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 남편, 자식…’ 평생 가족만 알았다!

2009.10.13 09:34:47 호수 0호

현대家 안주인 고 이정화 여사의 ‘40년 그림자 내조’

3개월 전 담낭암 진단…병세악화 미국서 치료 중 별세
실질적인 맏며느리 역할 “지극 정성으로 가족에 헌신”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부인 이정화 여사가 지난 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 고 이정화 여사는 3개월 전 건강검진에서 담낭(쓸개)암 진단을 받고 국내에서 진료를 받다가 병세가 악화돼 미국으로 건너가 휴스턴 소재 MD앤더슨 병원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 ‘대가족’ 현대가의 실질적인 맏며느리 역할을 도맡았던 이 여사.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평생 조용한 ‘그림자 내조’로 40여 년간 현대가를 지켜온 이 여사의 일생을 조명해 봤다.

고 이정화 여사의 ‘그림자 내조’는 현대가로 시집가면서 시작됐다. 평범한 실향민 집안의 3녀인 이 여사는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홍익대 미대 재학 중 정몽구 회장을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소위 ‘잘나가는’ 집안과 거리가 먼 친정을 둔 이 여사가 재벌가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창업주의 자녀 결혼관 때문이다.

집안일에만 전념

정 창업주는 사돈의 출신이나 재산 등 가문을 따지지 않았다. 자녀들의 결혼에 대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은 것. 정 창업주의 자녀들은 대부분 사세 확장을 위해 상류층과 정략결혼을 서슴지 않은 국내 다른 재벌들과 달리 평범한 가문과 혼맥을 맺었다.

‘재벌 사모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 여사는 손윗동서인 이양자(고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 부인)씨가 1991년 위암으로 세상을 뜬 뒤부터 집안 대소사를 직접 챙기며 현대가의 실질적인 맏며느리 구실을 했다.


현대가는 대가족이다. 정 창업주는 6남1녀의 장남이자 슬하에 8남1녀를 뒀다. 이들의 방계 후손들까지 100여 명이 넘는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정 창업주는 내조를 최고의 미덕으로 꼽았고 그의 부인 고 변중석 여사도 평소 며느리들에게 “언제나 겸손하게 행동하고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마라”라고 교육했다. 이 여사의 내조 스타일이 변 여사를 쏙 빼닮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시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이 여사는 좀처럼 외부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내조를 해왔다. 정 창업주 생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새벽 3시30분 한남동 자택에서 청운동 시댁으로 달려가 대식구의 아침을 준비했다.

2007년 8월 작고 전까지 1989년부터 19년간 병원 신세를 진 변 여사의 병수발도 이 여사의 몫이었다. 이 여사는 매일같이 거동이 불편한 변 여사를 찾아 시중을 들었다. 2006년 8월 조카인 정대선 현대BS&C 사장이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와 결혼할 땐 친아들의 결혼식처럼 상견례는 물론 손수 하객을 맞기도 했다.

40여 년 동안 집안 챙기기에만 전념한 채 대외활동을 자제한 이 여사가 그나마 외부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부터다. 당시 그룹의 레저 계열사인 해비치리조트 이사직을 맡은 데 이어 2005년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전업주부에서 경영인으로 깜짝 변신한 셈이다.

하지만 직접 경영을 맡지 않고 매주 1∼2회씩 딸들과 함께 해비치리조트를 찾는 등 자문에 그쳤다. 현재 해비치리조트 지분 16%를 가진 대주주 및 고문직에 올라있다.

이 여사는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소홀하지 않았다. 가정교육에도 많은 열정을 쏟은 것. 그의 자식들이 재벌가 자제라면 흔히 휘말리는 스캔들 한번 없이 자란 이유다.

이 여사는 정 회장과의 사이에 1남3녀(의선-성이-명이-윤이)를 뒀다. 장남 의선씨는 최근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며느리는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녀 정지선씨다.

장녀 성이씨는 현대·기아차그룹 광고 계열사인 이노션의 고문을 맡고 있다. 성이씨의 남편은 선두훈 영훈의료재단선병원 이사장이다. 차녀와 3녀 명이·윤이씨는 전업주부로 있는데 명이씨의 남편 정태영씨는 현대카드·캐피탈 사장이고 윤이씨의 남편 신성재씨는 현대하이스코 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이 여사는 자녀들에게 겸손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수시로 들려주며 공손함이 몸에 배도록 하는 한편 본인 스스로도 상대방을 예의 바른 태도로 대함으로써 자식들이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며느리와 사위들에겐 시골 아낙네 같은 넉넉함으로 대접 받으려 하지 않고 따뜻한 정으로 내리사랑을 보여주면서도 “조심스러운 행동과 겸손을 잊지 말라”고 항상 일렀다.

그중에서도 외아들 의선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이 여사는 2008년 1월 기아차 ‘모하비’신차발표회 등 의선씨가 주도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할 만큼 아들 사랑이 각별했다. 그때까지 이 여사가 회사 공식 행사에 참석한 것은 극히 이례적으로 ‘공식 행사 불참’불문율을 깬 것은 막 나래를 펴고 비상 직전인 의선씨를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의선씨는 모하비 행사 도중 이 여사에게 “어머니,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이후에도 현대차 ‘제네시스’출시 행사, 프랑스 파리 국제모터쇼, 현대차 ‘에쿠스’ 신차발표회 등에 잇따라 참석해 의선씨의 활약을 지켜봤다. 그만큼 이 여사를 갑작스럽게 잃은 데 따른 의선씨의 충격과 애통함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 여사의 묵묵하고 헌신적인 뒷바라지는 정 회장이 한국 자동차산업의 대표 경제인으로, 현대·기아차그룹이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항상 겸손·검소”

특히 정 회장이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강력한 추진력, 도전정신 등은 가정을 묵묵히 지킨 이 여사의 내치가 없었다면 발휘되기 어려웠을 것이란 평이 일반적이다. 의선씨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들의 ‘바깥일’도 마찬가지다. 이 여사의 내조 없이 불가능했다는 게 중론이다.

그룹 관계자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정 회장과 현대·기아차 곁엔 항상 이 여사가 함께 있었지만 이 여사는 그룹 임원들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로 나서지 않았다”며 “이 여사는 한결같은 겸허함과 검소함, 근면함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모양처’와 ‘조강지처’의 표본을 몸소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현대가 다음 안주인은?

고 이정화 여사가 별세함에 따라 앞으로 사실상 현대가 ‘곳간 열쇠’를 이어받게 될 맏며느리에게 시선이 모이고 있다.


이 여사의 막내이자 외아들 의선(현대차 부회장)씨는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녀 정지선씨와 1995년 결혼했다. 정몽구 회장과 정도원 회장은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자녀들의 결혼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다는 후문이다.

정도원 회장은 당시 강원산업 부회장이었다. 석탄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강원산업은 2000년 INI스틸에 흡수됐다. 삼표그룹은 레미콘·골재 등 건설자재 전문기업으로 철도, 교량 등 엔지니어링 분야와 환경, 물류 인프라까지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다.

각각 25세, 22세의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한 의선-지선 부부는 1남1녀(창철-진희)를 뒀다. 서울대 음대를 나온 지선씨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시어머니인 이 여사를 도와 집안 대소사를 챙겨왔다. 고 변중석 여사와 이 여사에 이어 3대째 현대가의 내조를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지선씨는 신차발표회 등 이 여사의 외부활동에 항상 동행해 시어머니와의 애정을 과시했다. 또 20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진 변 여사를 틈날 때마다 돌보는 등 이 여사의 병수발도 도왔다. 지선씨는 이 여사의 병세가 나빠져 추석 연휴 직전 전세기를 이용해 미국으로 옮겨 치료를 받을 때 곁에 있었고 이 여사의 임종도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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