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그라운드 떠나는 ‘라이온킹’ 이동국 

2020.11.02 10:28:06 호수 1295호

파란만장 23년 축구인생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라이온킹’ 이동국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한국 축구계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이동국이 은퇴 소식을 알리면서 축구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20세 축구 천재에서 41세 K리그 레전드로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을 보낸 이동국의 발자취를 되돌아봤다. 
 

▲ 기자회견 갖는 라이온킹 이동국


이동국이 지난달 26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은퇴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동국은 “아쉬움과 고마움이 함께 했던 올 시즌을 끝으로 저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았던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했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라이온킹’
은퇴 발표

이동국 아내 이수진씨는 26일 자신의 SNS에 “학교 끝나고 차에 타서 아빠의 은퇴 소식을 처음 알리고 은퇴 발표 영상을 함께 보면서 어린아이들의 느낌은 어떨까 내심 궁금했는데 이렇게 폭풍 오열을 할 줄이야”라며 설수대(이동국의 자녀 설아, 수아, 시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게시했다.

이어 “아직 어린 애기들인 줄만 알았는데 너희들도 엄마와 같은 마음이구나. 절대 이런 상황에서 울지 않는 시안이까지 울음이 터지고”라며 “많은 분이 울면서 연락이 오셔서 종일 울고 또 울고. 우리 그냥 함께 마음껏 울어요”라고 남편 이동국 은퇴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영상 속 설아는 아빠 이동국의 은퇴 영상을 보며 “아빠는 왜 그만두는 거야! 아빠 그냥 할아버지 될 때까지 계속하지” 함께 있던 수아와 시안이도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동국의 은퇴 소식에 과거 전북에서 그와 함께 뛰었던 이종호는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교과서. 공격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 플레이 영상을 찾아보며 감탄하며 배움을 얻었던 전설 이동국 선배와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는 언제나 극복하는 사람이었다”며 “라이언킹의 새 출발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이어 “함께 울고 웃었던 23년이었다”고 적었다. 이 지사는 “국민의 염원을 가득 담은 그라운드 위에 그가 있었다”며 “국민의 탄식도 환호도 모두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차범근축구상(4회)을 수상하며 잠재력을 드러낸 이동국은 1998년 프로 데뷔와 동시에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다. 포철공고를 졸업하자마자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그는 축구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만 19세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187cm의 좋은 피지컬과 탁월한 골 결정력으로 황선홍을 이을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이목을 끌었다. 

축구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1997년부터 한국축구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을 올린 이동국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 명단에 뽑혔다. 김도훈, 최용수와 펼친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진 못했지만, 잠재력을 인정받아 출전 기회를 잡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팀 직행
독일, 영국 등 해외진출 실패

당시 한국 축구는 1무2패로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0-5 참패를 당할 때 네덜란드전에서 후반 교체 출장해 나선 그는 주눅 든 선배들을 대신해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했다. 

이후 안정환, 고종수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며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뛰어난 축구 실력과 준수한 외모, 개성 넘치는 매력을 갖추면서 많은 여성 팬들을 확보했다. 

1998년 K리그 최우수선수(MVP)는 고종수였다. 이동국은 당시 고종수에 밀려 신인왕을 거머쥐는 데 만족해야 했다. 1999년 MVP는 안정환이 수상했다.


데뷔 초반 이동국은 분명 리그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선수 중 한 명이었지만, 고종수, 안정환과의 비교에서는 주목도가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팬들은 귀를 살짝 덮은 머리를 휘날리며 슈팅을 날리는 그에게 팬들은 ‘라이온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환호했다.

2000년은 특히 이동국이 힘든 시기였다. 2000년 1월 올림픽 대표팀 소속으로 호주 4개국 친선대회에 출전해 이집트, 나이지리아, 호주전에 출전했다. 쉴 새 없이 2월이 되자 A대표팀에 발탁돼 북중미 골드컵에 출전했다.
 

당시 코스타리카전에서 골을 넣기도 했다. 이후 소속팀 포항 스틸러스에서 K리그에 출전했고, 올림픽 기간이 다가오면서 9월에는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시드니올림픽에 나섰다. 당시 칠레전에서 골을 넣었고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2승 1패의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토너먼트 라운드 진출에는 실패했다.

호주에 다녀온 이동국은 여전히 쉬지 못하고 10월 LG 4개국 친선대회,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나섰다. 조별리그 3경기와 3~4위전까지 한 번도 쉬지 못한 채 출전했는데 6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2001년 1월에는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으로 임대를 떠나기도 했다. 교체로만 7경기에 출전한 뒤 경기장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당시 클라우디오 피차로, 아일톤 두 선수에 밀려 좀처럼 선발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면서 포항으로 복귀했다. 이동국은 베르더 브레멘에서 실패 원인에 대해 “내성적인 성격 탓에 동료들과 빨리 융화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동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최종 명단에 들지 못하는 아픔을 맛본다. 프랑스월드컵 당시 상대 팀 사령탑으로 이동국의 인상적인 슈팅을 눈앞에서 지켜봤던 히딩크 감독의 결정이었다.

해외 고전
힘든 시기

많이 뛰는 축구, 공격수의 수비 가담을 강조했던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 대신 황선홍과 안정환, 최용수와 설기현을 선택했다. 뜻밖의 탈락에 이동국은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를 보지 않고, 폐인처럼 살았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동국은 2002년 월드컵 직후 심경에 대해 “(2002년도에는)정환이형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2002년도에 스트라이커 4명 정도 뽑는데 4명 중 황선홍, 최용수, 설기현 선수 등이 있었다”라면서 “그 선수 중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 감독님이 선호하는 선수들 위주로 발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엔트리에서 탈락이 됐다”고 회상했다.

월드컵 직후 펼쳐진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이동국은 군 면제를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주장이던 이영표는 이란과의 4강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도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실축했고 아시안게임 우승은 좌절되고 말았다.

월드컵에서 최종 명단 탈락과 아시안게임 우승 실패 등 국제대회로 인해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한 이동국은 결국 2003년 광주 상무에 입대, 군복무를 하면서 재기에 나섰다. 입대하자마자 27경기 11골을 터뜨렸다.

이동국의 K리그 첫 두 자리 득점이었다. 군복무 동안 그는 종횡무진하며 K리그서 51경기를 뛰며 15골-11도움을 기록했다. 권위적이었던 이동국은 상무에서 생활하며 성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2004년 12월 국가대표 친선경기에서 이동국은 환상적인 득점을 기록하며 국내 팬들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부산에서 열린 독일과의 평가전에서 세계 최고 골키퍼 올리버 칸을 상대로 환상적인 발리슛을 성공했다.

지금도 이동국은 “한 골 한 골이 다 소중하지만, 독일전 발리슛을 했을 때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공이 발에 맞는 찰나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05년 최고의 컨디션으로 맹활약한 이동국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의 황태자로 불리며 월드컵 출전이 확실시됐다. 월드컵 두 달 앞둔 4월5일. K리그 경기 도중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면서 또 한 번의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다.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던 이동국은 2007년 1월 ‘꿈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이뤄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동국은 두 시즌 동안 정규리그 19경기에서 무득점에 그친 가운데 FA컵 4경기(1골)와 리그컵 2경기(1골)를 합쳐 25경기에서 2득점의 기록을 남기고 돌아왔다. 

이동국은 “프리미어리그는 힘든 리그였고 나도 최고의 컨디션은 아니었다”며 “하지만 미들즈브러에서 뛰면서 전술, 훈련방식, 소통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돌아봤다.

골, 골, 골…
K리그 전설

2008년 성남일화에 복귀해 1년 내내 뛰고도 2골밖에 기록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네티즌들은 “이동국은 끝났다”는 의견을 쏟아냈다.

끝난 것 같았던 이동국의 축구인생은 2009년 최강희 감독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입단 당시 한물간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적한 이후 전지훈련 15경기에서 단 한골도 넣지 못한 이동국을 두고 최강희는 “골 못 넣어도 괜찮아! 10경기 골 못 넣어도 그 다음 경기 15경기에서 넣으면 된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라고 격려한다.

이동국이 10경기 넘게 골이 없었다는 것은 팀 성적도 연패를 겪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최 감독의 속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의 성실한 모습을 믿고 오히려 믿어줬다. 그 후 이동국은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1349일 만에 멀티골을 터뜨리면 스승의 믿음에 보답한다.

이동국은 그해 득점왕(21골)과 최우수선수(MVP)에 올라 전북에 창단 15년 만의 첫 K리그 우승컵을 안겼다. 당시 K리그 최종전에선 500경기 출장 금자탑을 세운 경남 골키퍼 김병지를 상대로 멀티골을 뽑아내며 주인공 자리를 뺏었고, 친정팀인 성남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선 극적인 쐐기골로 우승을 자축했다. 전북 천하가 시작된 원년이었다. 

이듬해 월드컵과 인연이 없던 이동국은 드디어 꿈을 이뤘다. 이동국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안정환, 김남일 등 노장들과 함께 발탁돼 12년 만에 꿈에 그리던 무대에 돌아왔다. 후배들에 밀려 선발로 나서진 못했지만,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 교체 투입돼 경기 종료 직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비가 오는 바람에 이동국의 빗맞은 슈팅은 속도를 내지 못했고, 골라인을 넘어가기 직전 우루과이 수비수 고딘이 걷어내면서 경기는 2대 1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동국의 마지막 월드컵은 그렇게 끝났고, 1998년과 2010년 두 번의 대회에서 선발 출전과 공격포인트 없이 51분의 출전 시간만 기록했다.

월드컵의 슬픔도 뒤로한 채 다음 해 소속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다.

네티즌들로부터 ‘골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공격수’라는 질타를 받자 리그에서 도움왕과 최우수선수를 차지했다. 2011년 ACL에서는 9골 몰아넣으며 득점왕 차지하기도 했다.

2010년부터 전북 소속으로 ACL에 출전하기 시작한 이동국은 그해 4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ACL에서만 무려 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전북은 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알사드(카타르)에 패하며 준우승했지만 맹활약한 이동국은 2011년 ACL의 MVP가 됐다.

31세 최강희 감독 만나 ‘펄펄’ 
K리그 547경기 228득점 금자탑

2011년 중동의 한 클럽에서 이동국에게 거액의 러브콜을 보냈다. 건물 한 채 값의 거액을 제시한 팀이 있었지만 이동국은 거부했다. 거부한 이유는 부활하게 해준 감독님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그의 아내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한 번 더 생각해봐. 감독님이 반대의 상황이라면 중동 가셨을 거야”라고 설득했었다. 이동국은 “내가 버림받는 건 괜찮은데 내가 버릴 수가 없다”고 말하며 스승에 대한 사랑과 의리를 보여줬다.

이동국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는 더 이상 서지 못했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국가대표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집돼 한국의 월드컵행을 이끌었다.  더 이상 월드컵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동국은 K리그에서 새로운 기록을 꾸준히 썼다. 

K리그 최다 득점 기록 경신뿐만 아니라 2017년에는 K리그 최초로 70-70 클럽(70골-70도움)에 가입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K리그 최초 통산 300공격포인트(223골77도움)를 달성했다. 
 

도움도 77개로 역대 2위다. 1위는 110개의 염기훈(수원 삼성)이다.

아시아에서도 최고였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37골을 터뜨려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동국과 함께 전북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K리그 7회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을 기록하며 K리그 최고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동국도 K리그 역사상 최초로 MVP를 4회(2009, 2011, 2014, 2015년) 수상했다. 이동국은 필드 플레이어 가운데 가장 많은 547경기를 소화하며 최다득점인 228골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됐다.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의 향후 거취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도자 전향과 본격적인 예능 진출 등이 거론된다. 일단 이동국은 지도자 변신을 위한 준비를 이어간다. 은퇴 경기를 치른 후 11월 A급 지도자 자격증 교육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난 6월 1차 교육을 이수했고, 2차 강습을 앞두고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하면 국가대표팀과 K리그 코치로 활동할 수 있다. 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하고 고교 이상의 전문등록팀 지도 경력 5년을 채우면 P급 지도자 교육 과정을 신청할 수 있다. P급 지도자 자격증을 확보하면 대표팀 및 K리그 감독을 맡을 수 있다.

일단 이동국은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한 뒤 프로 코치로 활약할 발판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인생 2막
지도자로

또 예능인으로서 보다 많은 활동도 예상된다. 이동국은 그동안 다섯 자녀와 함께 KBS2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 일상을 공개하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연예대상 후보로도 오르며 방송계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방송가는 이동국의 상품성을 높게 평가하고 출연 섭외가 이어졌으나 현역 활동으로 인한 출연 제약이 있었다. 은퇴를 선언한 만큼 자유롭게 예능 프로그램에 나설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옥의 티’ 이동국 과거 논란

이동국의 부친이 1998년에 병무청 직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는 수법으로 아들의 병역 비리를 청탁해 적발된 바 있다.

그의 부친은 병역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됐고, 최초 실형을 받아 교도소에 갔지만, 최종적으로 2000만원의 벌금형을 판결받았다.

이동국 부친의 병역비리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김대업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동국의 부친은 아주 적극적으로 아들의 병역면제를 위해 비리, 불법, 청탁행위를 저질렀고 심지어 병역비리계의 대부였던 박노항과도 접촉을 시도했다고 한다.

상당히 악질적인 방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병역비리를 청탁했기에 초범에 전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형, 그리고 최종심엔 2000만원이라는 거금의 벌금형까지 선고받은 것.

이동국 본인은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특별한 상해나 질병이 없었음에도 몇 차례나 부친의 병역비리 행각에 재검으로 화답했다는 점에서 의혹을 떨치기는 어렵다. 

2007년 아시안컵 기간 중 이동국은 이운재, 우성용, 김상식과 함께 인도네시아 현지 룸살롱에서 술판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상벌위원회는 음주 파문을 일으킨 선수 4명(이운재, 우성용, 김상식, 이동국)에 대해 ‘대표팀 경기 1년 자격정지’의 중징계를 내렸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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