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전성시대다. 손에 드는 가방부터 입에 털어 넣는 약까지 모양만 그럴싸한 가짜들이 주머니 사정 가벼운 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불황으로 예전과 같은 소비생활을 하기 어려운 이들이 늘면서 ‘짝퉁’은 더욱 불티나게 팔리는 아이템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이는 가짜 제품 밀수 현황으로도 알 수 있다. 지난해에 비해 짝퉁 수입량이 두 배나 늘어난 것. 원산지도, 품질도, 원가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짝퉁제품들이 짝퉁공화국의 면모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짝퉁 밀수규모 지난해보다
2배 가까이 증가
가방, 시계, 비아그라 등 다양한 짝퉁
범람해 소비자 유혹
지난 15일 오후, 가짜 명품 판매로 유명한 서울 이태원시장의 한 골목에 들어섰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물건들은 조잡한 저가 이미테이션 제품들뿐.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짝퉁천국이란 이태원의 오명이 무색할 만큼 ‘특A’급 제품은 어디에도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짝퉁가방이 50만원?
“특A급이니까!”
“단속이 심해 짝퉁취급은 안 하나”란 생각을 하는 순간 골목 어귀에 앉아있던 한 청년이 다가와 “찾는 물건 있느냐”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신상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한 상점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조금 전 봤던 여느 상점과 다를 바 없는 잡화 가게였다. 먼저 온 손님에게 어떤 책자를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을 하던 여주인은 같은 책자를 가져와 펼쳐보였다.
가져온 책 안에는 온갖 브랜드의 가방사진이 즐비하게 모여 있었다. 그중 S사의 한 모델을 찾자 여주인은 마침 재고가 있다며 창고로 가 해당 제품을 가져왔다.
짝퉁 중에서도 최고급 제품으로 진품과 다를 바 없다며 자랑삼아 보여준 그 가방은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견고했다. 게다가 제품을 싸는 더스트백과 보증서까지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어 백화점에서 판다해도 속을 만한 제품이었다.
진품이라면 200만원을 호가하는 이 가방의 가격은 50만원. 웬만한 브랜드가방 가격에 버금가는 가격이지만 여주인은 매우 싸게 파는 거라며 생색을 냈다. 여주인은 “이정도 특A급 가방은 사려는 사람이 워낙 많아 부르는 게 값”이라고 운을 뗐다. 그래도 가짜 제품이 너무 비싼 것 아니냐고 묻자 “이런 가방은 정품과 똑같은 원단을 수입해서 수작업하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다.
백화점에 가서 전문가들에게 보여줘도 구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명품을 유통하는 한 관계자에 따르면 “300만원 짜리 핸드백의 경우 특A급 위조품은 100만원이 넘게 판매되기도 하는데 이런 제품을 뜯어보면 부품이 100만원 가치를 할 정도로 고급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고 말하며 비싼 모조품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비싼 가격에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자 여주인은 같은 디자인의 다른 가방을 하나 더 가져와 보여줬다. 슬쩍 봐도 좀 전에 본 제품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색상이나 디자인도 진품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바느질도 엉성했다. 이 제품의 가격은 10만원. 같은 디자인의 짝퉁제품이지만 40만원이나 차이가 나는 것.
여주인은 “짝퉁이라고 해서 다 같은 짝퉁이 아니다. 이렇게 티 나는 가짜를 저렴하게 살 바엔 돈을 좀 더 쓰더라도 진짜와 흡사한 걸 사는 게 남는 것”이라고 설득을 했다. 그러는 동안 20대로 보이는 여자 손님들의 발걸음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단골로 보이는 이들은 진짜와 다를 바 없는 가짜 명품 가방을 어깨에 메고 주문했던 또 다른 짝퉁 가방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사갔다.
이처럼 벌건 대낮에도 가짜 명품은 암암리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이태원뿐만 아니라 동대문, 남대문 등 짝퉁의 메카(?)로 알려진 곳에는 단속을 비웃으며 여전히 수많은 모조품들이 거래되고 있다. 최근엔 일본, 중국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기도 하다.
“형편이 어려워서”
가짜라도 명품이 제맛
짝퉁명품이 거래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시장은 인터넷. 약간의 수고만 감수하면 발품을 팔지 않고도 가짜명품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짝퉁을 판매하는 수많은 인터넷카페 중 한 군데를 골라 명품시계 구입을 시도해봤다. H사의 한 모델을 구한다는 쪽지를 카페주인에게 보내자 몇 분 지나지 않아 계좌번호와 시계가격 등의 정보가 담긴 답이 왔다.
스위스 시계공장에서 사용하는 부품들을 그대로 사용한 정교한 ‘가짜’라는 친절한 설명도 함께 곁들여졌다. 실제로 카페게시판 등에는 제품을 구매한 이들의 후기가 담겨있어 방문자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들 짝퉁 명품은 불황 속에서 오히려 더 활개를 치고 있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진짜 명품을 사기 힘든 이들 가운데 짝퉁제품으로라도 만족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짝퉁 시장이 점점 더 커지게 된 것.
이는 조사결과로도 나타난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이 지난 13일 관세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7월 짝퉁 상품 밀수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87% 증가한 5436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가짜 상품 밀수액은 지난 2007년 6523억원, 2008년 5147억원으로 감소했다가 다시 급증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집계된 밀수액만 해도 이미 지난해 수준을 훌쩍 넘긴 것으로 파악됐다.
품목별로는 짝퉁 시계가 3181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핸드백·가죽제품(870억원), 의류(633억원), 발기부전 치료제(358억원) 등 순이었다. 이 의원은 “경제위기로 짝퉁 명품에 대한 수요가 많아진 것 같다”며 “특히 중국산 짝퉁 밀수액은 5296억원으로 전체의 95%를 차지하는 만큼 중국 세관당국과의 공조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태원, 동대문 등 단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짜명품 판매
인터넷 짝퉁매장 암암리 성황 중… 입금만 하면 언제든 구해
이처럼 짝퉁시장 규모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불황에도 명품시장은 활황이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짜 부자’들이나 살 만한 브랜드에 한해서다. 명품 중의 명품인 ‘위버럭셔리’(초고가 명품) 브랜드가 그것. 이에 비해 대중화된 명품인 ‘맥럭셔리’(맥도날드 햄버거처럼 흔한 명품) 브랜드는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매출이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맥럭셔리 제품들을 구매하던 ‘적당한 부자’들 중 일부가 거대해진 짝퉁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서울 청담동에서 미용업을 하는 A(48·여)씨도 얼마 전부터 짝퉁 명품 마니아가 됐다. A씨가 처음부터 짝퉁제품을 산 것은 아니었다. 경기가 좋아 수입이 많을 때는 백화점이나 면세점을 이용해 진짜 명품을 샀다. 그러나 불황의 파고가 닥치면서 신상명품을 거침없이 사는 것은 남의 일이 됐다. 그렇다고 명품의 유혹을 떨칠 수는 없었다.
명품의 메카 ‘청담동’에 살고 있다는 것은 A씨를 압박하는 큰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유행이 지난 명품가방, 신발 등을 지니기엔 보는 눈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결국 A씨는 차선책으로 짝퉁 명품을 찾기 시작했다. 짝퉁이라고 해서 아무 물건이나 사지는 않았다. A씨가 사는 제품들은 겉으로 보기엔 진짜와 다를 것 없는 특A급 짝퉁들이다.
진품을 상징하는 번호인 ‘티씨코드’와 ‘시리얼넘버’까지 찍혀 있어 일반인은 도저히 구분하지 못하는 제품들이다. A씨가 선호하는 브랜드는 샤X. 짝퉁으로 넘쳐나는 루이XX보다는 희소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 개당 가격은 50만원을 호가한다. 웬만한 브랜드의 진품가격보다 비싼 가격을 주고 짝퉁가방을 사고 있는 것.
가짜 명품을 사면서 생각보다 주위에 짝퉁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한다. 헬스클럽이나 피부관리실이 짝퉁제품을 공유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A씨는 “짝퉁 가방을 들고 나가도 우리 동네에선 ‘그 가방 진짜냐’고 묻지 않는다. 당연히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며 “내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것만 빼면 진품을 샀을 때와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
중년 여성들이 즐겨 찾는 것이 짝퉁가방이라면 중년 남성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짝퉁 비아그라다. 짝퉁 가방과 다른 점은 자신이 복용하는 비아그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조차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는 것.
조금이라도 싸게 약을 사기 위해 뒷구멍을 통해 구하다 보니 진품여부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대놓고 가짜라고 말하며 판매하는 가짜명품가방과는 달리 정품약이라는 판매자의 말에만 의존해야 하는 것.
문제는 가방이나 시계 등 가짜제품과는 달리 짝퉁 비아그라는 몸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분을 알 수 없는 위험천만한 중국산 가짜 비아그라가 암암리에 팔리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들도 늘어만 간다.
이 약으로 인한 피해자들은 불법적인 경로로 약을 구입했다는 이유로 부작용에 대해 털어놓을 곳도 마땅치 않아 속으로만 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큰 문제는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가짜 비아그라의 밀수규모가 점차 커진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가짜 비아그라 3만 정을 국내로 밀수입한 김모(51)씨가 부산세관에 덜미를 잡혔다. 김씨는 지난해 12월28일 중국 위해시로 출국, 조선족을 통해 중국제 가짜 비아그라 3만 정(진품가격 약 5억원 상당)을 우리 돈 400만원을 주고 구입해 유통시키려다 수포로 돌아갔다.
활개치는 인터넷 약국
짝퉁 비아그라 버젓이
이 같은 과정으로 들여온 짝퉁 비아그라는 각종 경로를 통해 팔려나가고 있다.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인터넷. 현재 수많은 인터넷약국에서 불법으로 이들 약품을 팔고 있다. 휴대폰 스팸문자로도 가짜 비아그라를 파는 광고가 심심찮게 날아 들어온다. ‘<정품>전국후불제 비아*씨알리스 효과/만족 100 상담/신청은 문자로 주세요’라는 식의 문자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휴대폰을 습격하고 있다.
심지어 길거리를 지나다가도 쉽게 약 광고를 찾아볼 수 있다. 명함크기의 전단이 길가에 버젓이 뿌려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짝퉁공화국이란 오명에 걸맞게 명품, 약품 등 다양한 짝퉁제품들은 쉽고 간편하게 유통되고 있다.
한 전문가는 “모조품들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는 것은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뜨려 국가경쟁력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며 “가짜 제품을 파는 행위나 구하는 행위는 그 브랜드가 쌓아 온 명성이나 기술을 훔치는 도둑질이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