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번역의 탄생

2009.02.24 14:13:45 호수 0호

2008년 한 해 동안 발행된 신간 총수는 4만3099종, 그중 번역서는 1만3391종으로 31%를 차지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번역서 비중이 1위이다. 그만큼 번역문이 한국인의 말글 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특히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책일수록 번역서가 많기에 지식층과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런데 한국 번역에는 이론서나 믿을 만한 실무서 하나 찾아보기 어렵고, 번역의 기본적 원칙조차 없다. 일본어 번역투, 영어 번역투 문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외국어와 다른 우리말의 개성이 바랜 지 오래다.
이책은 우리말과 글을 바로 세우는 살아 있는 번역 원칙론을 제시한다. 20여년간 말과 말이 치열하게 맞붙는 번역 일선에서 살아온 전문 번역가 이희재에게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문장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겪은 갈등과 고민이 거시적 언어 이론의 틀로 스며들어 새로운 번역론으로 탄생했다. 저자는 한국어를 좁은 ‘우리말’ 틀이 아니라 ‘다른 말’과의 관계 속에 노출시킴으로써 한국어를 ‘타인의 눈’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어의 개성이 이 책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이 책은 철저하게 한국어 현실에서 출발한 창조적 번역 이론서이자, 중국과 일본, 미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투명하게 비추는 우리말 임상 보고서이다.
언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제국주의 국가가 예외 없이 식민지에서 종주국의 언어를 강요한 것도 언어를 통해 식민지 주민들의 정신을 장악하고 영구히 노예화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어의 논리보다 외국어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국 번역의 현실을 통해 해방 후 두 세대가 지나도록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한국 주류 계층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쉬운 우리말을 두고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를 즐겨 쓰는 세태를 비판하며 평생 동안 바르고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을 벌였던 이오덕 선생,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는 우리말과 글’을 내세운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펴내 순 우리말을 고급 문자 언어로서 새롭게 조명한 한창기 선생은 우리말 바로 쓰기의 선각자들이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의 터전을 가꾸는 데 힘을 실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 책은 여러 선각자들이 이어 온 우리말과 정신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번역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우리말과 외국어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결하는 번역 현장이야말로 가장 치열하게 우리말과 글의 쓰임새를 고민할 수 있는 곳인 바, 번역을 하면서 비로소 우리말에 눈을 떴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번역 현장에서 찾아낸 한국어의 고유한 개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영어는 사물을 주어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어는 주어 자리에 딱딱한 추상 명사보다는 사람이 오는 걸 좋아한다. 또 영어는 한국어보다 추상성과 보편성을 담는 데 강하고 한국어는 구체성과 특수성을 나타내는 데 강하다. 명사와 형용사를 중시하는 영어의 논리를 따라 번역을 하면 구체적이고 생생한 부사가 풍부한 한국어의 개성이 죽는다. 한국어의 특징을 ‘우리말’ 영역 안에서만 누릴 게 아니라 번역에서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국어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번역은 짝짓기다. 단어의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두 말에 담긴 정신의 핵심을 대응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며 ‘두 말에 담긴 정신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번역가는 저울 한쪽에 저자의 말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번역어를 올려놓은 뒤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데 한국의 번역 문화는 그동안 한쪽으로만 쏠렸다. 지나치게 출발어(원어)의 눈치를 보면서 원문에만 충실하려 했다.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우러러보기만 했다. 한국어 논리보다 영어, 일본어 논리에 충실한 번역으로 저울은 기우뚱하다. 한국어의 논리를 제대로 알 때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한국어가 지닌 개성을 더욱 풍요롭게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기 언어의 현실을 바로 보고 두 말의 균형을 잡으려 한다면 한국어가 지닌 개성을 더욱 창조적으로 살찌울 수 있다.

이희재 저/ 교양인 펴냄/ 1만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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