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아트인> '인물화의 대가' 지산 박영길 화백

2013.04.15 14:46:09 호수 0호

"그림은 나의 행복, 나의 사랑, 나의 삶"

[일요시사=사회팀] 박영길 화백은 상대의 목소리만 듣고도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인물화의 대가'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물화는 그가 가진 재능의 일부일 뿐. 사군자부터 정물화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붓은 막힘없이 늘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산(芝山)이 붓을 들자 그곳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하
얀 종이는 이내 푸른 대나무 숲으로 바뀌었고, 바위틈에는 어느 샌가 분홍빛 난이 봉우리를 틔우고 있었다. 서양화가로 이름 높은 지산 박영길 화백은 섬세한 붓놀림으로 마주 본 이를 매료시키는 묘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화려한 경력

"저는 그림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껴요. 자식을 바라볼 때 느끼는 그런 감정 있잖아요. 어려움이 없었냐고요? (그림을 그리려고) 산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무릎이 깨지고, 무릎 맡에 있던 그림이 바람에 날아가고…. 이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건데 어려움이라 보긴 어렵죠."

"어쩔 때는요. 내 그림을 보면 조금 창피해요. 제 벌거벗은 자태나 마찬가지거든요. 보통 분신이라고들 하죠. 내 분신인 아이를 잉태하면 몇 달 동안 애지중지하듯 그림에도 그렇게 정성을 들인답니다. 그게 너무 행복해요. 또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마주하는 순간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박 화백의 화실에는 그가 출고한 그림과 그때마다 받은 상패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인 그의 그림은 한때 2억원이 넘는 가격에 경매되기도 했다. 협소한 미술시장에서 박 화백은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너무 감사하죠. 얼마 전에 한국미술협회에서 초대작가제가 부활했는데 저도 그 중 1명이 됐어요. 이것만 해도 영광인데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으로까지 위촉됐어요. 거기서 몇 해 전부터 심사위원도 하고 있고요."

"평생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니까 매우 감사한 거예요. 또 국방부에서는 호국미술대전 운영위원도 부탁받았습니다. 제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갖고 있는 재능에 비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박 화백은 국내 작가 중 중국에서의 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벌이고 있는 작가다. 한중 수교 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대륙과 인연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그림을 들고 현지를 오간 것만도 수십여 차례. 최근에는 중국 조어대 국빈관에서 군 장성의 초청으로 특별전시회를 갖는 경사를 누렸다. 조어대는 중국 정부가 세계 각국의 원수를 대접하는 곳으로 유명한 유서 깊은 명소다.

"조어대에 정말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루 전에 기차를 타고 미리 도착하신 분도 있었고. 그래서 한국말을 잘하는 장군에게 '여기서 그림을 그려 선물하고 싶다' 이렇게 말했더니 다들 박수를 쳐주시는데 그 순간을 참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 다들 제 그림을 지켜보는데…. 제가 어떻게 보면 한국을 대표해서 왔잖아요? 그때가 참 떨리면서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한국 미술계 거목…인물화부터 정물화까지 다재다능
대륙을 사로잡은 예술…한국 대표로 세계 각국서 국위선양


대륙을 사로잡은 박 화백의 예술은 지금 또 다른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의 독립국가인 아제르바이잔에서 박 화백의 작품을 본 뒤 직접 전시회 요청이 들어온 것. 중국과 미국,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이미 전시회를 열었던 박 화백이지만 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동양인 화가를 찾았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이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연락을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오는데 이런 인연을 귀히 여기고, 항상 제가 가진 재주를 나누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제가 뭐라고 제 이름을 내건 골프대회까지 여냐고요."

"처음에는 제 이름만 내주고 안 갔는데 요즘에는 미안해서 시상 정도는 하러 나가요(웃음). 제 자랑 하나만 더 할까요? 원래 제가 인물화를 그렸잖아요. 한번은 제가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 선생의 영정을 그렸는데 이게 국가지정 표준영정 67호로 지정된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제 그림이 실린다는 얘기였죠. 이건 정말 큰 자부심이 됐어요."



박 화백은 10여 년 전께 한 보육원에서 두 아이를 입양해 키운 적이 있다. 지금 아이들은 모두 친족을 찾았지만 그는 두 아이를 통해 삶을 배웠다고 했다.

"아이에게 자폐가 왔었어요. 그 아이는 매일 리모컨을 만지작대는 게 일이었죠. 어느 날은 아이에게 밥을 주다가 밥이 아이 콧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그걸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막 눈물이 났어요. 제가 비위가 약한데 이런 사소한 걸 더럽다고 느끼면 '나는 너를 지금까지 가식으로 양육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게 됐습니다. 사랑을 통해 삶을 배웠고, 또 사람들과 함께 하는 방법까지 배웠습니다."

그림은 사랑


인터뷰 말미. 그가 건넨 앨범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어딜 가나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박 화백. 그의 타인을 향한 넉넉한 마음 씀씀이가 작품 곳곳에 묻어났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지산 박영길은?]

▲한국인물화미술협회 회장
▲대한민국 인물화대전 대상(2011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겸 운영위원
▲한국미술협회 서양화분과 이사
▲예원예대 문화예술대학원 특임교수
▲북경 조어대 국빈관 전시 및 국내외 전시 150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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