘잘 키운’ 협력업체 배신…형제기업에 뺨 맞기도



금지옥엽으로 키운 자식에 밥그릇을 빼앗긴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이만큼 컸구나”라며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아니면 “버릇없다”을 내야 할까. 최근 재계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회사가 공들여 육성한 인재들이 뛰쳐나가 ‘친정’에 비수를 꽂거나 막역했던 ‘형제사’끼리 피 튀게 경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군’으로 바뀐 아슬아슬한 광경을 들여다봤다.

A그룹은 요즘 큰 고민이 생겼다.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실적을 거두며 잘나가고 있지만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는 사업부문에 ‘복병’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탓이다. A그룹에 앞서 동종업계에 출사표를 던진 중견업체 B사다.
 
“자식도 못 믿는다”

A그룹에 비해 내외형적으로 비교가 안 될 만큼 몸집이 작은 B사는 A그룹의 대규모 투자 등 엄청난 물량 공세 틈새에서 꾸준히 한우물만 팠다. 그 결과 현재까지 스코어는 당초 예상을 뒤집고 A그룹보다 작지만 강한 B사가 더 입지를 다졌다는 업계의 평가가 나오고 있다.

A그룹은 “상대가 되냐”며 애써 B사와의 라이벌 관계를 부인하지만 “A그룹으로선 B사가 꼭 넘어야 할 산”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A그룹이 바짝 긴장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B사 사장이 A그룹 출신이란 점이다. 이 사장은 A그룹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오너의 총애까지 받았다고 한다.

‘A그룹이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뒷말이 나오는 대목이다. B사 사장은 퇴직하자마자 A그룹이 투자를 모색한 사업에 한 발 먼저 뛰어들었고 A그룹이 견제할 만큼 회사를 키워 냈다.


재계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하극상은 더 이상 딴 나라 얘기가 아니다. ‘친정’에 비수를 꽂거나 ‘형제사’끼리 경쟁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로 흔한 광경이 된 지 오래다.

C사도 비슷한 이유로 속앓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옛 수장이 적진의 옷으로 갈아입고 칼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장은 2006년 전까지 C사 전문경영인(CEO)로 재직하다 한 시장에서 경쟁하던 상대업체로 스카우트됐다. C사 측에서 보면 믿었던 ‘아군’이 하루아침에 ‘적군’으로 바뀐 셈이다.

당시 C사 관계자는 “몇 년간 회사를 진두지휘했던 인사가 갑자기 경쟁업체로 자리를 옮기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아예 회사 기밀을 들고 적진으로 들어간 사례도 있다. 김모씨 등은 2007년 임원을 지낸 대형 중공업 회사에서 동종업체로 이직하면서 영업비밀을 빼낸 혐의로 구속, 최근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이외에도 주류, 외식, 식·음료, 정보, 유통, 광고 등 업계에서 스카우트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핵심 인력들이 경쟁사로 말을 갈아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두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시장법칙상 자연스런 현상”이란 긍정적인 반응과 “경쟁업체의 노하우 강탈과 같다”는 지적이 맞물린다.

유통업체인 D사는 인력이 아닌 ‘잘 키운’ 브랜드들의 배신으로 허탈해 하고 있다. 그동안 손잡았던 유명 외국 브랜드들이 국내 진출 뒤 잇따라 경쟁업체 품으로 들어간 것.

D사와 합작으로 지난해 한국에 들어온 ○○브랜드는 서울에서 D사와 상권이 겹치는 상대 쪽에 오픈한 데 이어 지방 한 지역에서도 ‘친정’인 D사를 두고 인근 다른 매장에 입점했다.

또 ○○○○ 브랜드도 D사 대신 라이벌사에 둥지를 틀었다. D사 측은 “계약상 문제가 없고 미리 협의된 사안”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업계에선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운 범에게 물린 꼴”이란 비유가 회자되고 있다.

게다가 D사는 파트너인 계열사들이 최대 숙적에 ‘안방’을 내주는 등 적과의 동침을 선언하거나 사업적 제휴 등 머리를 맞대는 경우까지 늘고 있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D사는 자사의 구역에서 경쟁업체들이 종횡무진 하는 모습을 보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재계 그룹들이 최근 계열사간 사업 영역의 교통정리를 서두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형제기업’간 영역파괴도 늘고 있다. E그룹은 동업자와 사업을 청산하면서 성공적으로 계열 분리를 마쳤다. 양사는 암묵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신사협정’을 체결했지만 중복되는 사업이 하나둘 보여 E그룹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불신 심화…갈수록 살벌

F그룹도 오너 형제간 끈끈한 혈맹관계에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동종업 진출 불가’원칙에 균열이 생긴 것. F그룹의 형제기업들은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면서 서로 부딪히는 사업이 부쩍 늘고 있다. ‘형님기업’들의 밥상에 ‘아우기업’들이 숟가락을 얹은 형국을 빗대어 ‘밥그릇 습격 사건’이라 불리며 양측 모두에게 타격을 주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경제 정글에선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다”며 “무조건 강해야 살아남는 한정된 시장에서 경쟁하다 보니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도의상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도 많아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심화돼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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